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130화 (130/209)

130화. 厚顔無恥(후안무치)

강가장의 지하 통로는 길고 좁았다.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으며 어디선가 앙금쌀쌀 기어가는 벌레의 기척도 느껴졌다.

‘견뎌야 한다.’

가은은 당장이라도 비명이 나올 것 같은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고 묵묵히 앞으로 나아갔다. 분명 외길이건만 아득히 멀어진 운선의 그림자 때문에 마음이 초조했다.

“강운선만이 목표가 아니다. 이번에 신교를 뿌리 뽑지 않으면 제 이의, 제 삼의 강운선이 나올 테니.”

장은은 언제나 그녀보다 몇 수 앞을 내다봤다. 질투가 나기도 했지만 존경스럽기도 했다. 물론 핏줄을 거스르는 일에 가책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장은의 계획을 따르는 게 지금으로선 훨씬 유리했다.

‘강운선은 절대로 장은을 이기지 못한다.’

가은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정직한 이가 이긴 적을 본 경험이 없었다. 종국에는 누가 누가 더 약은 수를 쓰느냐의 경쟁이었을 뿐. 그러고 보니 자신의 주변에는 늘 이기적인 인간들만 득시글거렸다. 문득 참을 수 없이 외로워졌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온전히 사랑받은 기억이 없었다. 남들에게는 당연한 부모의 사랑조차 부러움이었다.

“숙부님!”

쓸쓸함을 견디지 못하고 가은이 나직하게 운선을 불러보았다. 여린 조카의 부름에 응해줄 만도 하건만, 어둠 속은 여전히 고요했다.

스스슥

“아악!”

발등을 간지럽히는 것의 정체는 보나 마나 징그러운 벌레들일 테지. 가은은 이제 슬슬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모두가 자신을 이용하여 이득을 취하려 했다. 질녀를 위험 속에 버려두고 도망치는 운선도 그중 하나일 것이었다.

‘그래, 믿을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어. 속이고 또 속여서 다 가질 거야. 아무도 나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벌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를 둘러싼 모든 이들은 벌레보다도 못했다. 하여, 모두를 속이는 일에 죄책감은 전혀 없었다.

“어?”

얼마나 걸었을까? 캄캄한 어둠을 뚫고 한 줄기 빛이 가은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드디어 출구였다.

“숙부님!”

이번에는 더 큰 소리로 운선을 불렀다. 혹시라도 그를 놓쳤을까 봐, 불안했다. 시야는 점점 밝아지는데 적막은 갈수록 짙어졌다.

“설마…….”

계획의 요지는 운선의 측은지심이었다. 고작 며칠 전에 만난 사이지만 질녀를 적진에 버려두고 갈 만큼 매정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애절하게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이미 동굴의 출구에 다다랐다.

“아!”

따뜻한 햇볕이 축축하게 젖은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다. 가은은 생전 처음 보는 신이한 풍경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동굴 밖은 성인 열댓 명이 둥글게 원을 만들어도 될 만큼 넉넉한 너비의 공터였다. 아직 봄꽃이 피지 않은 강가장과 달리 이곳에는 온갖 야생화가 꽃을 피웠다.

황홀한 향기에 취해 정신이 아득해질 것 같았다. 그러나 가은에게는 이보다 훨씬 중한 임무가 있었다. 운선의 자취를 따라 서둘러 주변을 탐색했다. 발소리를 죽이며 꽃길을 따라 이동했다. 얼마나 움직였을까? 이번에는 사방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 수려한 절벽 위에 운선이 있었다. 검은 도포 자락을 휘날리는 그의 뒷모습을 마주한 순간, 가은의 가슴 속에서 뭉근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그래도 당신은 나를 버리지 않았구나.’

그를 배신할 앙큼한 계획을 짜놓고도 가은은 뻔뻔하게 운선의 배려가 고마웠다. 늘 버림받고 이용당하는 일에 이골이 난 그녀였기에 운선의 기다림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숙부님, 먼저 가신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운선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눈물이 글썽글썽 맺힌 가은의 얼굴은 순수하기만 했다.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하건만, 망설여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일은 위험하니 조카님은 빠지는 게 좋겠어요. 열쇠를 넘겨주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세요. 이제부터 제가 찾겠습니다. 그곳이 있는 장소만 알려주면 됩니다.”

“네? 설마 선운검파에 남으라는 말씀이세요? 그건 아니 될 말씀이세요. 정대협에게 숙부님과의 관계를 들켰으니 스승님은 분명 저를 죽이려 들 거예요.”

운선은 끝까지 거짓을 늘어놓는 가은이 측은했다. 거짓말을 하면서도 거짓인지도 모르는 사람 같았다. 자기가 만들어놓은 그럴듯한 상황에 너무 심취한 탓이리라.

“내 잘못입니다. 조카님을 내버려 둔다면 온갖 위험한 일에 끼여 이용당할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어리석었어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결심이 섰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운선은 한 장 이상 떨어져 있는 가은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섰다. 이제 이 지겨운 연극에서 소녀를 퇴장시킬 생각이었다. 그것이 진건에 대한 존중이자 예의였다.

‘열쇠를 빼앗으려는 거구나.’

직감적으로 운선의 의도를 눈치챈 가은은 몸을 동그랗게 말고 주저앉았다. 무릎을 세워 그 안에 고개를 박아넣어 몸을 공처럼 만들었다. 이제 목을 잘라내지 않는다면 품속에 넣어둔 열쇠를 훔쳐 가지 못하리라.

“하아”

상대가 너무나 예상대로 행동하자, 운선은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뱉어냈다.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아마도 가은의 모든 말과 행동은 열쇠를 빼앗기 위한 초석이었을 것이다. 정은률과 한패이면서도, 마치 그의 강요 때문에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것인 양 꾸며내었다. 아마 때를 보아 열쇠도 훔칠 생각이었겠지.

“조카님, 소용없습니다.”

운선은 가은의 몸에 닿기 직전 손바닥을 쫙 펼쳤다. 두 사람 사이의 한 치도 되지 않는 공간에서 작은 돌풍이 만들어졌다. 그것이 점차 회전을 더하자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앗 뜨거워!”

결국, 가은은 뜨거운 기운을 견디지 못하고 자세를 풀었다. 아직 날이 차가운데도 온몸이 후끈후끈했다. 목덜미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자 자신도 모르게 숙였던 고개를 쳐들고 말았다.

“조카님, 실례하겠습니다.”

손놀림이 얼마나 빠른지 가은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목 주변이 썰렁해진다 싶더니 어느새 열쇠는 운선의 손으로 옮겨졌다.

“안돼!”

“강대협, 소녀의 몸을 함부로 더듬다니 무뢰배가 따로 없군요.”

물러서기도 전에 안면으로 거센 주먹이 날아왔다. 운선은 고개를 뒤로 젖혀 주먹을 흘려보냈다. 힘이 거의 실려있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코뼈가 박살이 날 뻔하였다.

“영명권? 장은?”

“네, 접니다. 그간 잘 지냈습니까?”

운선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많은 감정을 비워냈음에도 그에 대한 분노는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유이정, 마세풍, 그리고 현진까지. 그가 사랑하는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그를 용서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성곤은 어딨습니까? 설마 이번에도 당신이 미끼입니까?”

장은은 주변 풍경을 찬찬히 돌아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이런 절벽을 지나 태봉으로 가는 일이 가당키나 한가? 이번에도 운선의 유인책이었다.

“왜 매번 목숨을 걸어 그들을 지킵니까? 의리? 사명? 뭐 그런 구차한 이유입니까?”

“그럴 리가.”

운선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꼭 자기의 그릇만큼만 생각하는 장은이 딱하고 안쓰러웠다.

“우리 오늘은 제대로 겨뤄봅시다.”

어차피 그것이 목적이었다. 소녀를 이용하는 비겁한 수를 쓸 이가 또 누가 있겠는가? 운선은 부러 시간을 끌면서 이제나저제나 장은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드디어 만났으니 쉽게 돌려보낼 생각은 없었다.

“아아, 뭔가 오해가 있나 본데 지금 제가 싸울 만한 몸 상태가 아니라서 말이지요. 우리 대화로 풀지요.”

“우리가 한가하게 안부를 물을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장은은 고개를 젖히며 한참을 깔깔댔다. 어쭙잖은 의리에 목숨을 거는 운선과 같은 인간, 그가 가장 경멸하는 부류였다. 그는 경멸하는 이와는 결코 싸울 생각이 없었다.

“성곤만 넘겨주면 나머지 신교도들은 건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이 귀여운 조카님도 살려드리죠.”

운선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상대의 약점을 정확하게 알고 이를 노리는 치사한 수작. 장은은 그가 아는 이 중에 가장 파렴치하고 악랄한 인간이었다.

“싫다면?”

“그럼 이 아이부터 해결해야죠.”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장은은 가은의 등에 일 장을 날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공격에 당황한 가은은 미처 피할 새도 없었다. 엄청난 충격이 등 언저리에 전달되는 순간, 가냘픈 몸은 마치 종이 인형처럼 단박에 높이 치솟았다. 그리고 사지를 버둥거리기도 전에 엄청난 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안돼!”

운선은 재빨리 운공하여 신공의 기운을 주먹에 모았다. 무리한 기의 흐름은 자칫 역류할 수도 있으나 지금은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두 주먹을 크게 휘두르자 정확하게 가은의 몸뚱이 쪽으로 무형의 무언가가 뻗어 나갔다. 호랑이 바위에서 신교도들을 받아낸 그 일 초였다.

휙!

또한, 운지행을 사용하니, 수 걸음 만에 그 아래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속도가 한참 줄어든 가은의 몸이 나풀나풀 떨어지더니 품에 쏙 안겼다.

“윽!”

그러나 운선이 받아낸 것은 그녀의 몸만이 아니었다. 가은은 왼손으로 운선의 목덜미에 걸린 끈을 낚아채는 동시에 오른손을 쭉 뻗었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미처 방어할 틈이 없었다. 극심한 통증에 찬찬히 시선을 내리니, 한 자루의 비수가 좌 요부에 꽂혀 있었다.

“너, 너…….”

“숙부님, 죄송해요.”

가은은 연신 사죄하였으나 얼굴에는 미안한 감정이 조금도 없었다. 이 어려운 임무를 해냈다는 안도감, 만족감. 얼마나 신이 났는지 그렇게 세차게 등을 얻어맞았는데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과연.”

장은의 한쪽 입술이 쭉 찢어졌다. 측은지심(惻隱之心)! 운선이 아무리 강해졌다 하더라도 결코 자신을 이길 수 없는 이유였다.

“대한(大寒)”

영명권 최고 경지인 대한을 호명하며, 장은은 힘차게 주먹을 내질렀다. 극강의 차가운 바람이 주변을 얼려버릴 기세로 세 사람을 감쌌다.

“해도 해도 너무하는군.”

운선은 가은을 집어 던지듯 땅에 내려놓는 즉시, 두 주먹을 뻗었다. 방어라도 해보려는 몸부림이었다. 이미 출수할 때를 놓친 데다가 좌 요부의 통증이 극심하여 내력의 일 할도 싣지 못한 일격이었다. 그나마 몸을 움츠려 상대의 힘을 튕겨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퍽!

빠직!

장은의 주먹이 운선의 쇄골에 적중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주르륵 뒤로 밀려났다. 뭐라도 막아줄 뒷배가 있었다면 모르겠으나 절벽을 등지고 있던 터였다. 하염없이 밀려나더니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안돼!”

뒤늦게 정신을 차린 가은이 비명을 질렀다. 어느새 뜯어나간 앞섬 사이로 수파가 떨어져 나간 목걸이 줄이 보였다. 운선의 목에 걸린 열쇠는 얻었으나 정작 자신의 열쇠는 뺏겼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문주님, 시체를 찾아야 해요. 반드시!”

부상 때문에 몸을 일으키지 못하면서도 끝까지 집착을 버리지 못했다. 비굴하게 땅을 기어 오더니 장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약속과 달리 일 장을 날린 그가 괘씸했지만, 지금은 그 일을 따져 물을 때가 아니었다. 오직 운선이 가져간 열쇠 두 개를 찾아야 했다.

“흐음.”

발목에 붙은 가은을 흥미로운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장은은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속이려 했다지만 숙부님이라니? 게다가 꾀가 많은 운선이 그리 쉽게 조카라 믿을 리가 없을 텐데?

“나에게 뭘 숨기는 거냐? 혹시 진짜 려국인인 게냐?”

“그, 그럴 리가요. 아시잖아요. 저는 운평에서 태어나고 자란 토박이인걸요. 말씀드린 대로 그럴듯하게 지어내 믿음을 주었을 뿐입니다. 아무렴 저도 사람인데, 저 마두와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였다면 감히 칼을 쑤셔 넣을 수 있었겠어요? 그저 일을 완벽하게 끝내고 싶은 거예요. 이리 허망하게 죽어버리면 성곤도 신교도들도 찾을 길이 요원하잖아요.”

아무리 부인해도 그녀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어색함을 눈치 못 챌 장은이 아니었다.

“려국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지. 다만.”

어째서 운선에게 몸을 던지는 계책까지 생각했을까? 가은에게 함부로 목숨을 걸 만큼 희생정신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되레 뭔가 빼앗긴 것 같은 저 당혹스러움은 뭔가? 그때, 가은의 꽉 쥔 주먹이 보였다. 칼을 박아넣는 그 위험한 순간에도 필사적으로 뻗던 왼손이 생각났다.

“아아, 너도 그곳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게로구나? 그리고 그게 끝이 아니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