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着手(착수)
인경은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명문정파의 자부심이 하루아침에 산산이 무너져 내렸다. 고작 종이 쪼가리 때문에 동료를, 형제를 찌르고 베는 아수라장 속에서 그는 무기력할 뿐이었다.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영준이 괴로워하는 그의 장문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인경은 대답 대신 고개를 크게 내저었다.
“지켜봐야 한다. 강호의 민낯을, 정파의 위선을 똑똑히 지켜보겠다.”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끊임없이 위로 솟구쳤지만, 결코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이 치욕을 견뎌내는 것 또한 장문의 자질이었다.
“아무래도 용문주님이 위험한 것 같습니다.”
인경은 그제야 이 참상의 주인공을 찾아보았다. 운선을 상대하는 이는 다름 아닌 용가현이었다. 그는 수세에 몰려 무리한 일격을 감행하고 있었다. 육체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지쳐 있는 그가 열세에 처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도와야 할까요?”
“아니, 그럴 수 없다.”
설사 용가현이 여기서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돕지 않아야 했다. 복수는 오롯이 당사자의 몫이어야 했다. 다른 누가 대신해준다고 해서 복수심이 가라앉을 리 만무했다. 같은 처지에 놓인 인경이었기에 응당 이해할 수밖에 없는 마음이었다.
“그럼 고대협도 문주님과 같은 뜻일까요?”
영준의 손짓을 따라가 보니 음흉한 미소를 지은 채 쳐다보는 고유생이 보였다.
“아니, 그는 그저 용문주를 이용해 강대협을 지치게 만들려는 것이다.”
사람의 그릇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모양이었다. 강호의 대선배인 고유생이었지만, 이제 갓 무공을 배우는 막내 제자들보다도 그릇이 작았다. 그는 자기 자신 하나 담아두기에도 벅찬, 딱 간장 종지만 한 인간이었다.
“그런데 백형진과 장은이 보이지 않는다. 왜지?”
누구보다 운선을 잡고 싶어 하는, 잡아야 하는 두 사람이었다. 스승의 복수를 해야 하는 백형진은 물론이거니와 무림 맹주를 노리는 장은 역시 마두를 잡아 공을 세워야 할 터였다.
“왜지?”
인경은 자신의 쪽으로 날아오는 종이 한 장을 재빨리 장풍으로 날려 버렸다. 수 명의 무림인들이 그 주변으로 개떼처럼 몰려들었다. 그 사이에서 겨우 몸을 빼내려던 영준이 누군가의 발에 걸려 바닥에 털썩 넘어졌다.
“어이쿠! 어?”
“괜찮으냐?”
인경이 황급히 영준을 잡아끌었으나, 웬일인지 그의 몸이 돌덩이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대단한 장면이라도 목격한 듯, 입을 헤 벌리고 한 곳만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아주 오랜만에 낯익은 이름을 뱉어냈다.
“가은…, 가은 낭자?”
“가은?”
그의 시선을 따라가니 웬 야리야리한 소녀가 황급히 후정(後庭)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얼굴을 확실히 보지는 못했으나 얼추 가은의 모습 같기도 하였다.
“어째서 이곳에?”
어떤 생각들이 인경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당시에는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건만, 사라진 장은과 나타난 가은을 보니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전서구를 보낸 이가 가은 낭자였구나. 어떤 방법을 썼는지 모르겠으나 강운선을 먼저 따라온 모양이군. 설마 여인 혼자서 저리 무모하게 행동할 리는 없을 테고. 아, 두 사람 간의 별도의 교신이 있었구나.’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발을 살짝 구르자 몸이 둥실 떠올랐다. 전각의 외벽을 빠르게 타고 지붕 위에 올라서니 어느덧 마당이 한눈에 보이는 위치에 다다랐다.
“문주님!”
이윽고 정신을 차린 영준이 따라가려 했으나 이미 인경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멍하니 주변을 보니, 여전히 마당은 살육의 현장이었다.
“나를 버려두고 가면 어쩌냔 말이야.”
운선은 주운의 옷자락을 품속에 고이 넣어두었다. 인연을 끊어낸 쪽은 주운이 아닌 자신이었다. 하여, 원망도 미움도 없었다.
‘당신도 이제 자유로워지길.’
처음 만난 이후로 쭉, 그녀는 오직 운선을 지켜왔다.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운선 또한 그녀를 의심한 적이 없었다. 비록 시작은 불순한 목적이었을지라도 괜찮았다. 슬프고 아렸으나 그것이 분노와 배신감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내가 옆에 있으면 주운은 행복해질 수 없다.’
려국인의 삶을 택한 이상, 주운에게 줄 것은 기다림 뿐이었기에. 지금이 가장 행복한 결말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작은 한숨을 끝으로, 운선은 주운에 대한 감정을 마무리 짓기로 했다. 태을신공의 완공과 함께 다 비워진 마음이었다. 그러나 이 절절한 그리움만은 깊은 구석에 숨겨둘 작정이었다.
끼이익!
텅 빈 동굴 안에는 자질구레한 집기들이 남아 있었다. 그것들은 운선이 일으킨 바람결에 자잘한 소음을 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불쾌한 소리만 가득하니 사방이 음산했다. 그러나 운선은 불빛을 들이지 않았다. 정 가운데에 우뚝 서서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풋풋한 향내가 콧속을 훅 파고들었다.
“숙, 숙부님… , 살려주세요.”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의 주인은 예상대로 가은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손톱을 깊숙이 박아넣은 사내가 운선을 향해 강한 살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강운선, 오랜만이구나.”
굵고 거친 목소리. 살짝 들뜬 말투. 딱 한 번 마주쳤을 뿐이지만 운선은 그 사내의 정체를 단번에 짐작하였다.
“풍림 정은률.”
“그래도 염치없는 놈은 아니구나. 손가락을 잘라내 놓고 이름도 기억 못 하면 사람 새끼가 아니지.”
새삼 욱신욱신하게 통증이 느껴졌다. 손가락을 잃은 후로 하루도 치욕을 잊은 적이 없는 그였다. 오늘 복수의 상대를 만났으니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
“강호에서는 당신을 협객이라 부르더니만, 오늘 보니 다 허명이군요.”
“뭐?”
“고작 소녀를 인질 삼아 협박을 하다니, 감히 협객이라 칭할 수 있겠습니까?”
“강운선!”
은률이 흥분하여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당황한 가은이 황급히 은률의 발가락 끝을 밟았다.
‘도발이다. 이놈이 얼마나 머저리인지 벌써 파악했구나.’
그렇다고 인질인 자신이 끼어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잔뜩 약이 오른 은률에게 은밀하게 신호를 보내는 게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조카님을 보내주시지요.”
정중했으나 위협적인 목소리였다. 부탁이라기보다는 요구에 가까웠다. 자신보다 네댓 살은 족히 어린 상대임에도 은률은 상대에게 위압감을 느꼈다. 어둠 속에서도 운선의 형형한 눈빛만큼은 선명하게 보였다.
“성곤은 어디 있나? 그를 내어놓으면 이 여인은 보내주겠다.”
“이미 떠나셨습니다.”
“뭐?”
당황한 은률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아주 잠깐, 그의 칼끝이 인질의 목덜미에서 반 치 정도 떨어졌다. 물론 그 틈을 운선이 놓칠 리가 없었다.
팅!
“억!”
은률이 단검을 떨어뜨리자, 가은의 입장이 퍽 난처해졌다. 인질 놀음이 계속되어야 운선을 잡아둘 수 있건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진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그 찰나의 갈등이 운선의 눈에는 적나라하게 보였다.
“역시”
운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선천적인 성정인지, 후천적인 환경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어느 쪽이든 진건의 성향과는 조금도 닮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했던 기대가 무너지자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강운선!”
은률은 재빨리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주워들었다. 일단 무조건 덤비고 봐야 했다. 성곤이 아니면 저놈이라도 죽여야 이 오랜 응어리를 풀어낼 수 있으므로.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빈손으로 돌아가지는 않으리라 다짐했다.
챙!
챙!
운선은 하는 수 없이 뒤로 돌아 거칠게 날아드는 은률의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어처구니없게도 승부는 세 합을 채 겨루지 못하고 끝이 났다. 싸구려 단검으로는 감히 수월의 예리함을 막지 못했다. 칼자루만 든 은률의 오른손은 칼날 파편에 찢겨 온통 붉은색이었다.
“숙부님, 정대협은 복수심에 눈이 멀어 치기 어린 행동을 했을 뿐이에요. 제발 살려주세요.”
어차피 일을 망친 김에 가은은 인정에 호소해 보기로 했다. 그가 장은이나 백형진 같은 인물과는 본질에서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죽일 생각 없습니다. 정대협, 지금은 절대적으로 저에게 유리한 상황입니다. 당신과 제대로 붙었다면 저 또한 목숨을 걸어야 했을 겁니다. 몸이 성치 않으니 당분간은 내력을 사용하지 마십시오. 기회가 된다면 우리는 추후 만나 우열을 가립시다.”
“아악!”
은률의 비명이 동굴 벽을 부딪쳐 돌림노래가 되었다. 그 모습이 딱하였는지 운선은 바로 돌아서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은 은률을 잠깐 내려다보았다.
“숙부님, 이제 오대산검에 남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저도 함께 데려가 주세요.”
“그게 무슨?”
가은이 은률의 상처 난 손에 수건을 쥐여주더니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떤 결연한 의지가 담긴 표정이었다.
“데려가 주세요.”
“…….”
자지러지게 놀라는 은률과 달리 운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뭔가 꿍꿍이가 있어 보였으나 내색하지도 않았다. 그저 뒤를 돌아 동굴 안쪽으로 사라질 뿐이었다.
“숙부님!”
가은은 운선을 놓칠세라, 종종걸음으로 뒤를 쫓았다. 의외로 은률은 그 뒤를 따르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그의 역할이었다. 조금 비겁하지만, 다음은 모두 가은의 몫이었다. 그리고,
“많이 다치진 않았느냐?”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그의 뒤편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사람의 형체가 차츰 어둠에서 분리되었다. 이 계획을 짜낸 장본인, 장은의 등장이었다.
“가은이 잘 해내야 할 텐데 걱정이구나.”
“잘 해낼 겁니다.”
장은은 여전히 바닥에 앉은 은률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고유생보다는 훨씬 쓸모 있는 아우가 돌아왔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제도 얘기했지만, 서운한 마음은 접어두렴. 내가 어찌 사랑하는 아우를 버렸겠느냐?”
“오해하지 않아요.”
퉁명스러운 은률의 대꾸에는 진심이 없었다. 그 마음을 모르지 않는 장은이지만, 새삼 호들갑스럽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래, 네가 이 형의 고충을 알아주니 고맙구나. 설사 앙금이 남았더라도 그건 나중에 청산하자꾸나. 성곤과 강운선을 잡아 옛 원한을 갚아야 하지 않겠니?”
은률의 눈동자에 다시금 살기가 가득 찼다. 성곤! 그의 목표는 오직 성곤이었다. 그날의 불길, 그 속에 어머니와 형이 있었다고 했다. 어떻게든 살겠다고 기어 나오는 그들을 망나니처럼 베어낸 이가 검귀 성곤이었다.
두 나라의 전쟁과는 상관없는 이들이었다. 그저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이 삶의 전부인 그들은 알지도 못하는 명분 때문에 찢기고 불탔다. 은률에게 나라 따위는 아무 의미 없었다. 오직 가족의 비명만이 그가 성곤을 죽여야 하는 명분이었다.
‘기필코 쓸어버릴 테다.’
아직도 피가 배어 나오는 손으로 주먹을 꽉 감아쥐었다. 그리고 운선과 가은이 사라진 어둠 속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또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