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分袖相別(분수상별)
“해심밀이다!”
“주워라!”
“여기에 있다!”
누군가의 외침이 시작이었다. 삽시간에 사람들이 마당에 뒤엉키기 시작했다. 저 비급의 한 장만 있어도 고수가 될 수 있다. 하여, 그들은 그 한 장을 위해 몸을 날렸다.
캉! 캉!
“악!”
찢어진 종이에 비해 사람 수가 월등히 많았다. 이제 뺏지 않으면 자신의 것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들은 각자의 병장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뜻을 함께했던 명문정파의 제자들은 한낱 종이 쪼가리를 얻기 위해 서로의 목숨줄을 노렸다. 손을 짓밟고 날갯죽지를 베어내면서도 양심의 가책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약육강식(弱肉强食). 욕망에 눈이 먼 그들은 짐승과 다름없었다.
‘이것이 강호의 민낯이란 말인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마당은 아수라장이었다. 주운은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정의를 부르짖으며 모였던 명문정파의 무림인들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오직 욕심에 눈이 벌게져 서로를 짓밟는 아귀(餓鬼)들만이 가득했다.
“이것이 당신이 말하던 진실입니다.”
그녀의 등 뒤에서 운선의 격양된 목소리가 들렸다. 주운은 차마 등을 돌릴 수 없어 그 자리에 동상처럼 얼어붙었다. 누가 그 착한 아이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철없고 어리석은 강운선은 죽었습니다. 하여, 당신에 대한 모든 감정도 잊었습니다.”
“…….”
공허한 그의 눈빛에서 주운은 깨달았다. 방금까지 보여주었던 분노, 억울함, 회한 모두 한낱 연극에 지나지 않았구나. 그의 마음에 더 이상 자신의 자리는 없었다.
“네 이놈! 검귀가 없다면 네놈의 목이라도 내어놓아라!”
세찬 주먹이 두 사람 사이를 뚫고 들어왔다. 이처럼 화려하고 묵직한 권풍을 날릴 수 있는 이는 강호에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아우들의 복수에 눈이 먼 용가현이었다. 그는 ‘해심밀경소’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소요음(逍遙吟)”
용문파 내공의 진수 소요공(逍遙功)은 이름과 달리 자못 화려했다. 용가현의 주먹을 중심으로 거센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바닥에 떨어진 매화 꽃잎이 두둥실 바람을 타고 오르더니 마치 덩굴처럼 팔을 타고 엉겨 올랐다.
“과연 명불허전이구나.”
운선 역시 허투루 대할 마음은 없었다. 용송현과 용조현도 뛰어났으나 감히 묵안과 비견할 만한 실력자는 오직 용가현이었다.
“명덕(明德)”
권갑을 두른 그의 주먹이 수십 개의 음영 사이를 뚫고 들어왔다. 운선의 코앞까지 당도하는 동안 현란한 그림자만 보았을 뿐, 정작 실체는 피부에 닿기 전까지 알 수 없었다. 괜히 요리조리 피했다가는 얼굴이 뭉개질 게 뻔했다.
어차피 보이는 모든 것이 허수임을 깨달은 운선은 오히려 눈을 감았다. 왼손 손바닥을 하늘이 보이게 돌리고, 그 위에 오른손을 포개서 배꼽 근처로 내렸다. 각각의 약지를 구부려 엄지에 닿게 하니, 상생하품(上生下品)의 아미타 수인(阿彌他手印)이 되었다.
그 수인을 따라 단전에 뭉근하게 모인 기운이 서서히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태을신공이 완공에 이르고 난 후에는 더 이상 내력이 번잡하게 굴지 않았다. 지금처럼 작은 흥분까지 가라앉히고 나면 마치 무공을 배운 적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 온몸이 고요해지는 것이었다.
“무슨 개수작이냐?”
피하기는커녕 미동도 없는 운선의 모습에 용가현은 약이 바짝 올랐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느닷없이 수인을 맺고 명상에 빠지다니 자신을 얕잡아 본 것이 분명했다. 흥분을 참지 못하고 다른 한쪽 주먹까지 뻗쳐 내더니 그 안에 내력의 팔 할을 쏟아부었다. 어깨부터 타고 내려온 핏줄은 당장이라도 터질 듯이 울퉁불퉁하게 꿈틀거렸다.
“소강(小康)”
운선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왼쪽 발로 바닥을 가볍게 차올랐다. 그의 몸이 가랑잎처럼 둥실 떠오르는가 싶더니 거의 한 장 밖까지 주르륵 밀려났다. 그 탓에 상체를 한참 내밀었던 용가현의 중심이 흔들렸다.
“어딜!”
크게 벌어진 공간 사이에서 용가현의 몸이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팔을 감싸고 있던 꽃잎은 더 큰 소용돌이가 되어 몸 전체를 휘감았다. 이번에는 주먹이 아니었다. 몸이 하나의 주먹이 되어 운선의 동선을 따라 날아갔다. 목숨을 잃을 각오로 덤빈 필살기였다.
“곡우(穀雨)”
수인을 푼 운선의 두 손이 날아오는 적을 향했다.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는 평범한 주먹이었다. 그러나 네 개의 주먹이 맞부딪친 순간, 그 사이에서 거센 불꽃이 파바박 튀었다.
“욱!”
용가현의 몸이 반탄력을 받아 뒤로 한 바퀴를 돌았다. 바닥에 널브러지지는 않았으나 기혈이 뒤틀렸는지 선홍색 피를 울컥 뱉어내었다. 얼굴에는 짙은 낭패감이 가득했다.
‘초식이 보이지도 않았다. 겨우 수 합을 부딪쳤을 뿐인데 승패가 보이는구나.’
이미 강운선의 실력은 그를 훨씬 뛰어넘었다. 이대로 계속한다면 필패였다. 죽은 아우들이 모두 돌아와 함께 상대해도 승리를 자신할 수 없었다.
“용문주님, 당신과는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운선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상대는 묵안 조상원을 살해한 이였으나 복수할 마음은 없었다. 그는 아우들의 죽음이라는 벌을 이미 받은 뒤였다. 평생 외로움과 죄책감으로 살아갈 그에게 더 큰 벌은 없을 테니까.
“웃기지 마라. 감히 자만하지 마라.”
용가현은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비겁하지도 않았다. 권갑을 낀 오른쪽 주먹을 스르르 풀어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상원에게 잘린 손가락 세 개가 있던 자리로 바람이 숭숭 빠져나갔다. 이곳이 그의 마지막 자리인 듯싶었다.
“아무 미련이 없다.”
두 팔을 교차하여 하늘로 뻗은 후, 다시 가슴으로 잡아당겼다. 소요공(逍遙功)의 심오한 내공이 팔 쪽으로 이동했다. 다리는 사방으로 움직여 열십(十)자를 만들고 팔을 허리춤으로 가져가며 주먹을 그러쥐었다. 바닥에 잔잔하게 흩날리던 꽃잎이 서서히 회오리 안으로 빨려들었다.
“의융(義融)”
소요공(逍遙功)의 초식을 바라보는 운선의 눈이 반짝거렸다. 화려한 동작 속에서도 확연히 드러나는 특징이 있었다.
‘태을신공과 상당히 유사하다. 용문파의 뿌리가 려국이라는 말이 허언이 아니었구나.’
마음 같아서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겨루어 소요공(逍遙功)의 모든 초식을 보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진심으로 싸움을 대하는 자를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운선은 작은 한숨을 몰아쉬더니 수월을 꺼내 들었다. 빠르고 간결한 초식으로 그의 고통을 덜어줄 생각이었다.
“부풍(扶風)”
수월은 어지럽게 쏟아지는 주먹을 요리조리 피해 나아갔다. 그와 동시에 합곡(合谷)부터 수삼리(手三里)에 이르는 혈을 툭툭 누르며 움직였다. 수월은 순식간에 양팔을 휘감아 돌며 여덟 군데의 혈 자리를 점령했다. 한 바퀴를 돌고 다시 운선의 등 뒤로 돌아왔을 때, 용가현의 팔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이놈!”
팔을 접을 수 없게 된 용가현이 수치심에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차라리 찌르고 말지, 이 많은 강호인 앞에서 진정한 개망신이었다. 결국, 견딜 수 없었던 그는 울퉁불퉁한 바위 쪽으로 몸을 날렸다. 머리통을 꽉 들이박고 죽을 작정이었다.
“문주님!”
뒤늦게 눈치챈 서용이 용감하게 뛰쳐나왔다. 수많은 시체 다리를 건너서 몸을 날렸다.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장문인을 이리 허망하게 잃을 수는 없었다. 자신의 목숨과 바꾸는 한이 있더라도 살려야 했다.
퍽!
“어어?”
그러나 서용의 느려터진 몸이 거기까지 닿을 리 만무했다. 그 역할은 운선의 몫이었다. 용가현의 무거운 머리와 바위 사이에는 운선의 오른손이 있었다. 어찌나 무서운 속도로 돌진했는지 최선을 다해 막았으나 손등을 부딪치는 일을 피할 수는 없었다. 운선은 살갗이 벗겨져 온통 빨간 오른손을 손수건으로 대충 묶으며 말했다.
“용문주님, 묵안 선배님의 숙원을 이뤄주십시오. 이 치욕을 견디고, 부디 살아남으셔서 용문파를 지켜내십시오.”
그리고는 절규하는 용가현의 전중혈을 지그시 눌렀다. 덕분에 긴장이 완전히 풀어진 그는 그대로 혼절하였다.
“도사님.”
운선이 멀뚱멀뚱 선, 서용을 돌아보았다. 그의 총명함이, 사문에 대한 충성심이 퍽 기특했다. 적어도 이 도사와는 악연을 맺고 싶지 않았다.
“당신을 이용하여 두타산으로 유인했습니다. 미안합니다. 나중에 만날 일이 있거든, 제대로 사과하겠습니다.”
“어…어…….”
입만 벙긋거리는 서용을 두고 운선은 몸을 휙 날렸다. 그 모습이 마치 욕망을 초월한 신선 같아서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가 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비켜라! 머저리 같은 게!”
서용의 뒤통수 쪽에서 거센 바람이 불어닥쳤다. 앞에 누가 있든 말든 장풍을 출수하는 비열한 이는 고유생이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에서도 유독 퉁퉁 부어오른 코가 시뻘겠다.
“진품인지 가품인지도 모를 종이 쪼가리를 던져놓고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려 하다니!”
운선이 이미 등을 돌린 뒤에 날린 그의 일격은 악랄하기 그지없었다. 도무지 명문정파라고는 볼 수 없는 비겁한 수였다. 서용은 그와 같은 정파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웠다.
휘익!
고유생의 검 끝이 등에 닿는다 싶었을 때, 운선은 허리를 뒤로 확 젖혔다. 거의 바닥에 닿을 듯한 몸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가느다란 수월의 검날이었다. 부러질 듯 휘어진 수월은 두어 번 울렁울렁 움직이더니 주인의 몸을 가볍게 튕겨냈다. 그와 동시에 운선의 오른손에서 주먹이 뻗어 나왔다.
“우수(雨水)”
서늘한 바람이 안면으로 불어닥치자 고유생은 기다린 것처럼 스무 걸음 뒤로 몸을 쭉 뺐다. 그의 목적은 운선이 아니었다. 오직 장은에게 시간을 벌어줄 목적이었기에 굳이 근접전을 벌일 이유가 없었다.
“흥, 어디 내 손바닥 안에서 벗어나 봐라.”
잠깐 사이에 무려 십여 합을 겨루었다. 고유생을 이기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물귀신처럼 물고 늘어지니 쉬이 떨쳐낼 수 없었다. 그때,
“유영(劉永)”
또 하나의 유려한 검이 가느다란 물결을 그리며 두 사람 사이를 뚫고 들어왔다. 월심을 쥔 주운이었다.
“어랏! 이 건방진 년이 살아있었구나.”
“네, 그러니 당신의 상대는 접니다.”
채찍 같은 월심의 검신이 묵직한 고유생의 검을 꽁꽁 묶어버렸다. 과거 황석산에서 이무영이 시연했던 그 초식이었다. 이제는 스승보다도 완벽하게 구현하는 걸 보니 일취월장한 이는 운선만이 아닌 것 같았다.
“부풍(扶風)”
운선의 초식과 같지만, 또한 완전히 달랐다. 산들거리는 주운의 몸짓이 곱절로 빨라지더니 고유생의 주변에 수십 개의 인영이 생겼다. 그리고는 뾰족한 검 끝이 허리의 명문과 그 양쪽의 삼초유(三焦兪)를 찔러 들어왔다.
“우웩!”
고유생은 극심한 통증을 느끼는 동시에 구역질을 견딜 수 없었다. 울컥 올라온 가래를 뱉어내자 이번에는 땅바닥을 구를 정도로 배가 아팠다.
“내 오늘 기필코 네년을 죽여주마.”
그가 검을 고쳐 잡자 주운도 다시 자세를 갖춰 다음 초식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 정신없는 사이에도 운선을 돌아보는 것만큼은 잊지 않았다.
“운선아, 가라.”
월심을 가볍게 휘두르자 주운의 하얀 소매 끝이 덜렁 썰려 나갔다. 하늘하늘한 옷자락은 주저 없이 운선의 손바닥 위로 안착했다.
“우리의 인연은 끝났다. 자유롭게 날아가렴.”
이미 오래전에 정해진 이별이었다. 주운의 쓸쓸한 미소를 뒤로하고, 운선은 모질게 몸을 돌렸다. 날아갈 듯 사라지는 그의 모습은 한 마리의 외로운 나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