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완전한 추격대가 모여 출발한 것은 오시(午時)가 다 되었을 때였다. 여태 무리를 이끌던 한철은 장은이 나타나자 자연스럽게 뒤로 빠졌다. 평상시에 그라면 자못 비위가 상했겠지만, 오늘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얼씨구나 싶어 제자 몇을 이끌고 무리의 끝쪽으로 섞여들었다. 뒤에 서서 관망하다가 기회를 잡을 작정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우리의 목표는 검귀 성곤입니다. 그다음은 강운선이지요. 이 두 사람만은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됩니다.”
결연한 태도의 장은을 바라보는 오대산검 및 제 문파 제자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저마다의 욕망을 감춘 채, 눈 앞에 펼쳐진 격전의 장소를 노려보았다. 오늘의 결과에 따라 앞날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끼이익!
모래 먼지와 함께 골조만 남은 현문이 열렸다. 강가장은 십 년 전의 참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무너진 대들보와 부서진 현판은 먼지와 거미줄 때문에 제 모습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나마 강가장임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흐드러지게 핀 매화나무뿐이었다.
벌써 남쪽 지방은 봄이 한참이건만, 화악산은 겨울이 채 물러가지 않았다. 덕분에 매화나무는 뒤늦게 화려한 외모를 뽐내고 있었다. 마치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안다는 듯 붉은 꽃잎을 이리저리 흩날렸다. 웃음기 하나 없는 무림인들을 달래기라도 하듯 머리와 어깨에 하나둘 안착했다.
“드디어 오셨군.”
차분한 목소리의 출처는 대청 지붕 위였다. 묶지도 않은 검은 머리를 휘날리며 운선이 앉아 있었다. 무심히 올려다본 장은은 그의 담담하고 냉정한 얼굴에 흠칫 놀랐다. 불과 며칠 만에 인상이 완전히 달라진 것 같았다.
‘어째서 혼자인 건가?’
의아함을 느낀 이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용가현 역시 예상치 못한 상황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눈을 씻고 두리번거려도 검귀의 모습은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아우들을 죽인 복수를 누구에게 해야 하는가?
“검귀 성곤! 나와서 순순히 항복해라!”
초조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용가현이 무리의 앞으로 튀어나왔다. 거친 목소리로 도발하는 그의 모습은 비장하기 그지없었다.
“이곳은 검신 강율천의 집이거늘, 뜬금없이 누구를 찾는 것인가?”
“네 이놈!”
한껏 비아냥거리는 강운선의 말투는 그곳에 있는 고수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고작 마교의 애송이 주제에 건방지게 날뛰는 양이 꼴사나웠다.
“장문주, 뭘 망설이시오? 일단 저놈을 잡고 봅시다.”
용가현의 다그침에도 장은은 선뜻 나서지 않았다. 다만 팔짱을 낀 채로 상대의 속셈을 가늠해 보는 것이었다.
‘우리가 온다는 사실을 눈치챘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도 나머지 신교도들은 다 어디 갔는가? 진짜 비밀 통로라도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강운선의 무리한 행동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앞에서 소란을 크게 피운다면 필시 시선을 뺏을 수 있을 테니까.
“사숙, 용문주와 함께 저놈이 쉬이 빠져나갈 수 없도록 지키십시오. 그사이에 저는 뒷길로 돌아 퇴로를 차단하겠습니다.”
“알았다.”
장은이 슬며시 몸을 빼자 고유생이 부러 크게 소리를 질렀다.
“강운선! 오늘이야말로 패륜(悖倫)을 저지른 대가를 치러라!”
자극적인 발언이 이어지자 다소 주춤거리던 이들도 용기를 내었다. 마당 안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분노는 뱉어낼수록 짙어지는 법, 격렬한 비난과 고성이 오고 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이 신교에 대한 분노인지, 경전에 대한 욕심인지 그들조차 알 수 없었다.
“제 죄가 패륜이 맞습니까?”
낭랑하고 차분한 운선의 목소리가 소음 속을 뚫고 또렷하게 들렸다. 누가 봐도 열세였으나 조금도 주눅이 든 기색이 없었다. 형형한 눈빛에서는 위엄마저 느껴졌다.
“참으로 건방지구나.”
푸른 도포를 떨치고 나온 고유생은 예의 그 허연 수염을 바들바들 떨며 운선을 향해 삿대질했다. 비록 그로 인해 코뼈가 무너졌지만, 자존심만은 굽힐 수 없었다.
“너는 네 스승의 의형인 현로 선생(賢露先生) 조양을 죽였다. 이보다 큰 죄가 어디 있느냐?”
“맞소!”
“짐승만도 못한!”
고유생의 일갈에 이어 군중들의 동의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그러나 잔뜩 흥분한 그들을 바라보는 운선의 표정에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다시 묻겠습니다. 당신들이 원하는 것은 저의 죽음입니까? 아니면,”
운선은 가슴팍에서 손바닥만 한 책을 꺼내 들었다. 모두가 그토록 염원하던 전설 속 비급의 실물이었다. 떠들썩하던 장내가 일순간에 조용해졌다.
“이 경전입니까?”
왼손으로 머리를 쓸어올리자 이마에서 관자놀이까지 긴 자상이 보였다. 목숨을 건 일전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운선의 상처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직 그의 손에 들린 경전에 시선이 꽂혀 있을 뿐.
“둘 다!”
여태 잠자코 지켜보고만 있던 백형진이 무리를 헤치고 나섰다. 그는 자신이 등장해야 할 때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그의 역할이 필요했다. 사랑하는 스승을 잃은 슬픔을 드러내어 운선을 향한 분노로 바꿀 생각이었다.
“먼저 강호의 노 선배님들 앞에서 이리 나서게 된 점 사죄드립니다.”
그는 두 손을 모아 고개를 숙이며 사방에 서 있는 무림인들에게 공손하게 읍(揖)하였다. 눈치 빠른 고유생이 황석파의 무리로 들어갔다. 자신의 소임은 충분히 마쳤으니 나름 만족스러웠다.
“저는 두타산에서 온 형진이라 합니다. 강호에서는 백의행(白義行)이라고 불리기도 하지요.”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웅성거리던 무림인들은 소개를 듣자마자 모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강호에서 검을 쓰는 이라면 백의행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심지어 그는 이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조양의 제자이기도 했다.
“스승을 잃은 슬픔을 무엇으로 보상받겠습니까? 다만 그를 처벌할 수 있다면 나중에 스승님을 만났을 때 면목이라도 서지 않을까 싶습니다.”
“맞소!”
또다시 군중들이 세찬 동의를 표했다. 물론 조양의 죽음이나 백형진의 슬픔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운선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만 있다면 어떤 비난도 쏟아부을 수 있었다.
“저는 이뿐입니다. 허나 강호를 피바다로 만든 죄는 용서받지 못할 터, 그 원흉인 저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를 파기해야 할 것입니다.”
백의행의 말이 끝나자 장내는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이것이 그들이 모인 진짜 이유였다. 저 앞에서 눈썹을 꿈틀거리며 비웃고 있는 강운선을 절대 고수로 만든 저 책. 지난 십여 년간 강호의 크고 작은 문파 중에 저것을 노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그 위대한 심결을 접할 유일한 기회였다.
“참으로 우습구나!”
운선은 한참 동안 고개를 젖히며 크게 웃었다. 붉은 매화꽃 아래 서 있는 그의 모습이 악귀라도 된 것 같았다.
“형진아, 형진아, 네 스승에게 정녕 부끄럽지 않으냐?”
웃음을 그친 운선은 들고 있던 검을 왼손으로 옮겨 잡았다. 운선의 비검 ‘수월(水月)’이었다. 순식간에 모든 무인이 자신들의 병장기를 있는 힘껏 그러쥐었다. 수월을 든 운선을 홀로 막을 수 있는 이는 이 자리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었다.
형진 역시 긴장하여 몸을 움찔하였으나 짐짓 아닌 척 여유를 부리며 미소를 지었다.
“운선, 우리는 한때 형제와 같지 않았는가? 사형의 체면을 생각하여 더는 죄를 짓지 말고 결과에 승복하게.”
“결과?”
순간 매화꽃 잎이 조금 더 흔들리는 것 같았다. 운선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측근에 서 있던 오대산검의 기수(旗手)들은 모두 엄청난 한기를 느꼈다. 그의 그림자를 쫓아 시선을 옮기자 운선의 손아귀에는 이미 형진의 목덜미가 잡혀 있었다.
“강운선!”
형진은 소리를 내질렀으나 목덜미를 찌르고 들어오는 운선의 손톱 때문에 그 이상은 저항할 수 없었다.
“이것이 결과 아닌가? 너와 나의 차이가 이런 것이다.”
운선은 왼손에 든 검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오대산검 장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가리켰다. 참으로 역겨운 군상들이 아닌가? 욕망을 감추고 정의로운 협객의 가면을 쓴 이들의 뻔뻔한 면상이 그의 뇌리에 하나하나 들어박혔다.
“인제 그만하십시오.”
그때 가늘고 차분한 여인의 목소리가 마당에 가득 울렸다. 무림인들은 고개를 휘두르며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으나 딱히 보이지는 않았다. 전음만 들어도 내로라하는 고수임이 분명한데 도통 정체를 알 수 없었다.
“해심밀(解深密)을 내어주면 그뿐 아닙니까?”
“주운…….”
목소리를 단번에 알아들은 운선이 나직하게 그녀의 이름을 뱉었다. 금세 먹먹하고 슬픈 감정이 가득 들어찼으나 꾹꾹 눌러 참았다. 그에게는 이제부터가 진정한 난관이었다.
‘마치 철천지원수를 대하듯 표독스러워야 한다. 모진 말로 상처를 주어야 한다.’
머릿속으로 수없이 주문을 되뇌며, 어느새 근저까지 다가온 주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매정하고 서늘한 눈매는 그녀를 위한 최선의 배려였다.
“운선, 그만 놓아주어라.”
주운은 형진의 목을 꽉 움켜쥐고 있는 그의 오른손을 가볍게 잡았다. 비웃음으로 가득했던 운선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당신도 결국 이들과 똑같습니다.”
단어 하나하나를 씹어 내뱉는 운선의 목소리에는 가느다란 떨림이 있었다. 주운은 막막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 깊은 오해의 골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안타깝게도 당장은 방법이 없었다. 우선 그를 이 적개심 가득한 소굴에서 구해내야 했다.
“네가 바라는 것이 복수라면 내가 하겠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주운을 바라보는 운선의 눈에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그는 모진 거짓말을 뱉어낼 예정이었다. 정인의 마음에 어떤 상처를 낼지 뻔히 알면서도, 평생 용서받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복수 말입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당신부터 죽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뻔뻔하게 나를 기만한 당신이 아닙니까?”
“운선아, 나는…….”
주운의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 절절하고 애틋한 눈빛에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입니다.”
“제발…….”
운선은 일부러 오른손에서 힘을 쑥 빼버렸다. 그리고 예상대로 형진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턱을 당겨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자마자 운지행을 사용하니 순식간에 두 치 정도 거리가 벌어졌다. 곧이어 오른손으로 장력을 모아 운선을 향해 방출하였다. 아무리 고수일지라도 그 정도 거리의 일장은 치명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비켜라!”
이 와중에도 주운의 목적은 언제나 정인을 지키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향해있는 운선의 얼굴을 힘껏 때려 중심을 흔들리게 한 후 왼발로 그의 무릎을 쳐냈다. 불시에 일어난 일에 대비할 수 없었던 운선은 무릎에 타격을 느낌과 동시에 운지행(雲地行)의 방법으로 세 걸음 물러섰다. 그 순간 형진의 일장이 두 사람의 사이로 흘러나갔다.
“오오.”
장내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탄성을 내질렀다. 운지행은 일류 고수도 해내기 어렵다는 두타공파의 내전 무공으로, 실제로 눈앞에서 볼 일이 흔치 않았다. 그런데 단 몇 초식 동안 두 번의 실연을 보고 나니 그 빠르고 화려한 기술에 감탄이 아니 나올 수 없었다.
“암습을 하다니 비겁하지 않습니까?”
주운이 그를 노려보며 일갈하자 형진은 가소롭다는 듯 혀를 차며 부채질을 했다.
“사저가 끼어들 일이 아닙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칼춤이나 한번 춥시다.”
운선은 크게 헛웃음을 치더니 순식간에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어찌나 동작이 가볍던지 그가 건드리고 지나간 얇은 매화 가지조차 움직임이 없었다.
‘설마’
운선을 바라보는 주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뻔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그의 다음 행동을 막아야만 했다.
“안 돼!”
주운은 몸을 날려 운선이 있는 매화나무 아래까지 한달음에 다가갔다. 경공만큼은 그녀가 운선보다 뛰어났음으로, 훨씬 빠른 속도로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나 예상이라도 한 듯 운선은 그녀가 도착하기도 전에 나무 위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경전은 이미 수 갈래로 찢어져 있었다.
“그대들이 원하는 절세 비급이 여기 있소!”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와 함께 낱장으로 찢어진 종이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장내에 있는 사람들은 차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각도 하지 못한 채 멀뚱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