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126화 (126/209)

126화. 權謀術數(권모술수)

가은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운선의 낯빛이 대번에 밝아졌다. 영영 잃어버린 줄 알았던 열쇠를 찾게 되었으니 기쁠 만도 하였다.

“그럼 조카님께 마지막 열쇠를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혹 위험해질까 걱정입니다.”

운선은 눈썹을 축 내리고 걱정 어린 표정으로 질녀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너무 진심이라 가은은 살짝 죄책감까지 느낄 정도였다.

“워낙 미미한 존재라 제 행동에 관심을 두는 이가 없습니다. 혹여 들키더라도 시치미를 떼면 그만이지요. 다만,”

가은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구슬을 어루만지며 뜸을 들였다. 어떻게 하면 순수한 의도로 받아들여질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숙부님은 지금 쫓기는 중이잖아요. 태봉까지의 길은 험난하고요. 차라리 제가 열쇠를 다 보관하고 있으면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열쇠의 존재를 아는 이가 없으니 제가 구슬을 몇 개 가진다 한들 들킬 염려도 없고요.”

운선은 내내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심사숙고하는 모습에서 일말의 희망을 느낀 가은은 자신이 아는 한 가장 그럴싸한 말들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그러나 결론은 실망스러웠다.

“일리 있는 말입니다. 허나, 안타깝게도 열쇠의 존재를 아는 이가 있습니다. 백형진이 그중 한 명이고요. 모든 열쇠를 혼자 가지고 있다가 위험에 처할 수 있어요. 지금처럼 나눴다가 마지막 열쇠를 찾거든 함께 그곳으로 가는 것이 좋겠어요.”

“네, 그렇군요. 역시 숙부님은 현명하셔요.”

가은은 부러 호들갑스럽게 맞장구를 쳤지만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추격대가 제때 온다면야 강운선을 사로잡는 건 쉬운 일. 풍림이 거의 회복 단계에 이르렀으니 분명 훔쳐 올 방도가 있을 것이다.’

지금 의심을 사서 좋을 게 없었다. 어차피 태을신교의 운명은 이곳에서 끝날 터였다. 그때까지 신뢰를 잘 쌓아두어 정보를 많이 얻어내는 것이 훨씬 이득이었다.

“그런데 숙부님, 언제 태봉으로 떠날 예정입니까?”

“글쎄요. 제가 돌아오고도 벌써 사흘이나 지났군요. 부상자의 회복 속도를 고려한다면 하루, 이틀 사이에는 출발할 수 있겠지요.”

운선과의 면담을 마친 가은은 꽤 만족스러웠다. 사흘 전에 양쪽으로 날린 전서구는 이미 도착했을 테고 거리상, 이틀이면 추격대가 앞뒤로 강가장을 포위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자, 이제 저 미련퉁이 숙맥만 깨어나면 되겠구나.’

오늘은 더 약효가 강한 해독제를 쓰리라 마음먹었다. 원래 해독할 때는 내장이 상하지 않도록 약을 약하게 써야 하지만 배움이 짧은 그녀가 알 리 없었다. 아니, 알았다 한들 계획을 바꾸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직 태을신교를 무너뜨리고 강운선을 사로잡아 비밀의 그곳을 독식할 꿈에 부풀어 있을 뿐이었다.

사뿐사뿐 걸어가는 가은을 바라보며 운선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영악하기 그지없으나 참으로 어리석은 아이였다. 자기 속내를 다 들킨 줄도 모르고 머리를 굴리는 모습이 퍽 안쓰러웠다.

“오라버니, 저 아이를 어찌 보나요?”

“진건 사형의 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구나. 하긴, 어미 쪽을 많이 닮았으니 가능하려나?”

남몰래 둘의 대화를 엿듣던 윤설 역시 마음이 착잡했다. 친모를 잃었다는 슬픔보다는 옹주의 핏줄이라는 기쁨에 달뜬 양이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진건이 아비라는 사실을 안 알려준 게 참으로 다행이다 싶었다.

“저 아이에게 열쇠를 맡겨도 될까요? 지금이라도 가져오는 게 낫지 않겠어요?”

“아니, 저걸 가지고 있어야 마지막 열쇠를 찾아올 거야. 또한, 절대 다른 사람에게 주거나 뺏길 걱정도 없다. 꾀가 많은 아이다.”

그리고 욕심도 많았다. 숙부님이라고 꼬박꼬박 호칭하면서도 열쇠든 보물이든 나눠 가질 생각은 꿈에도 없어 보였다. 만약 힘으로 열쇠를 빼앗았다면 결코 마지막 열쇠 이야기는 숨겼을 것이었다.

“내가 어리숙하게 행동하니 자신의 패를 보여준 거다. 절대로 허투루 볼 아이가 아니다. 그나저나 풍림의 중독 상태는 어떠하냐?”

“제가 몰래 가서 해독을 늦추고 있어요. 근데 얼마나 독한 약을 쓰는지 양명장이 많이 상했더라고요. 대신 내일 낮쯤에는 의식을 찾을 것 같아요. 더 재워두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목숨이 위험할 듯싶어 내키지 않아요.”

설이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명색이 의원으로서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는 운선은 더는 토를 달지 않고 설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내일 낮이면 시간은 충분하다. 그럼 계획대로 당장 움직이자꾸나. 지도를 잘 숙지했지? 고된 며칠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이 최선이란다. 적사형이 의식을 차릴 때까지만 버텨도 우리에게 살길이 열릴 테니 조금만 고생하렴.”

“오라버니.”

설이가 걱정하는 대상은 오직 운선이었다. 그러나 그 마음조차 부담일까 봐 차마 드러내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저 무사하기만을 기원하는 일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누구보다 많이 힘들 텐데, 잘 버텨주었다.”

“오라버니.”

운선은 끝내 눈물을 터뜨린 설이를 꼭 안아주었다. 가족을 잃은 슬픔을 위로할 수 있는 말은 세상에 없었다. 그러나 매번 아픔을 함께 견뎌왔기에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두 사람이었다.

“오라버니, 할아버지를 미워하지 말아요.”

운선의 품 안에서 설이가 울먹였다. 그 말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므로 운선 역시 울컥 슬픔이 올라왔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것을, 미움도 원망도 없다.”

다가오는 봄을 시기하는 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쳤다. 내일은 아마 모두에게 고된 하루가 될 것이었다. 떠나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인사를 끝내고 싶지 않았다.

이른 새벽, 추격대의 선발조가 먼저 산어귀에 도착했다. 무리의 책임자는 여전히 한철이었으나 내내 고유생이 나서는 바람에 명령 체계가 엉망진창이었다. 졸지에 허수아비 수장이 되어버린 한철은 심통이 잔뜩 났다.

“이럴 거면 차라리 백의행 대협이 나서는 게 낫지 않은가?”

“그러게 말일세. 늙은이 고집만 아니었으면 여유 있게 도착했을걸. 이게 뭔가?”

툴툴거리는 설이곡의 말대로 선발 조는 나흘이 족히 걸리는 거리를 사흘이 되지 않아 도착한 터였다. 고유생은 전서구의 서신을 읽자마자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더니 바로 출발을 종용했다. 하물며 백형진마저도 아침에 움직이자 말렸으나 소용이 없었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솟은 그의 눈에는 그야말로 뵈는 게 없어 보였다.

‘강운선, 이 치욕을 반드시 갚는다.’

부러진 코뼈를 억지로 붙여놓았으나, 숨을 쉴 때마다 욱신욱신했다. 그러나 통증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무너진 자존심은 좀처럼 회복될 줄을 몰랐다. 강운선의 코뼈를 똑같이 뭉개놓아야 직성이 풀릴 듯싶었다.

“조맹주의 원수를 갚을 생각이라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나? 자네가 머뭇거리는 이유를 모르겠네.”

그가 본 운선의 마지막 모습은 주화입마에 빠지기 직전이었다. 빨리 뒤쫓아가 회복할 여유를 주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가장 서둘러야 할 백형진이 되레 뭉그적거리니, 여간 짜증이 나지 않았다.

‘음흉한 놈. 강운선과 대체 무슨 밀담을 주고받은 것인가? 저 검은 속내를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의심은 계속 의심을 낳았다. 누구도 쉬이 믿지 못하는 고유생이었기에 형진의 모든 행동이 수상쩍었다.

“전서구의 출처를 모르는데 믿을 수 있겠습니까? 강가장은 공간이 매우 협소하고 태봉과도 거리가 멉니다. 강운선이 굳이 길을 되돌아가 그리로 갔을까요?”

“흥, 어차피 우리는 그가 어딨는지 모르네. 밑져야 본전 아닌가? 또한, 선운검파 제자라고 밝혔으니 모험을 해볼밖에.”

“예, 그럼 그리하시지요.”

형진은 끝까지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딴에는 타당한 이유를 들었지만 기실 급조한 변명이었다. 애초에 운선을 보내주었을 때는 의도한 바가 있었다. 적어도 지금은 강운선을 잡을 생각이 없었다. 일부러 놓아둔 덫에 그림처럼 걸려들어 주었으니 제 역할을 다 한 후에 처리해도 늦지 않았다.

‘눈치 없는 늙은이 같으니. 쓸데없이 마음 약한 운선이 손속에 인정을 두는 바람에 목숨을 건진 주제에. 분수도 모르고 날뛰는 모습이 꼴값이구나. 조만간 짓밟아주마.’

겉으로는 세상 공손하게 고유생을 대하면서 뱀 같은 속내는 꽁꽁 감춰두었다. 목격자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목을 비틀어 버렸을 텐데, 그 점이 가장 아쉬웠다.

강가장이 있는 화악산에 다다랐을 때, 고유생은 한철을 불러들였다. 나름대로 수장으로서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함이었다. 일개 중소 문파의 문주가 감히 자신의 의견에 토를 달겠냐마는, 예의는 갖추어야 뒷말이 없을 터였다.

“후발대 역시 근처라 하니, 기다렸다 같이 올라가도록 하세. 아예 일망타진하여 신교의 뿌리를 뽑아버리지.”

한철이 추격대 전원에 명을 전달하자 모두 안도의 한숨을 뱉어내었다.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걸었으니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게다가 이른 새벽이라 배고픔과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각자 비상식량을 꺼내 요기를 하면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정말 이곳에 왔을까? 서신이 유인책일지도 모르지 않나?”

“그래도 가능성이 있다면 와보는 게 맞지. 진짜 여기에 있다면 태을신교는 끝이네.”

입을 삐죽거리는 설이곡과 달리 한철은 비장한 표정이었다. 만약 강운선을 잡는다면 그 이후에 어떻게 경전을 손에 넣을지에 대한 방법을 궁리 중이었다. 강운선이 조양을 죽였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부터 계속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모두가 검귀를 잡는 데 연연한다면 일이 쉬워진다. 조맹주와 격전을 치렀다면 강운선은 필시 부상을 입었을 터, 그를 잡아 비급을 빼내면 일거양득이 아닌가?’

비록 오대산검의 고수들만은 못해도 자신의 실력에 꽤 자부심이 있는 한철이었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점점 더 자신감이 차올랐다. 다만 걱정은 이 눈치 없는 지우(知友), 설이곡이었다. 분명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텐데 괜히 얽혔다가 기회를 뺏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뭔가 관심을 확 돌릴 만한 미끼가 필요했다.

그때, 한철의 시야에 저쪽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서성대는 서용의 모습이 들어왔다. 설이곡 역시 한철의 시선을 따라 그를 바라보았다.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였지만 그렇다고 딱히 시비를 걸만한 계기도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입맛만 쩝쩝 다셨다.

“그런데 말이야, 정말로 강가장에 있다면 저 도사 녀석 말이 맞는 게 아닌가?”

“그건 그렇구먼.”

“그럼 우리에게는 큰일이네.”

“응? 뭐가?”

한철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설이곡 쪽으로 바짝 당겨 앉았다. 그러고도 혹시 몰라 친우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의 의견을 몇 번을 무시했는가? 이번에 자신이 맞고 우리가 틀렸다는 사실을 알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걸세.”

“가만있지 않으면?”

“어쨌든 용문파 제자 아닌가? 우리가 한 짓에 대해 소문을 내기라도 하면?”

“헉, 그건 안될 말이지.”

설이곡은 섬찟하여 손으로 가슴 주변을 쓸어내렸다. 안 그래도 강운선이 두타산으로 가는 걸 놓친 터라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웬 소년의 귀신놀음 때문이었다는 게 밝혀진다면? 용문파의 의견에 반대하여 일을 크게 만들었다면? 조양의 죽음에 대한 책임에서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었다.

“우리 저 녀석을 처리하세.”

“어떻게 말인가?”

한철은 더 작은 소리로 한참 더 소곤거렸다. 얼마나 기가 막힌 생각인지, 이야기를 들을수록 설이곡의 인상이 점점 펴졌다.

“고것 참 묘수로구먼. 아주 기막히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은밀한 눈짓을 주고받았다. 이제 후발대만 도착한다면 모든 것이 완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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