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125화 (125/209)

125화. 捨小就大(사소취대)

장은이 직접 지휘하는 추격대의 후발 조에는 오대산검의 장문, 소소정과 용가현을 비롯하여 열두 개의 소문파의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모두 모였다. 그리고 그중에는 고대산파의 장문 고인경을 비롯한 스무 명가량의 제자들도 포함되었다.

용문파의 참극은 오대산검과 절연을 선언한 인경이라고 해도 도저히 모른 체할 수 없었다. 수세대에 걸쳐 형제의 의를 지켜온 오대산검이었다. 한낱 어린 장문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끊어낼 인연이 아니었다. 게다가 고대산파는 태을신교에 깊은 원한이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임을 인경 역시 모르지 않았다.

“고문주님, 자비롭게도 어려운 발걸음을 해주셨으니,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이번 일을 잘 마무리하여 다시금 형제의 인연을 돈독히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의 아우의 경솔한 행동은 추후 제대로 사죄드리겠습니다.”

장은은 세상 친절한 태도를 보이며 인경에게 말을 붙였다. 연배가 높은 그가 허리를 잔뜩 숙여 읍을 하자, 차마 퉁명스럽게 대할 수 없었다.

“장문주님, 지금은 사사로운 감정을 내세워 쓸데없이 힘을 낭비할 때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또한, 풍림 대협께서는 아직 생사도 알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하여 지난 일은 묻어두고 대의를 함께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저는 나이만 먹었지 통찰력은 고문주님의 발끝조차 따라가지 못할 겁니다.”

장은의 요란스러운 태도는 너무 가식적이라 오히려 불쾌했다. 그러나 그조차도 사사로운 감정이니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인경은 자신의 역할이 분란을 조장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잘 인지하고 있었다.

“용문파 용문주님은 아우들을 다 잃어서인지 산송장 같습니다. 뿐인가요? 선운검파 소문주님 역시 크게 다쳐 안색이 매우 나쁩니다. 장문주님도 아직 회복이 덜 되었다는데 과연 우리에게 승산이 있을까요?”

영준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강호의 유명한 문파가 다 모였다 해도 부상을 입은 고수들이 너무 많았다. 고대산파를 제외하고 오대산검 장문 모두가 크게 다쳤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태을신교의 피해도 크다 들었다. 무엇보다 이서문이 죽었으니 머리를 잃은 것과 다름없다. 너무 염려하지 말아라.”

“허나, 강운선이 있지 않습니까? 그의 무공이 반년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일취월장하였다 합니다.”

“강운선…….”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인경은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태을신교에 대한 분노는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지만, 운선에게는 전혀 다른 감정이었다.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의로운 사람이거늘.’

정파인들의 파렴치한 면면을 겪으면서 역겨움과 혐오감을 느껴왔다. 의와 협을 지껄이면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족속들. 그 사이에서 인경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번뇌했다. 진정한 협객은 강호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좌절감은 그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근원적 물음이 되었다. 그때 운선을 만났다. 대의를 따르나 사사로운 정에 흔들리고, 사파의 마두지만 정의로운 협객.

“그나저나 그를 만나면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몇 번이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인걸요.”

“글쎄.”

영준의 질문은 인경의 고민이기도 했다. 적어도 자신의 손으로 그를 위험에 빠뜨리지는 못할 것 같았다.

‘복수에 집중하자. 그에 대한 일은 그다음에 생각해보자.’

한편, 장은은 인경과는 전혀 다른 고민에 빠져 있었다. 어차피 독 안에 든 쥐와 같은 강운선에게는 관심도 없었다. 며칠 전 대면한 금황자의 퉁명스러운 태도가 내내 마음에 걸렸다.

‘비밀을 알아낸 것도, 태을신교를 거의 무너뜨린 일도 칭찬받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왜?’

장은의 보고를 듣는 와중에도 연신 하품을 하던 금황자는, 거래 조건에 대해 한마디로 일축했다.

“강 아무개 따위는 상관없습니다. 검귀 성곤의 목을 가져온 후에 마무리를 짓지요. 그게 어려우면 현로 선생이어도 좋고요. 가능하시겠습니까?”

살벌한 미소에는 상대에 대한 불신과 무시가 담겨 있었다. 장은은 인내심을 끌어올려 겨우 웃는 낯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도 수치스럽고 불쾌했다.

‘그런데 어째서 조양의 목숨을 언급했을까? 물론 그가 죽는다면 금황자에게는 큰 장애물을 치우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너무 갑작스럽지 않은가? 설마 나의 충성심이라도 떠보려는 것인가?’

어쨌든 추격대의 우선 목표는 성곤의 목이었다. 그 이후에 금황자의 진심이 무엇인지는 천천히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문주님, 전서구가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방향에서 온 두 개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나는 선발대에서 보낸 것이 분명했다. 사흘 차이를 두고 출발했으니 지금쯤 신교의 꼬리 정도는 잡았으리라 예측했다. 그런데 다른 하나라니?

의아한 표정으로 서신 두 개를 차례로 펼쳐 보았다. 첫 장을 읽고 나서부터 손을 부들부들 떨던 그는 다음 장으로 넘어가서는 아예 종이를 구겨버렸다. 갑작스러운 장은의 행동에 장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장문주, 이야기를 해보시오.”

결국,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용가현까지 나섰다. 그제야 장은은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좌중을 바라보았다. 붉어진 눈으로 울먹이는 그의 모습은 마치 나라를 잃은 백성 같았다.

“현로 선생님이, 조맹주님이 돌아가셨다 합니다.”

“뭐?”

“뭐라고?”

문파의 장문들 모두 충격에 휩싸였다. 부상의 정도가 심했다고는 하나, 목숨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 대단한 조양이 아니었던가? 그가 그리 쉽게 세상을 등지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장문주!”

“강운선이 두타산에 나타나 조맹주님을 살해했다 합니다. 사실 제가 불길한 마음이 들어 여러분 몰래 고사숙님께 부탁을 드렸습니다. 조맹주님을 지켜달라 말입니다. 사숙님께서 목숨을 걸고 싸웠으나 결국 맹주님을 구하지 못했다 합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고유생의 증언이 있으니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일순, 강호인들의 마음속에는 공포심이 가득 들어찼다. 강운선이 무려 두 명의 고수를 제압하고 조맹주의 목숨까지 빼앗았다니. 그의 폭주를 막을 이가 이 강호에 존재하기나 할까 싶었다.

“그 괴물은 지금 어디에 있다는 거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용가현이 다그쳤다. 두 동생을 잃고 멸문의 위기에 처한 그에게는 오직 두타공파와 조양의 도움만이 희망이었다. 그 실낱같은 희망의 끈마저 끊어진 지금, 남은 것은 강운선을 향한 분노밖에 없었다.

“추격대의 전언은 여기까집니다. 때마침 도착한 백의행 덕분에 강운선은 도망쳤다 합니다. 그런데,”

모두의 시선이 장은의 입술에 집중됐다. 얼마나 조용한지 침 삼키는 소리도 들릴 정도였다.

“놀라운 서신을 한 장 더 받았습니다. 선운검파의 제자라 밝힌 이가 신교의 위치를 알아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곳으로 강운선이 올 것이라는 소식도 전했습니다.”

“무슨? 우리 자매 중에 추격대에 속한 이가 없거늘.”

영인이 황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선운검파를 사칭한 누군가가 악의적으로 거짓 서신을 보낸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혹 그 아이가 가은입니까?”

영인의 어깨를 잡아 앉힌 이는 다름 아닌 소소정이었다. 심한 부상으로 얼굴이 해쓱했지만, 기개만큼은 여느 대장부 못지않았다.

“네, 그러합니다.”

“그럼 걸어볼 만하군요.”

“스승님!”

“소문주!”

모두가 소소정의 뜻밖의 반응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추격대가 놓친 신교를 무공도 변변치 못한 무명의 제자가 어찌 뒤쫓았단 말인가? 게다가 도망친 강운선까지 잡을 수 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저 또한 소문주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하여, 우리는 당장 방향을 틀어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그곳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니까요.”

“장문주! 그곳이 대체 어디길래 그리 확신하시오? 설마,”

두 장문의 발언에 문득 용가현도 짚이는 바가 있었다. 강운선이 두타공파에 나타났다면 거리상 충분히 신빙성이 있는 정보였다.

“네, 용문주님. 지금 떠올리신 그곳이 맞습니다. 바로 강가장입니다.”

추격대의 고수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이제 아무도 반대하는 이가 없었다.

그렇게 고대하던 운선과의 만남이었건만, 가은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의 눈을 보는 순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릇이 너무 크다.’

그것은 오래전 고대산파의 장문 고인경에게서 느꼈던 감정과 매우 유사했다. 친절하고 예의 바르지만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신념. 어떤 감언이설에도 의지를 꺾지 않는 고집. 운선은 그런 사람이었다.

“누이를 만났다 들었습니다. 그리고 누이의 하나밖에 없는 딸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운선은 바로 앞에 앉은 가은이 아닌, 저 멀리 산등성이를 바라보았다. 현진의 마지막 당부가 여전히 귓가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가씨 부부가 저의 양부모라는 사실은 알았으나 친모의 신분은 상상도 못 하였습니다. 하여, 어머니를 해하러 동굴에 들어갔지 뭐예요. 그날의 일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머리를 박고 죽고 싶어요.”

가은의 커다란 눈에서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안 그래도 가냘픈 몸이 바들바들 떨자, 안아주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만큼 안쓰러웠다. 그러나 운선의 얼굴에는 동정의 빛이 없었다.

“얼마나 충격이었을까요? 진실을 알았을 때는 쉬이 믿기지 않았을 겁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더구나 너무 큰 책임을 지워주었으니 홀로 감당하기 어려웠겠지요. 이해합니다.”

“숙부님께서 소녀의 마음을 헤아려주시니 감동이에요. 단언하건대, 려국인임을 알고 나서는 오히려 기뻤답니다. 저도 어머니의 뜻을 이어 려국인을 돕고 싶어요. 비밀의 그곳을 찾고 백성들에게 려국을 되찾아 주고 싶어요.”

운선은 결연한 태도로 두 주먹을 불끈 쥐는 가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련한 외모였으나 내면은 단단한 바위처럼 강인한 듯싶었다.

“그래 준다면 얼마나 큰 힘이 되겠습니까? 참으로 기특하고 고맙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 누구의 도움도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지요. 다행히 교주님과 적사형의 상태가 훨씬 좋아졌습니다. 그렇지만 사방에서 위협하는 오대산검의 추격대를 감당할 정도는 아니에요. 조카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답니다.”

“뭐든지요.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운선의 간곡한 부탁을 듣자마자 가은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바짝 다가앉았다. 그녀는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놓칠 바보가 아니었다.

“우리가 태봉까지 잘 도착한다고 해도 바로 그곳에 갈 수는 없어요. 그 이유는 잘 알죠?”

“열쇠 때문이군요.”

“맞아요.”

운선은 목에 걸린 끈을 꺼내어 가은에게 보여주었다. 네 개의 영롱한 구슬이 맞부딪혀 맑고 청아한 소리를 냈다. 윤이 나는 표면은 햇빛을 반사하여 반짝반짝 빛이 났다.

“조카님이 가진 두 개, 그리고 내가 가진 네 개. 그러나 열쇠는 일곱 개가 있어야 합니다. 완전한 열쇠가 없으면 결코 문을 열 수 없으니 그곳을 찾아간다 해도 소용이 없지요.”

운선은 땅이 꺼질 것처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수많은 노력을 해보았지만 도통 행방을 모르니 답답하다며 가슴을 두드렸다. 가은은 드디어 운선의 신뢰를 얻을 절호의 기회가 왔음을 깨달았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숙부님. 제가 찾아올 수 있답니다. 마지막 열쇠가 있는 장소를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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