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夢外之事(몽외지사)
이틀 동안 두타공파의 수오당(羞惡堂)은 눈물바다였다. 정암, 송암 장로의 주재 아래 장문의 약식 장례가 치러졌다. 때마침 도착한 추격대는 이 기가 막힌 상황에 할 말을 잃었다. 실제로 강운선이 두타산에 나타났다는 사실도 그랬지만, 그가 감히 조양을 해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렴 강호 제일의 고수인 현로 선생이 당하리라고 누가 예상했겠는가?”
“뿐인가? 그 자리에 황석파 부문주인 월산 노인까지 있었다지 않은가? 이제 저 괴물 같은 놈을 누가 감히 막을 수 있을까?”
한철과 설이곡은 내내 마음이 싱숭생숭하여 주절주절 떠들어댔다. 강운선의 뛰어난 실력에 감탄하는 동시에 그의 악랄한 심성에 치를 떨었다.
“무려 삼 년이 넘는 동안 자신을 보호해준 의백을 살해하다니, 실로 후안무치한 놈이 아닌가?”
“패륜이지. 패륜이야.”
그들은 십 년 전, 두타산에서 조맹주가 강운선을 감싸 안던 그 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태을신교의 간악한 흉계와 호시탐탐 경전을 노리는 정파의 고수들 사이에서 오직 그를 지킨 이는 조양 한 사람이었다.
“그게 려국인의 본성인 게지. 배은망덕하고 잔인무도한 놈들. 에잇, 퉤!”
“그나저나 백의행 대협은 참으로 서럽게 우는구먼. 워낙 사제의 정이 두터웠지 않나.”
“슬프기도 하거니와, 앞으로 두타공파를 이끌어가야 할 텐데 어깨가 무겁겠지.”
반면, 서용의 생각은 달랐다. 강운선은 위험을 무릅쓰고 두타산으로 왔다. 그렇다면 반드시 목적이 있었을 터, 교주 성곤의 생사가 달린 상황에서 굳이 조양을 죽이기 위해 여기까지 왔을까? 그의 신중한 지난 행보를 보았을 때, 영 이해가 가지 않았다.
‘두타산에 들어온 것은 누가 봐도 목숨을 건 행동이다. 아무래도 제 식구들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미끼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그가 조양을 죽이려 했다? 혹시나 기회가 생겼더라도 지금은 아니었겠지.’
무엇보다 서용은 지금 이곳에서 시간을 축내는 추격대의 수장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의 생각이 맞는다면 강운선의 다음 경로는 강가장이었다. 아니더라도 그를 추격할 기회는 지금 밖에 없었다. 조양과 고유생을 둘 다 상대했다면 필경 정상적인 몸 상태는 아닐 터, 회복하기 전에 사로잡아 끝을 보는 게 당연했다.
“한문주님, 추격대는 어찌 되는 겁니까?”
안 그래도 심란한데 서용이 다시금 나타나 들쑤시자, 한철은 짜증이 불끈 솟았다.
‘이 어린 도사가 좀 받아줬더니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구나.’
이참에 기를 팍 꺾어놓아야겠다는 생각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팔짱을 끼고 서서 노려보는 양이, 상대를 한껏 무시하는 태도였다.
“이보게, 서형제. 강운선은 아주 흉악하고 교활한 놈이야. 이미 도망칠 경로까지 모두 마련해 두었을 걸세. 어딘가 찾을 수 없는 곳에 몸을 숨겼을 거야. 샅샅이 뒤져봤자 소득이 없을 것이 자명한데 굳이 인력을 낭비할 필요가 있나? 오히려 섣불리 나대다가 아예 놓쳐버릴지도 모른단 말이지. 심지어 조맹주까지 해한 무시무시한 놈이 아닌가? 다행히 후발대가 출발했다는 전서구가 왔으니 장문주가 도착하기를 기다려 일망타진하는 것이 최선이네.”
“하지만 문주님, 후발대를 기다리다 놓친다면 낭패가 아닙니까? 지금 그는 부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만약 강운선이 어렵다면 시선을 돌려 성곤을 비롯한 신교의 잔당들을 쫓아야 합니다. 태봉으로 숨어들면 기회가 없습니다.”
“어허! 이 사람이!”
서용이 쉬이 물러나지 않자, 이번에는 설이곡까지 나섰다. 미간에 주름이 가득 잡힌 그는 여차하면 당장이라도 한 대 때릴 태세였다. 원래도 성질이 급하고 짜증이 많았으나 유독 이 도사 나부랭이가 거슬렸던 참이었다.
“오냐오냐 받아줬더니 건방지기가 하늘을 찌르는구나! 네가 오대산검의 도사면 다냐? 이게 선후배의 도리도 모르고 바락바락 대드니, 혼쭐이 나도 할 말이 없으렷다!”
“설문주님, 무슨 일이십니까?”
일촉즉발의 상황을 종료시킨 이는 다름 아닌 백형진이었다. 저 멀리서 이쪽을 예의 주시하던 중이라 곧바로 달려올 수 있었다. 이틀 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그는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전혀 내색하지 않고 온화하고 예의 바른 태도로 싸움을 중재했다.
“우리 후배님이 마음이 조급하여 실언하였으니,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주십시오. 선발대의 수고는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후발대가 이미 금당에 들어섰다 하니 조만간 일이 마무리될 것입니다. 하니, 다른 걱정은 마시고 몸을 회복하는 데에만 신경 쓰십시오.”
한철과 설이곡에게 양해를 구한 그는 서용을 한쪽으로 데리고 갔다. 흥분하여 바르르 떠는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상한 마음을 위로했다.
“서형제, 누구보다 열심인 것을 잘 압니다. 선배로서 그저 고맙고 뿌듯한 마음이지요. 당장 쫓지 않으면 영영 놓칠까 염려되는 게 당연하지요. 허나, 너무 심려 말아요. 어디로 이동했든 간에 멀리 가지 못했습니다.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 저는 그자를 잘 압니다. 교활한 자이니 섣불리 움직이다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어요. 확실히 어딨는지도 모르면서 인원을 나눠 수색하는 건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서용은 형진의 의견에 전혀 수긍하지 않았으나 입을 꾹 다문 채로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기실 그는 백형진을 불신했다. 용문파의 끔찍한 사건이 있던 날 밤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미안함도 죄책감도 없었던 뻔뻔한 그의 얼굴이 지금의 웃는 낯과 일시에 겹쳐 보였다. 장은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소인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자.
“장례를 치른 즉시 하산하여 운선을 쫓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우리에게 맡겨두어요. 그를 가장 잡고 싶은 사람은 누가 뭐래도 제가 아니겠습니까?”
형진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움푹 들어간 뺨이 더 안쓰럽게 보였다. 서용은 예의상 몇 마디 위로의 말만 남긴 후, 내당을 빠져나왔다. 그와 함께 마시는 공기조차 역겨울 지경이었다.
‘강운선은 필시 강가장으로 갔다. 그는 자신의 신도들을 버릴 사람이 아니다.’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서용은 문득 강운선을 너무 높이 평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사문을 멸문에 이르게 한 신교의 대마두인데 어째서 이런 묘한 경외심이 드는 것일까? 불경한 생각을 지우려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마음 한편에서 경망스러운 감정이 스멀스멀 올리오는 것이었다.
성곤의 병세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목숨만 겨우 붙어있을 뿐, 과연 먼 길을 이동할 수 있을지도 자신할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적우의 상태는 훨씬 긍정적이라는 것이었다. 정말 괴물 같은 회복력이 아닐 수 없었다.
“저는 이곳에 남아 할아버지를 보살펴야 하겠습니다. 적사형은 호전되었으니 지금이라도 먼저 떠나는 게 어떻겠어요?”
“어찌 너를 두고 간단 말이냐? 게다가…….”
진건의 흐린 말끝에는 가은에 대한 걱정이 묻어 있었다. 그 마음을 짐작한 설이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사저가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최선이었어요. 덕분에 열쇠를 가져다주었으니까요. 하긴, 완전히 거짓도 아니지요. 그 아이의 반은 려국인이니까요. 다만,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반은 경국인이고 또한 친모의 밑에 있으니 말이지요. 아무리 애틋해도 우리의 삶을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언감생심, 그런 꿈은 꾸지도 않는다. 어쩌면 현진의 딸로 알고 있는 쪽이 나을지도 모르지.”
진건의 말은 진심이었다. 자식을 버리고 철저히 외면했던 부모의 존재를 알리고 싶지 않았다. 주제에 맞지 않는 욕심을 부려 신교로 데려간다면, 가은의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길지도 몰랐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선운검파로 돌려보내는 게 나았다.
“일단 운선이 돌아오면 의논해 보자꾸나. 하여 적우는 먼저 보내고 나는 스승님과 여기 남는 게 좋겠다.”
“누가 남는지는 좀 더 고민해 보아요. 이제 오라버니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랄 밖에요.”
서늘한 바람이 동굴 천장의 작은 구멍들을 통해 들어왔다. 강가장은 지대가 높아 유달리 봄이 늦었다. 가뜩이나 춥고 습한 이곳에 언제까지 숨어 있을 수는 없었다. 운선이 떠난 지 오늘로 닷새째, 하루라도 빨리 그가 돌아와 결정을 내려주어야 했다.
퍼억
“쉬잇!”
그나마 바람이 드나들던 구멍 사이로 토사가 후두둑 떨어졌다. 설이는 혹시라도 다른 침입자가 있는가 싶어 주변의 횃불을 모두 불어 껐다. 진건이 함께 있었지만 지켜야 하는 부상자가 많은 만큼, 들키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누구죠?”
“글쎄.”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 기척이 없었다. 답답한 나머지 설이가 먼저 침묵을 깼지만, 그 후에도 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들짐승인가?”
“아마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두 사람은 다시금 불을 밝혔다. 굴의 안쪽 내실에 성곤과 적우가 있고 그 바깥을 두 사람이 지키고 있으니 침입자라면 들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잠을 못 자서 예민해진 모양이에요.”
설이는 며칠 만에 사형의 얼굴을 제대로 올려다보았다. 안 그래도 나이에 비해 들어 보이는 진건은 며칠 새에 폭삭 늙은 것 같았다. 백발이 성성했고 주름도 한층 깊어졌다. 어쩐지 그 원인이 부상 때문만은 아닌 듯하여 설이는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이제 어찌 되는 걸까요? 우리에게 희망이 있을까요?”
“글쎄다.”
진건 역시 처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서문의 죽음을 목도한 후, 지금껏 무얼 위해 살아왔는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하물며 마음에 묻었던 친딸을 만나게 되자 심장에 대못을 박아넣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운선이 있다. 그 아이라면 신교를, 려국을 이끌어갈 수 있을 거다.”
진건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제 형님과 동생들과 함께하던 한 계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운선과 설이, 그리고 찬영이 이끌어갈 계절이 시작되리라. 어쩌면 이들에게 과업을 계승하는 것이 그의 마지막 임무일지도 몰랐다.
“으아아아악!”
“이게 무슨?”
동굴을 진동하는 비명에 두 사람은 일시에 모든 동작을 멈췄다. 소리의 출처는 황당하게도 성곤이 누워있는 내실이었다.
‘침입자일까?’
설이는 잔뜩 긴장하면서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들 사이를 통과하지 않고는 절대로 내실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비명의 주인은 할아버지가 아니었다.
“여기 있어라. 내가 들어가 보마.”
그의 창 미타 대신 검을 든 진건이 내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한 걸음씩, 부러 소리를 죽이며 서서히 다가갔다. 침입자라면 이대로 퇴로를 막아 사로잡아야 했다. 좁은 밀실 안에서 격전을 벌이다가는 스승님이 다칠지도 몰랐다. 단숨에 적을 제압해야 승산이 있었다.
문 앞에 이르자 진건은 숨소리를 멈췄다. 여는 동시에 뛰쳐나가 상대를 사로잡을 생각이었다. 설이와 눈짓을 주고받은 직후에 문을 힘차게 밀어젖혔다.
끼이이익!
그러나 진건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믿기지 않아 그저 눈만 끔뻑끔뻑 감았다 뜰 뿐이었다. 그리고,
“할아버지!”
설이의 처절한 절규가 이어졌다. 작은 동굴 벽을 부딪쳐 수 갈래로 찢어진 메아리는 다시 귓속으로 되돌아와 머릿속을 울렸다.
“스승님.”
누구에게도 쉬이 굽히지 않던 진건의 무릎이 힘없이 꺾였다. 얼굴도 모르는 부모보다 더 부모와 같았던 스승이었다. 그가 말하는 대의가 뭔지 모르면서도 오직 그의 명이었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다. 유일한 정인과 친자식까지 내친 이유도 그를 실망하게 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진건의 부모이자 삶의 지향점이던 스승 성곤은 이제 그의 바로 앞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미안하구나.”
스스로 찌른 가슴의 상처 사이로 쉴 새 없이 핏물이 쏟아졌다. 그 모습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진건은 자신의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
“할아버지!”
성곤의 축 처진 몸을 붙들고 울부짖는 설이의 모습이 보였다. 설사 편작이 온다 해도 이미 뱉어낸 숨을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혹시나 설이라면 살릴지도 모른다는 허황한 생각을 해보는 것이었다.
“설아…….”
끊어질 듯 이어지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진건은 그곳에 다른 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성곤을 내려다보며 망연자실 서 있는 그는, 그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운선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