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122화 (122/209)

122화. 巧言令色(교언영색)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가은은 두렵지 않았다. 강운선을 만날 수 있을까? 아니라면 성곤이어도 좋았다. 여태 가난한 촌부의 자식인 줄 알았던 삶이 역전되는 순간이었다. 자신의 뿌리를 찾는 여정이었기에 마냥 설렜다.

“계세요?”

가냘픈 가은의 목소리가 긴장으로 파르르 떨렸다. 누구라도 만난다면 다행이겠지만 상대가 우호적으로 나오리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위협적인 침입자로 오해받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계세요?”

두어 번 더 기척을 내었을 때였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턱 밑으로 느껴졌다. 비릿한 피 냄새가 나는 걸 보니 강호를 꽤 휘젓고 다닌 병기가 분명했다.

“살려주세요. 저는 무공을 전혀 할 줄 몰라요. 그저 이야기를 전하러 왔어요.”

“…오대산검의 제자가 아니더냐?”

굵직하고 거친 사내의 음성에 가은은 흠칫 놀랐다. 급작스럽게 찾아온 공포심에 입술까지 달달 떨려왔다. 그러나 여기서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은률이 저 소년을 죽이고 뒤따라오기 전에 이야기를 끝내야 했다.

“저는 선운검파의 제자 가은이라고 합니다. 오대산검의 제자이긴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다른 이유로 왔어요. 믿어주세요.”

“누구? 누구라고?”

목 근처에서 바짝 조여오던 살기가 갑자기 흔적을 감췄다. 사내는 가은의 이름을 듣자마자 전의를 상실한 듯 팔을 쭉 늘어뜨렸다.

‘혹시 나를 아는 건가?’

심장이 팔딱팔딱 뛰다 못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이들은 이미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아무렴 옹주의 여식인데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설마 진짜 은이라고?”

이번에는 여인의 목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눈앞이 환해졌다.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가은이 주변을 인지하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어렴풋이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의 형체를 확인했을 때는 이미 자신의 얼굴은 노출된 다음이었다.

“운평 가씨 부부의 여식이 맞나요?”

설이는 한참 동안 가은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만나본 적은 없었으나, 이목구비에서 부모의 흔적을 찾으려는 노력이었다. 반면 진건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돌렸다. 제 손으로 버린 자식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분들을 아신다면 제가 제대로 찾아온 게 맞네요. 그래도 혹 의심이 된다면 이걸 보세요.”

가은은 목을 더듬더듬 짚어 가느다란 줄을 꺼내 들었다. 그 끝에 매달린 영롱한 빛의 구슬 두 개. 그것은 현진과 유이정의 것이 틀림없었다.

“현진 사저를 만났군요.”

가은이 설명하는 대강의 이야기를 들으며 윤설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사저의 죽음을 미처 슬퍼할 여유도 없었기에 새삼 죄책감이 밀려왔다. 다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가은을 통해 유언을 남겼다니 감격스럽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했다.

“처음엔 믿지 않았습니다. 십수 년을 운평 약초꾼의 딸로 살았으니까요. 그때 믿어드렸다면 허망하게 어머니를 잃지 않는 건데…….”

‘어머니?’

윤설은 가은의 이야기에서 엄청난 위화감을 느꼈지만 일단 내색하지 않았다. 다행히 진건은 눈치채지 못했는지 여전히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제가 려국인인 줄 알았다면 결코 선운검파에 입문하지 않았을 거예요. 사부님은 저에게 어머니를 죽이라고 시켰죠. 만약 어릴 때 얼핏 본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지 못했다면 제 손으로 직접 죽일 뻔하였습니다. 끔찍한 짓을…….”

가은은 그때의 일이 떠오르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현진을 죽이러 갔던 그 날은 내내 악몽이 되어 그녀를 괴롭혀왔다. 결과와 상관없이 그런 마음을 먹었다는 것만으로도 스스로가 혐오스러웠다.

“소소정…….”

그제야 진건은 뒤를 돌아 가은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히 충격적이었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인제 보니 단단히 오해가 있는 모양이었다.

“사형, 제가 정리할 테니 나서지 마세요. 절 믿으시죠?”

설이가 재빨리 진건의 손을 잡았다. 땀이 흥건한 손은 그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잘 보여주었다. 혼란에 빠진 진건은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진 사저가 직접 준 건가요?”

“네, 어머니라고 밝히셨으나 저는 쉬이 믿지 못했어요. 하여, 이 구슬을 보여주셨죠. 글자만 다를 뿐, 완전히 같은 모양이더군요. 비로소 제가 마음을 열자, 이 구슬이 그곳을 여는 열쇠라는 사실도 알려 주셨어요. 어머니는 숙부님을 찾아 열쇠를 건네라 하셨죠.”

“숙부라면…….”

“네, 강대협이요.”

“아아.”

윤설은 이제야 모든 상황이 정리되었다. 물론 현진의 숨은 의도까지는 알지 못했으나 거짓을 말한 이유는 대강 이해할 수 있었다. 죽음을 앞둔 그녀가 안전하게 열쇠를 전하는 방법으로 이것만큼 확실한 게 있었을까?

“지금 함께 온 이는 풍림 정은률이 아닌가요? 그는 태을신교에 원한이 깊은 자인데 같이 온 이유가 무엇인가요?”

“하아, 제 의도가 아니었어요. 정대협은 지난 토벌대 일에 실패한 후로 장문주의 눈 밖에 났으니 공을 세우고 싶어 해요. 사부님 몰래 숙부님의 흔적을 따라오던 중, 우연히 만났습니다. 저는 어리고 무공을 못 하잖아요. 미끼로 쓰면 되겠다며, 동행을 강요하더이다. 제가 감히 거절할 수 있었겠어요? 평소에는 말 한마디 붙이기 어려운 선배인걸요.”

의심이 많은 설이는 가은의 말을 믿지 않았다. 딱 봐도 이목구비가 야무지고 말이 번드르르 한 것이 신뢰를 주는 인상이 아니었다. 또한, 이야기의 앞뒤가 맞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독단적 행동을 선호하는 정은률이 도움이 전혀 되지 않는 소녀를 데리고 다닐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일단은 믿어주는 척하기로 마음먹었다. 진건의 핏줄이기도 하거니와 열쇠를 두 개나 가지고 있으니 당장은 호감도를 높이는 게 우선이었다. 기회를 보아 열쇠를 받아낸다면, 그 후에 어그러진 부분을 잘 어루만져주면 되리라 생각했다.

“어머니께서 숙부님께 유언을 남기셨어요. 저는 그 말씀을 전하러 왔을 뿐이에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저도 려국인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싶어요.”

“책임이라면?”

막상 이곳에 온 진짜 목적을 밝히려고 하니 새삼 긴장이 되었다. 가은은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설이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신체적 접촉이야말로 경계심을 무너뜨리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제가 누구인지 명확히 알고 싶어요. 그러니까 제 말은,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요.”

“아아…….”

설이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진건 쪽을 향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등을 돌리고 앉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모습에 설이의 마음도 덩달아 무거워졌다. 딸을 앞에 두고도 밝히지 못하는 마음이 어떨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건 차차 얘기하도록 해요.”

“그럼 한 가지만요. 그분 역시 려국인인가요?”

“네. 맞아요.”

“역시…….”

가은은 더는 몰아붙이지 않고 물러났다. 오히려 알려주지 않아서 더 좋았다. 어머니가 옹주라면 아버지의 신분 역시 쉬이 밝히기 어려울 터. 하여 가은의 가슴은 자신의 핏줄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찼다.

“이제 제가 뭘 도우면 될까요? 숙부님은 어디 계세요?”

초롱초롱한 눈망울은 한없이 해맑았다. 설이는 이 철없는 아이를 어찌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때,

“고모, 이 녀석 별거 아닌데요?”

“찬영아, 너…….”

혼절한 은률을 등에 멘 찬영이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저고리가 여기저기 찢겨 피투성이였으나 뭐가 그리 신나는지 얼굴이 싱글벙글했다.

“정대협!”

“어라? 이 여자는 이놈과 한패 아닙니까?”

은률이 당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가은이 냅다 소리를 지르자 찬영은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오늘 처음 만났지만 시끄럽고 호들갑스러운 모습이 영 비호감이었다.

“중독되었구나. 풍림이 깨어나면 우리에게 불리하다. 당분간은 이대로 재워두자꾸나. 별일이 없다면 사나흘 안에 오라버니가 돌아올 테니 내당에 옮겨 두고 지켜보자.”

그 임무는 찬영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에게 몇 가지 주의점을 알려준 후, 설이는 가은을 향해 돌아섰다.

“우리는 현진 사저를 태봉에 묻어줄 작정이에요. 그러나 보다시피 앞뒤로 추격대가 따라오니 시간이 여의치 않아요. 하여, 오라버니가 돌아오면 바로 떠날 예정입니다. 조카님은 앞으로 어쩔 생각인가요?”

“저는…, 어머니의 유언대로 숙부님을 만나 열쇠를 전달하고 싶어요. 이후의 거취는 좀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하여 당분간 이곳에 머물러도 되겠습니까?”

설이는 진건의 눈치를 살피고는 곧 긍정의 대답을 전달했다. 어차피 운선이 돌아오면 적절한 대책을 마련할 테니 함께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또한, 은률 때문이라도 가은이 필요했다.

“제가 정대협을 감시하겠습니다. 추격대의 선발 조는 이곳을 지나 두타산으로 넘어간 지 오래예요. 후발 조 역시 강가장 쪽은 의심도 하지 않을 테니 이곳은 안전할 겁니다.”

찬영은 가은이 미덥지 않은지 계속 툴툴거렸다. 낯빛이 쉬이 바뀌는 양이 앞뒤가 사뭇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설이의 결정이었으므로 지시에 따라 은률을 내당으로 옮겼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제가 소협을 어떻게 불러야 합니까?”

“쳇, 호칭은 필요 없소. 영영 안 볼 사이일지도 모르니.”

은률을 거의 던지다시피 내려놓고 사라지는 찬영의 모습을 보며 가은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봤자 려국의 평범한 백성이거늘 거만하게 구는 꼴이 아니꼬웠다. 태생이 미천한 자가 감히 왕실의 핏줄에게 함부로 대하다니, 언젠가 본때를 보여주리라 마음먹었다.

‘두고 보라지.’

설이에게서 진실을 확인하고 나자, 그녀의 결심은 더 확고해졌다. 애초에 다 무너져 가는 려국을 도울 생각은 전혀 없었다. 물론 어머니를 죽인 소소정과 장은에 대한 복수심도 여전했다. 단지 지금은 힘이 없으니 바짝 몸을 낮춰 기회를 노릴 작정이었다.

‘열쇠는 모두 일곱 개다. 다섯 개 중 하나는 소소정이 숨긴 곳에, 넷은 강운선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곳의 장소는 수수께끼와 같아서 내 힘으로는 풀어낼 수 없지. 그들에게 협조하는 척하면서 열쇠를 얻어내는 한편, 가능하면 장소까지 알아낸다.’

멍하니 하늘을 주시하던 가은은 낯익은 새 무리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 순간 번뜩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서둘러 짐을 뒤지더니 무언가를 꺼내 끄적끄적 쓰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품속에서 호각 하나를 꺼내 힘차게 불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비둘기 두 마리가 근처 나무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이제 되었다.”

비둘기 발에 방금 쓴 서신을 묶은 가은은 모이를 조금 먹이고는, 각자 다른 방향으로 날려 보냈다. 일을 마치고 난 얼굴에는 해맑은 미소가 서서히 번졌다. 가은이 선운검파에 들어와 반년 넘게 해온 일은 비단 심부름과 잡일만은 아니었다. 전서구를 관리하는 일이야말로 그녀의 주된 업무였다.

“제대로 전달되어야 할 텐데.”

이번에는 품속에서 작은 주머니를 하나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그 속에 있던 환약 두 알을 짓이겨 물에 녹이더니 은률의 입속에 억지로 쑤셔 넣었다.

“그리 쉽게 보내줄 순 없지.”

설이가 지어준 약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은률은 무조건 하루 이틀 안으로 깨어나야 했다. 그가 있어야만 앞으로 벌어질 일을 자신의 맘대로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강운선과 독대하여 열쇠와 정보를 빼낸 다음, 선운검파로 돌아간다. 온갖 고수들이 모인 이곳에서 강운선과 태을신교가 살아나갈 리 만무하다. 결국, 그곳은 오직 나만이 찾을 수 있게 되겠지.’

가은은 강호에 떠도는 전설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해심밀경소’를 얻는 자, 부와 명예, 권력을 가지리라. 그리고 그 자격은 오직 려국 왕실의 핏줄에게 있다는 것을.

“오라버니, 당신은 제가 가진 가장 예리한 검이에요. 연약한 소녀가 어찌 이 큰일을 혼자 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 어서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세요.”

가은은 은률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넘겼다. 망국의 고귀한 신분의 소녀가 드디어 위대한 한 발을 내디디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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