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間世之材(간세지재)
은률의 시선은 온통 비월을 향했다. 스승의 유품이기 이전에 그의 정체성을 증명해주는 황석파의 보물이었다. 감히 얼뜨기 소년이 탐낼 수 있는 검이 아니었다.
“네 이놈, 잘 만났다. 오늘이 바로 네 제삿날이다.”
은률의 일갈만으로도 가은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그러나 찬영은 조금도 주눅 드는 기색이 없었다.
“고작 검 한 자루에 쪼잔하게 구네. 공짜로 얻은 것도 아니고 목숨값이었거늘, 뭐가 그리 억울해서 이를 부득부득 가는 거요?”
그는 등에 멘 비월을 오른손으로 옮겨 잡았다. 검을 아래위로 한참을 살피는 시늉을 하더니만 혀를 끌끌 찼다.
“막상 휘둘러 보니 무겁기만 하던데, 왜 다들 비월검을 갖지 못해 난린지. 돈도 많아 보이는데 더 좋은 검을 구하면 되지 않겠소? 더럽게 치사하구먼.”
“네 이놈!”
더는 비아냥을 참을 수 없던 은률은 드디어 검을 꺼내 들었다. 길을 떠나기 전 가은이 구해 온 평범하고 흔한 검이었다. 비월검법을 보통의 검이 받아낼 리 만무했지만, 저 정도 애송이를 상대하는 데는 충분하리라.
“강지(剛志)”
팔의 궤적에 따라 흐릿한 검기가 사방형의 모양을 만들어냈다. 도형은 처음 크기에서 점점 줄어들더니 순식간에 주먹 하나 들어갈 정도의 너비로 작아졌다. 그 구멍 안에서 휘몰아치는 세찬 소용돌이가 그대로 찬영의 얼굴을 향했다.
“오오. 그것참 멋지군.”
찬영은 피하기는커녕, 상대의 동작을 하나하나 면면히 살폈다. 공격은 아예 할 생각도 없는 듯, 검이 몸에 닿을 때쯤에야 보법을 펼쳐 아슬아슬하게 흘려보냈다.
“어디 이것도 피하나 보자.”
은률의 다음 초식은 한층 사납고 맹렬했다. 비스듬하게 고쳐 잡은 검이 세 개의 원을 만들고 다시 그 안에 원을 만들었다. 물에 떨어진 돌 주변에 파동이 생기듯, 원 주변의 공기가 물결처럼 일렁였다.
“상아(嫦娥)!”
비월검 최고의 공격 초식이었다. 상대가 한낱 조무래기에 불과했으나 싸움을 빨리 끝내려는 의도였다. 비월을 들고 설치는 꼴이 역겨워 참을 수 없었다.
“사지를 다 분리해주마.”
“과연!”
휘몰아치는 검풍 속에서 찬영은 요지부동이었다. 흥미로운 표정으로 검 끝의 변화를 좇을 뿐이었다. 때때로 팔을 움찔움찔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검법을 배우는 모양새였다.
‘저 모자란 놈은 대체 뭐지?’
가은은 이미 승부가 결정되었다고 판단했다. 하여 굴의 입구를 들어 올려 작은 몸을 쏙 집어넣었다. 은률을 어떻게 따돌려야 하나 걱정하던 차였기에 더 잘된 일이었다. 오히려 찬영의 등장은 가은을 도와준 셈이었다.
챙!
“어라?”
귀를 찌르는 소음과 함께 은률의 검이 반 토막이 되었다. 찬영의 명치에 검날이 닿는 순간, 귀신같이 비월을 들어 진로를 막은 덕분이었다.
“오오, 대단한걸.”
“너…너……!”
연신 감탄사를 뱉으며 비실비실 웃는 찬영과 달리 은률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졌다. 지금 직접 겪은,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직 황석파의 제자들에게만 전수한다는 비월검. 자질이 없으면 배워봤자 소용이 없는 내전 무공이었다. 하여, 부능파가 영면한 지금, 유일 계승자인 은률을 제외하고는 강호의 그 누구도 비월검을 구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년이 상아의 초식을 완벽하게 구현했으니 놀랄 수밖에.
“네놈은 도대체 누구냐?”
“나? 윤찬영인데?”
찬영은 빙글빙글 웃으며 비월을 머리 위로 크게 휘돌렸다. 근력이 부족해 무게를 이기기 어려웠지만, 아까보다 한결 동작이 자연스러워졌다.
“역시 직접 보는 게 백 배 낫구나.”
***
운선이 비월검을 들 자격이 없다 했을 때, 찬영은 난생처음 오기가 생겼다. 저 건방진 왕족에게 본때를 보여줘야지. 하여 설이를 조르게 된 것이었다.
“고모, 비월검의 검보를 본 적이 있지요? 초식 몇 개만이라도 알려주세요.”
“내가 어찌 알겠니?”
윤설은 짐짓 모른 체했으나 내심 운선의 통찰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비월검법의 구결을 불러주며 설이에게 신신당부했다.
“황석파의 무공은 화려한 만큼 복잡하고 배우기 어렵다. 비록 외워오기는 했으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더구나. 너라면 심결을 얼추 풀어낼 수 있을 테니 한 번 검보를 만들어 보겠니?”
주운과 황석산 동굴에 갇혀 있을 때 우연히 발견한 것이라고 했다. 짧은 시간에 외운 것치고는 꽤 정확하고 세세한 기억이었다.
“우리는 지금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때야. 찬영을 이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 아이에게 비월검을 가르치자꾸나. 아마 내가 조금만 자극해도 검법을 가르쳐달라 귀찮게 굴 게다. 그럼 못 이기는 척 몇 초식만 알려주렴.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더라도 시간을 벌어줄지 모른다. 또 혹시 아니? 그 아이가 진짜 천재일지도.”
운선이 떠나고 난 후, 설이는 은근슬쩍 찬영에게 비월의 초식을 몇 가지 가르쳤다. 무학에 조예가 깊은 그녀였기에 아무래도 운선보다는 이해가 빨랐다. 정확한 동작은 구현할 수 없었으나 대체적인 자세와 기의 운용법은 제대로 전달한 편이었다. 침입자가 나타나자 윤설은 드디어 때가 왔음을 알았다. 진건이 지니고 있던 비월을 망설임 없이 찬영에게 건네주었다.
“초식을 흉내만 내도 시간을 끌 수 있을 거다. 교주님과 사형을 숨길 동안만 부탁한다.”
“염려 마세요.”
***
그 침입자가 정은률이었고, 그가 하필 비월검법을 구사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덕분에 살아있는 교본을 직접 보게 되었으니 찬영에게는 다시 없을 행운이었다.
“아, 왼손으로 지지하면 훨씬 부드럽게 돌릴 수 있군.”
은률의 동작 하나하나의 본을 따며 찬영은 배웠던 초식을 복습했다. 몸을 피하면서도 눈은 오직 상대의 움직임에 멈춰 있었다. 마침 상아의 초식을 구현했고, 찬영은 부러 기다렸다가 고스란히 같은 동작으로 일격을 막아낸 것이었다.
‘설마 스승님께서?’
은률은 혼란스러웠다. 훔쳐 배운다고 배울 수 있는 무공이 아니었다. 허면 부능파가 직접 가르쳤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 배웠나?”
“응 이거? 방금 너한테 배웠는데?”
“이놈!”
건성건성 대답하는 찬영의 태도에 은률의 분노는 점점 커졌다. 이렇게 된 이상 설렁설렁하게 겨룰 생각은 없어졌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누구한테 배웠는지는 상관없다. 저놈을 죽이면 그뿐!’
부러진 검이었으나 애송이 하나 처리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은률은 양손으로 검을 부여잡고 서서히 내력을 끌어올렸다.
“천균(天均)”
초식이 가진 뜻과 같이, 검은 하늘을 반으로 갈랐다. 방금까지 검영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화려했던 쾌검과는 사뭇 상반되는 묵직한 일검이었다. 바라보고 선 찬영의 동공이 점점 커졌다.
‘고모가 알려준 초식은 모두 쾌검이었는데 이리 느리고 무거운 초식도 있구나.’
기실 그는 싸우는 중이 아니라 배우는 중이었다. 황석파에 입문하여 줄곧 비월검을 익힌 은률은 정통 계승자였다. 정식으로 무공을 배워본 적 없는 찬영의 눈에는 그의 동작 하나하나가 경이롭기까지 했다. 하여, 합이 늘어갈수록 상대에 대한 존경심이 생겼다.
“이것도 피해 보아라.”
외침과 동시의 은률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오른손으로 옮겨진 검을 비스듬히 뻗으면서도 검신이 흔들리지 않도록 벌써 왼손으로는 수인(手印)을 맺었다. 두 다리를 쭉 폈다가 오므리니, 마치 허공에서 춤을 추는 모습과 같았다.
챙!
그제야 위험함을 감지한 찬영은 검을 휘둘러 공격을 막았다. 그러나 무리해서 손목을 움직인 바람에 팔 근육에 무리가 간 모양이었다. 내력이 크지 않은 그에게는 비월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게 여간 어렵지 않았다.
‘역시 훔쳐 배운 거군.’
은률은 초식 여러 개를 연결해서 쓰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찬영에 대한 의구심을 지울 수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검법을 훔친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승패는 이미 정해졌다. 고작 흉내나 내는 자에게 질 만큼 은률은 하수가 아니었다. 검으로서는 강호에서 그를 이길 자가 없었다.
‘끝내자.’
은률의 손목이 점점 빠르게 움직였다. 반쪽짜리 검은 길이의 몇 배가 되는 검기를 뿜어내며 찬영의 온몸을 덮쳤다. 왼쪽 어깨로 왔다가 아랫배를 스쳐 지나가고, 오른쪽 무릎으로 오는 발을 피하면 시퍼런 검날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가는 식이었다. 일각도 지나지 않아 찬영은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검이 스쳐 지나간 저고리 곳곳이 찢어져 넝마가 되었다.
“아아, 좀 쉬었다 하자. 아니, 이거 다시 줄 테니 그만 싸우자.”
“웃기고 있네.”
은률은 조금도 봐줄 마음이 없었다. 감히 검의 주인 앞에서 건방을 떨었으니 손목이라도 잘라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양행(兩行)”
왼손에는 평소 암기로 쓰는 단검이 들려있었다. 원래는 장검 두 자루를 잡아야 했으나 검이 반 토막이 되었으니 급한 대로 대안을 생각해낸 참이었다. 양손에 각각 다른 초식을 구현해야 하는 양행은 워낙 까다로워 부능파조차도 자주 쓰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원래 단순하고 생각이 얕은 은률에게는 무엇보다 유용한 무공이었다.
“강지(剛志), 상아(嫦娥)”
두 개의 초식이 동시에 뻗어 나오자 실로 위력이 어마어마했다. 왼손으로는 사방형을, 오른손으로는 원형을 그리는 검날은 바라보기만 해도 정신이 아찔했다. 검의 길이가 짧았기에 망정이지 원래대로였다면 이미 찬영의 양팔에 깊이 박히고도 남았다.
“아아, 좀 쉬자니깐.”
찬영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비월을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무게 때문에 천천히 움직이던 검은 조금씩 속도를 내더니 금세 커다란 타원의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챙, 챙, 챙, 챙
어느새 만난 세 개의 검날이 부딪치면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의 동시에 찬영의 몸이 뒤로 한 자 정도 날아갔다. 은률의 내력을 받아내려다 실패한 탓이었다. 한편, 검날을 모두 부러뜨린 비월은 원심력을 이기지 못하고 공중으로 붕 날아올랐다. 그리고 신통하게도 방향을 바꿔 본래의 주인에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흥, 감히.”
은률은 저편 구석에 대자로 뻗어버린 찬영을 바라보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저 정도 실력으로 비월을 탐내다니 가소로웠다.
“다시는 도둑질을 못 하도록 두 손을 잘라주마.”
자랑스럽게 비월을 고쳐잡고 찬영을 향해 두어 걸음 다가왔을 때였다. 가슴 쪽이 뭐에 찔린 것처럼 뜨끔하더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꺼림칙한 기분에 은률은 서서히 고개를 숙여 명치 쪽을 내려다보았다.
“어라? 이게 언제?”
“으흐흐.”
어느새 일어나 앉은 찬영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킥킥댔다. 웃는 중간에 검붉은 선혈을 한 움큼 토해내면서도 신나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도둑놈이 정정당당하게 싸울 줄 알았어? 그러게 내가 좀 쉬엄쉬엄하자고 했지?”
“너…네 이노…….”
앞 저고리에는 찬영이 꽂아 넣은 바늘이 미처 다 들어가지 못하고 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그러나 끝에 발린 맹독은 이미 은률의 몸속에 퍼져나간 후였다. 화를 낼 겨를도 없이 은률의 몸뚱이가 뒤로 스르륵 넘어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