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濫竽(남우)
미치도록 보고 싶었으나 이렇게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당신을 버린 게 아니라는, 자초지종을 털어놓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아니 그럴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아무리 부정해도 마음속에 자리 잡은 그녀에 대한 의심이 깊이 뿌리를 내린 다음이었다.
“네가 죽인 거니?”
“…….”
주운의 시선은 고개를 떨구고 앉은 조양의 주검을 향했다. 어디서부터 대화를 들었는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형진의 범행을 보지 못했음은 확실했다.
“운선아.”
“내가 죽이지 않았다 한들 믿겠습니까?”
“나는 그런 뜻이 아니다. 네가 아니라 하면 믿는다. 너도 알지 않니? 나는 언제나 네 편이란다.”
주운은 피투성이가 된 정인의 모습이 안쓰러워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얼굴에 생긴 자상처럼 운선의 마음에도 상처가 깊었다.
“어째서 저놈과 함께인 겁니까?”
“뭐?”
“내 편이라고 했습니까? 그럼 왜 나에게 거짓을 말했습니까? 당신의 목적 역시 ‘해심밀경소’였습니까?”
“운선아…….”
그의 눈에는 원망과 분노가 가득했다. 주운이 무슨 말을 해도 전혀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째서 이리되었을까? 어떻게든 되돌리고 싶었으나 돌아갈 방법을 모르니 막막하기만 했다.
“부정하지 않으마. 시작은 그 경전을 탐낸 것이 맞다. 허나 그게 전부는 아니었어. 나는…….”
“차라리 아니라고 하지. 다 오해라고 해주지.”
운선의 큰 눈에서 굵은 눈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믿었던 조양에게 속았을 때도, 현진이 사촌 누이임을 알았을 때도, 심지어 강호인들의 적이 되어 쫓기면서도 지금처럼 절망적이지는 않았다. 주운은 그에게 살아가는 이유였으며 돌아가야 할 안식처였다.
“운선아…….”
“이제 되었습니다.”
결국, 정인의 얼굴에 닿지 못한 주운의 손은 허공에서 멈춰버렸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남겨 두고 운선은 어둠 속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목적도 이유도 없이, 그저 도망가고 싶은 마음 하나뿐이었다.
“운선아…….”
주운은 차마 따라가지 못했다. 누가 누구를 버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거짓으로 시작된 관계였으므로, 다시 돌아간다 한들 과연 결과가 다를까?
“다 끝이 났어.”
마른 입술 사이로 쉰 바람 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장 소중한 이를 잃은 여인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남지 않았다.
“사저, 운선은 당신을 버렸습니다. 이제 제발 놓으십시오.”
어느새 다가온 형진이 주운의 가녀린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리되기를 바라왔지만, 막상 사랑하는 여인의 슬픔을 마주하자니 못 견디게 괴로웠다.
“놓아라.”
“사저, 진정하십시오.”
“놓아라!”
주운은 매몰차게 형진의 손을 떼어내려 했으나 힘이 부족한지 계속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를 노려보는 눈에는 분노와 증오가 가득했다.
“무슨 음모를 꾸미는 것이냐?”
“…….”
형진의 품속에서 주운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비집고 나왔다. 숨이 가쁜지 헉헉거리면서도 그의 멱살을 바짝 그러쥐었다.
“네놈이, 감히 네놈이…….”
주운은 분노를 마저 뱉어내지 못한 채로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그러나 의식의 끝자락에 다다라서도 주운은 형진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용서 못 한다. 네놈은 절대로!”
“네, 용서하지 마십시오.”
형진은 드디어 품에 안은 사랑이 떠나갈까 봐 있는 힘껏 주운을 끌어안았다. 상대의 마음이 복수여도 좋았고 증오여도 좋았다. 어떤 색깔이든, 자신을 향한 감정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강가장에 다다르니 이미 자시(子時)가 넘어가고 있었다. 체력이 약한 가은에게는 다소 무리한 여정이었다. 은률은 숨이 끊어질 것처럼 헐떡이는 가은이 안쓰러워 수차례 등을 내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마음조차도 부끄러워 오히려 더 퉁명스럽게 대하는 것이었다.
“설마 이 폐가에 숨었겠소? 손바닥만 한 곳에 숨을 데가 있어야 말이지.”
“혹시 모르지요.”
친절한 말투와 달리 속으로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뭐든 부정적으로 말하는 은률의 태도가 짜증 나기도 했거니와, 자신의 예측이 빗나갔다는 염려가 이제 확신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땅굴을 파지 않고서야 숨을 데가 없겠구나.’
명칭이 강가장일 뿐, 장원으로 보기에 이곳의 규모는 너무 하찮았다. 게다가 주인을 잃은 십 년 동안 먼지와 거미줄로 가득 덮여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지경이었다.
“지금이라도 두타산으로 갑시다.”
“하지만…….”
은률의 말이 십분 맞았으나 어쩐지 고집을 부리고 싶었다. 혹시 아는가? 두타산에서 쫓겨온 강운선이 이리로 숨어들지. 그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일단 우기고 볼 일이었다.
“그럼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려 보아요. 마침 잘 되었어요. 대협의 몸은 해독이 다 되지 않은 상태잖아요. 계속 무리했으니 좀 쉬셔야지요.”
가은은 갖은 핑계를 대며 은률을 주저앉혔다. 혹시나 고집 센 그가 마음을 바꿀까 봐, 일부러 호들갑을 떨었다. 재잘재잘 수다를 떠는 한편, 되는 대로 땔감을 모아 불도 피웠다. 아직 봄이 오지 않아 밤공기가 차고 건조했다. 몸살이 난 것처럼 여기저기가 쑤시고 아팠다. 그렇지만 졸리지는 않았다. 려국인들과의 거리가 한층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들떴다. 이런 게 핏줄일까? 심장이 주책맞게 두근두근 뛰었다.
“성곤이 태봉까지 무사히 돌아간다면 태을신교가 다시 일어설까요?”
“그 전에 잡아야 하지 않겠소.”
“만약에 말이에요.”
“만약은 없소.”
기대감 가득한 가은의 질문과 달리 은률의 대답은 매몰찼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아예 다른 선택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무조건 그들을, 성곤을 잡아 죽인다. 오직 그 하나의 목표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왜 그래요? 어째서 유독 성곤을 증오하는 겁니까?”
“…….”
가은의 툭 뱉어낸 말에 은률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굳이 숨기려 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일부러 드러낸 적도 없었다. 하여 태을신교, 아니 성곤에 대한 적개심을 알아차린 이는 장은을 제외하고는 가은이 처음이었다.
“뭔가 사정이 있겠지요. 누구나 남들은 이해 못 하는 응어리가 하나씩 있는 법이니까요. 저 또한 그렇습니다. 그러니 방금 질문은 안 들은 거로 하세요. 저도 다시는 묻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들을 죽이기 전에 반드시 저에게 먼저 기회를 주세요. 물어야 할 말이 있습니다.”
물기가 촉촉한 눈동자에 붉은 모닥불이 아른거렸다. 부탁 같기도 했고, 협박 같기도 했다. 그게 어느 쪽이든 간에 은률의 대답은 이미 정해진 것과 다름없었다. 언젠가부터 그는 한 여인의 부탁은 절대로 거절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
“잠깐이라면.”
“네, 딱 하나만 질문하면 됩니다. 그 후엔 혀를 자르든, 목을 분지르든 상관없어요.”
가은은 은률의 손을 덥석 잡았다. 깜짝 놀란 그가 서둘러 뺐는데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손까지 더해 그의 손을 완전히 가둬버렸다.
“동기들은 대협을 무섭고 어려운 분이라 했는데 다 거짓부렁이에요. 이리 친절하신데 어째서 그런 낭설이 돌았을까요? 정대협과 같은 의협심 많고 실력이 출중한 인재를 곁에 두신 장문주님이 부럽습니다.”
은률은 가은의 보드라운 손길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대로 있으면 자신의 염치없는 흑심을 들켜버릴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손을 확 빼냈다가는 가은의 마음이 상할 것만 같았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에, 이마에는 벌써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나중에 분명 좋은 사형제를 만날 기회가 있을 것이오.”
“하아.”
싱글벙글 웃던 가은의 얼굴이 일순간에 어두워졌다. 초승달 같던 눈썹이 아래로 축 처지고 입술을 앙다문 모습이 퍽 애처로웠다.
“선운검파에 어렵사리 들어갔건만, 외로운 건 매한가지더이다. 사저들뿐 아니라 동기들 사이에서도 저는 섬과 같아요. 아무도 고아 약초꾼을 친우로 두고 싶지 않은 모양입니다.”
“설마.”
“네, 제가 반년 동안 그곳에서 배운 것이라고는 물 긷고 불 피우는 법밖에 없어요. 그나마도 이미 할 줄 알았으니 배운 것도 아니지요. 대협, 저는 언제쯤 마음을 의지할 수 있는 지기를 만날 수 있을까요? 과연 가능한 일이긴 할는지요?”
어느새 동그란 두 눈에는 방울방울 영롱한 눈물이 맺혔다. 아슬아슬하게 속눈썹을 부여잡고 있는 그것들은 단 한 번 깜빡이면 도르륵 굴러떨어질 것 같았다.
“대협, 염치 불고하게도, 부탁 하나 더 해도 되겠습니까?”
안 그래도 심히 당황했던 은률은 가은의 질문이 되레 고마웠다. 무슨 부탁이든 다 들어줄 기세로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소녀의 오라버니가 되어주시겠어요?”
“아, 하지만 그건…….”
은률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오라버니라니, 피도 안 섞인 사이에 무슨 오라버니란 말인가? 그가 바라는 관계는 절대로 오라버니와 동생 사이가 아니었다.
“혹 제 신분이 미천하여 그러십니까? 그렇다면 이번에도 안 들은 거로 하세요.”
긍정도 부정도 못 하고 말만 더듬거리는 은률을 바라보던 가은은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턱 밑으로 쉴 새 없이 눈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아니, 그건 당치도 않은 말이오. 절대 그런 뜻이 아니오. 아아, 그럽시다. 그렇게 합시다.”
“정말요?”
횡설수설하는 와중에 승낙의 말을 골라낸 가은은 고개를 버쩍 들었다. 눈물범벅이었지만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다.
“오라버니, 앞으로는 오라버니만 믿겠습니다. 이제 말도 놓으세요.”
“아직 그건 좀.”
가은이 그 작은 머리를 가슴팍으로 들이미는 통에 은률은 다시 온몸이 뻣뻣해짐을 느꼈다. 몹시 설렜지만 그렇다고 마냥 기쁘지도 않은 묘한 감정이었다.
“어?”
가은의 시선이 마당 한구석에 쌓인 토사에 다다랐을 때였다. 흙더미를 아무렇게나 개켜놓은 줄 알았는데 낮은 각도에서 보니 어딘지 모르게 위화감이 들었다.
‘어째서 일부분만 흙이 얕게 쌓인 거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는 거침없이 구석으로 향했다. 뒤늦게 정신이 돌아온 은률도 서둘러 따라갔으나 그의 눈에는 딱히 이상한 점이 보이지 않았다.
“오라버니, 찾았어요.”
“뭘?”
“비밀 통로!”
손으로 토사를 거둬내던 가은이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자신의 영특함을 증명했다는 우쭐함과 드디어 찾았다는 안도감이 섞인 소리였다.
“어디!”
은률이 나서자 일이 훨씬 빨리 진행되었다. 오래지 않아 성인 한 명 들어갈 정도의 사방형의 입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우리 들어가 봐요.”
“내가 먼저 가겠소.”
은률은 혹시나 함정이 있을까 싶어 가은을 등 뒤로 돌려세웠다. 려국 놈들은 하나같이 악랄하고 교활하여 무슨 수를 쓸지 몰랐다. 오른손에는 단검을 들고 왼손으로는 절단면의 한쪽을 집었다. 생각보다 무게가 무겁지는 않아 한 손으로도 가능할 것 같았다.
끼이익!
“허허, 이게 누구신가? 혹 나를 따라오신 건가?”
문이 반쯤 들어 올려지던 순간이었다. 검은 인영이 짙은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났다.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 새하얀 얼굴, 그리고 제 몸집보다 커다란 검.
“이 새끼!”
“큭큭큭.”
은률은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들의 앞에서 빙글빙글 웃고 있는 녀석은 비월을 훔쳐 간 도둑놈, 윤찬영이었다.
*** 남우(濫竽):
무능한 사람이 재능이 있는 체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