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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무십일홍-119화 (119/209)

119화. 背故向新(배고향신)

퍽!

묵직한 힘이 운선의 왼쪽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더니 뒤쪽 벽에 부딪히며 산산이 부서졌다.

“윽!”

안면 가득 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빗겨나간 일격은 이마부터 오른쪽 뺨까지 얕은 상처를 남기고 공기 중에 흩어졌다. 긴 상처 사이로 붉은 피가 몽글몽글 맺혔지만 죽음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어째서?”

운선이 신공의 기운을 다 끌어모으기도 전이었다. 눈 앞에 펼쳐진 믿을 수 없는 상황에 그나마 단전에 머물렀던 내력까지 일순간에 흩어져 버렸다.

“역시 너였구나.”

활인검을 바닥에 꽂아 쓰러지는 몸을 지탱한 채로, 조양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라면 우영이 갑자기 사라진 것도, 부러 심부름을 가지 않은 이유도 다 설명되었다.

“형진아.”

“…….죄송합니다.”

죄책감이 없는 사과를 받으며 조양은 기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억울함도 아니었다. 굳이 정의하자면 오히려 미안함에 가까웠다. 가장 아끼면서도 칭찬 한 번 해주지 않았던 아이였다. 늘 모자라다 몰아세우고 무시했던 제자였다.

“내 등 뒤에 항상 네가 있음을 모르지 않았거늘.”

신뢰했기에 내어준 등이었다. 부모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등을 유일하게 보여준 이가 형진이었다. 그 신뢰가 이유가 되어 온갖 감정을 쏟아낼 수 있었다. 어떤 가시 돋친 말도 애정과 신뢰로 다 희석될 수 있다는 믿음. 누구보다 가까웠으므로 모든 감정을 쏟아낼 수 있었던 모순.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고 오만이었다. 전달되지 않은 신뢰는 증오와 원망이 된다는 것. 현로(賢老)선생이라 자처하면서도 정작 그 이치를 죽음 앞에서야 깨달은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스승의 가슴에 긴 검을 깊이 박은 제자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까무러치도록 슬픈데도 정작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되었다.”

조양은 아무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연신 같은 말을 반복하는 제자가 안쓰러웠다. 화도 나지 않았다. 그 순진한 아이를 괴물로 만든 이는 다름 아닌 자신이었기에, 그저 업보라 생각했다.

‘다만 꿈을 이루지 못하여 아쉬울 뿐.’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도 그는 운선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시작과 끝은 모두 려국이었다. 경국을 위한 충성이었으나 평생을 려국을 좇아 살았던 삶.

“흐흐흑…….”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기괴한 소리가 무너져내리는 몸뚱이 사이로 비집고 나왔다. 이제 통증도 없었다.

‘참으로 초라한 죽음이구나.’

마지막으로 극렬하게 몸을 떨던 조양은 이내 고개를 툭 떨구었다. 늘 꼿꼿했던 그의 허리가 보잘것없이 접힌 채로. 그 모습이 너무 초라해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

“백형진…….”

운선은 인간미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형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인품을 높이 평가한 적은 없었으나 적어도 스승을 살해하는 패륜아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앞에는 욕망에 눈이 먼 짐승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강운선, 우영을 만나볼 테냐?”

“뭐?”

“우영이 살아있다. 그리고 너를 만나고 싶어 해.”

“어째서 도와주는 것이냐?”

“…….”

형진은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문밖으로 나가 넝마가 된 사내를 질질 끌고 들어왔다. 보나 마나 우영이었다.

“우영…….”

수년 전에 불구가 된 다리는 이미 썩어들어간 지 오래였다. 잘린 손목은 아무렇게나 천으로 감아놓아 농양이 질질 흘러내렸다. 실명한 한쪽 눈은 그나마 제대로 된 안대로 가렸으나 모진 고문을 받은 탓에 핏물이 잔뜩 배어 나와 있었다. 신음이라도 내지 않으면 시체라 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는 몰골이었다.

“으으…….”

“어째서 여기로 불렀는가? 네놈이 나를 부른 이유가 있을 게 아니냐?”

운선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분명 물어볼 게 한가득하였으나,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니, 확인하는 게 두려운지도 몰랐다. 조양이 말한 이야기들이 모두 사실일까 봐서.

“운선이냐? 아아, 정말 찾아왔구나. 내가 미끼를 던졌다는 걸 어찌 알았느냐?”

“굳이 열쇠의 존재를 모르는 조양에게 구슬을 내어준 것. 그것이 무려 일곱 개라는 사실까지도 친절히 알려주었다. 고문을 견디지 못해서였을까? 아니, 그런 이유였다면 손목이 잘리기 전에 내어줬겠지.”

운선은 너덜너덜해진 우영의 몸뚱이를 버쩍 당겨 들었다. 피고름 내가 훅 끼쳐 들어왔다.

“손목을 포기하면서까지 가짜 열쇠를 준 이유가 뭐냐? 나를 불러들인 이유가?”

“흥,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너는 참 비상한 머리를 가지고 있지. 아무리 내용이 적다지만 그 잠깐 사이에 경전을 외우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더구나. 하여 알아볼 줄 알았다. 우리 형님의 반지를. 그래, 내가 조양에게 내어준 건 가짜야. 너를 부르기 위해 미끼를 던진 거지. 예상대로 덥석 물었으니 나도 꽤 영민하지 않은가? 컥.”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우영은 하고 싶던 말을 조곤조곤 뱉어내었다. 이 만남이 마지막일 테니 되도록 많은 진실을 알리고 싶었다.

“개소리 말고 이유를 말해.”

“강율천을 죽이라고 사주한 이는 조양이 맞다. 그런데 그가 그러더군. 우리를 불러들인 진짜 배후는 존경하는 스승님이라고. 나는 믿지 않았다. 비록 배신했더라도 한때는 제자였던 우리를 그리 참혹한 개죽음으로 몰아넣지 않았을 거라고.”

그러나 그의 목적이 강율천의 죽음이라면? 창현에 대한 복수라면? 우영은 점점 의심이 깊어졌고 결국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태을신교는 려국의 독립을 위한 교단이 아니다. 오직 성곤의 의지로 세워졌다. 하여 교도인 우리들은 그의 뜻대로, 그가 외치는 대의를 위해 희생되었다. 그런데 그 대의가 무엇일까? 큭큭”

우영은 어깨를 크게 들썩이며 웃기 시작했다. 생각이 언어로 형상화되어 나오는 순간, 그의 확신은 진실이 되었다. 이제 스승에 대한 어떤 믿음도 남지 않았다.

“성곤은 너를 증오했다. 아니 너의 피를. 너의 아버지 창현은 성곤의 목숨과도 같은 존재, 그의 하나뿐인 딸을 죽였다. 심지어 그녀의 뱃속에는 열 달을 채우지 못한 아이가 있었지. 성곤이 딸의 뱃속에서 아이를 끄집어내지 않았더라면 설이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설이 때문에 성곤은 살아남기로 마음먹었다. 또한, 복수를 다짐했지. 그리고 창현을, 율천을, 그들을 지지했던 대신들을 모두 몰살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고문을 당해 정신 줄을 놓아버린 미친놈의 말을 듣고 있을 이유가 있을까? 운선은 어느새 그의 몸뚱이를 밀쳐내고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려국이 멸망한 진짜 이유가 무엇인 줄 아느냐? 경국의 욕심? 천서국의 개입? 아니다. 욕망에 눈이 먼 려국인들끼리의 개싸움 때문이었다. 우리는 성곤의 복수심을 위해 그 개싸움의 최전선에서 칼춤을 추었지. 대의라고 포장되었지만, 고작 사사로운 복수 때문에.”

우영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마른 몸을 비틀며 한동안 자지러지는 기침을 뱉어냈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내장이 모두 망가진 채였다.

“그래도 나는 좋았다. 스승님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우리는, 형님은, 칠원성군은 모두 희생양일 뿐. 강운선, 네가 창현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결코 너를 해하지 않았을 거다. 아무렴, ‘해심밀경소’의 주인은 애초에 넌데 어찌 그 귀한 물건을 탐했겠느냐?”

우영은 갑자기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남아 있는 손으로 상반신을 질질 끌어 운선을 향해 다가왔다. 최대한 가까이, 아무도 들을 수 없도록 그에게 전할 말이 있었다.

“강운선, 성곤을 믿지 마라. 아마도 그의 복수의 종착지는 너일 테니까. 그를 죽이고 려국인을 구하려무나. 려국의 모든 것이 있는 그곳, 그곳을 찾아 모든 걸 원상태로 돌려놓으면 된다. 다시 시작하면 된다.”

어느덧 운선에게 몸을 밀착한 우영은 그의 코밑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역겨운 냄새가 모든 감각을 마비시키는 것 같았다.

“내 눈에 진짜 열쇠가 있어. 가서 문을 열어.”

“뭐?”

“큭큭큭, 욱…….”

귀밑까지 찢어진 그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핏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스스로 이 고통을 끝내기 위한 마지막 욕심이었다. 한동안 목을 붙잡고 헐떡이던 우영은 운선의 품 안에서 마지막 숨을 거뒀다.

“혀를 물었군.”

형진은 차마 손으로 잡기가 싫었던지 발로 툭툭 차서 우영의 시체를 떼어내었다. 운선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냄새를 참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태우든, 묻어버리든 고유생이 깨기 전에 시체를 없앨 마음이었다.

“우영을 만나게 해준 이유가 뭐야?”

“글쎄, 확신이 필요해서?”

형진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에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굳이 대답해 줄 이유는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생색을 내고 싶기도 했다. 오직 자신의 영특함을 과시하고픈 욕심 때문에.

“우리는 이제 동등한 입장이야. 장소는 이미 까발려졌으니 이제 다음 단계로 나아가면 되지. 다행히 너도 해답을 찾지는 못한 모양이군.”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군.”

운선의 입가에서 허탈한 바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가 알던 백형진은 누구였을까? 저리 잔혹하고 간악한 이는 이전까지 보아왔던 그가 아니었다. 공명심에 취해 사람으로서 응당 느껴야 할 죄책감마저 없는 모습은 아귀(餓鬼)만도 못했다.

“이제 어쩔 셈이야?”

“글쎄, 이 자리에서 네 놈을 죽여버릴까?”

심드렁한 대답에는 진심도 반쯤 섞여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운선은 나약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그들이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고민 중이야. 어느 게 유리할지.”

죽이는 것까지는 어렵지 않았다. 고유생을 증인 삼아 스승의 살해범을 조작하는 것도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다음은?

‘해심밀경소를 얻기 위해 달려드는 승냥이들을 내가 모두 감당할 수는 없다. 차라리 위험하더라도 녀석을 살려두어 관심을 돌리는 게 최선이다. 추후 모두의 앞에서 심판을 받게 하면 될 일, 무리해서 목숨을 거두는 게 능사가 아니다.’

운선은 상대의 표정에서 결정의 방향을 읽어냈다. 현명하게도 그는 자신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자리에 더는 남아 있을 이유가 있을까?

“나에게 뒤집어씌울 생각이라면 그러도록 해. 대신 우영의 시신은 내가 가져간다.”

“좋을 대로.”

형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운선의 말처럼 그의 목적은 다 이루어졌다. 이대로 흔적만 남기고 떠난다면, 모두가 운선의 범행을 확신할 테니까.

운선은 성인 남성이라고는 보기 힘든 깡마른 시체를 업었다. 피를 많이 흘려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른 방향을 보고 선 형진을 지나쳐 천천히 문 쪽으로 나아갔다. 들어올 때보다 나갈 때의 마음이 훨씬 무거웠다.

삐걱.

그러나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린 문 앞에는 또 다른 장애물이 있었다. 형진이 데려온 이는 우영만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생명력이 없는 제웅처럼 가냘픈 여인이 서 있었다.

“아아, 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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