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118화 (118/209)

118화. 胡思亂想(호사난상)

웃음 끝에 시작된 기침은 좀처럼 멎을 줄을 몰랐다. 긴 이야기에 기력이 쇠해지기도 했거니와 이 통쾌한 순간이 흥분되었기 때문이었다. 죽을 시간이 가까워지는 조양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그가 맛보는 마지막 희열감이었다.

“더 재밌는 건, 이무영이었다. 그녀 역시 ‘해심밀경소’를 노리고 있었다. 어쩌면 당연했지. 너의 아버지 창현의 오랜 정인이었기에 어느 정도 자격이 있었으니까.”

“뭐?”

더 놀랄 일이 있겠나 싶었는데 흘러가는 이야기는 점입가경이었다. 운선은 이제 머리가 어질어질하여 검을 쥐고 있을 힘도 없었다.

“수월심검을 배워놓고도 그걸 몰랐더냐? 수월과 월심은 창현과 무영이 함께 연마한 검법이었느니라. 쯧쯧,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만 참으로 멍청하구나. 어째서 사이좋던 사형제들이 척을 지게 되었을까? 뜻이 달랐던 율천은 그렇다 치더라도 무영과 성곤은 길이 같았거늘.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의 정인을 죽인 사형을 어찌 용서할 수 있었겠느냐? 평생 만나지 않음으로써 미움을 감(減)할 수밖에.”

운선은 성곤의 이야기만 나오면 불편해하던 무영을 떠올렸다. 그녀는 려국에 대한 추억을 털어놓으면서도 창현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주운과 자신이 시연하는 수월심검을 보며 눈물을 글썽이던 모습도 떠올랐다.

“이 순진한 녀석, 너는 그 깜찍한 주운에게도 수년을 속았지. 설마 그 약은 아이가 고작 정에 이끌려 네 놈을 수오당에서 보살핀 줄 아느냐? 무영은 제자를 시켜 너를 감시하는 한편, ‘해심밀경소’의 내용을 알아 오라고 지시했다. 적어도 이곳에 있던 동안은 너를 속일 작정이었던 게지.”

“아니야!”

주운의 이름이 그의 더러운 입에서 나오자 운선의 마음은 급격하게 동요했다. 목숨을 바쳐 자신을 지키던 주운이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그녀만은 속일 리 없었다.

“믿든 믿지 않든, 그건 네 마음이지. 그러나 확실한 건 네가 나에게 적어준 ‘해심밀경소’의 필사본을 그 아이가 훔쳐보았다는 것이다. 네 놈이 멍청하게 구결을 물어볼 때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대답해 주지 않더냐? 이제 눈치챘겠지만 주운은 태을신공의 내공 심결을 풀어줄 능력이 없었다. 그런데도 몇몇 구절은 도와주었겠지. 바로 무영이 뒤에 있었기 때문이야. 하여 나 또한 너를 쉬이 내치지 못하고 데리고 있을 수밖에. 이무영과 부딪치기보다는 지켜보다 그녀가 알아낸 것들을 뺏을 속셈이었으니까.”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운선은 계속 같은 말만 웅얼거렸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과거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당일에는 몰랐던 질문을 다음 날이면 명쾌하게 풀어준 적이 여러 번이었다. 하물며 려국의 글자 배열을 모르면 결코 알지 못하는 심결을 풀이하기도 했다. 그때는 크게 개의치 않았던 일들이 하나하나 증거가 되어 다시 해석되었다.

“운선아, 너는 이미 졌다. 내가 비록 기혈이 뒤틀려 몸을 움직이기 어렵다만 웬만한 고수보다는 낫다. 그러나 너는 평정심을 잃었으니 아랫마을 촌부보다도 못한 상태가 아니더냐? 지난 십여 년간, 이 좁은 곳에서 나 또한 태을신공을 공부했으니 부정할 생각은 말아라.”

극강의 무공일수록 허점이 큰 법. 마음이 비워지지 않은 때에는 결코 운용할 수 없는 내공이 태을신공이었다. 성정이 불같은 성곤이 7단계에 이르지 못한 이유도 같았다. 그나마도 불쌍한 제자의 소식을 듣고 주화입마에 빠졌으니 신공의 약점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확인시켜 주는 일례가 되었다.

“당신은 대체.”

입술을 자근자근 씹어 치아 자국대로 핏물이 배어 나왔다. 아무리 해도 일렁이는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분하지만 조양의 말이 맞았다. 폭풍우가 내리치는 마음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억지로 기를 방출했다가는 온몸이 터져버릴지도 몰랐다. 심지어 단전에 힘을 주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래도 네 놈이 수월을 들었으니, 나도 공평하게 무기를 휘둘러야겠지. 큼큼.”

조양은 목소리를 크게 가다듬더니 박수를 두 번 쳤다. 전의를 상실한 적을 앞에 두고 한껏 여유를 부리는 양이 퍽 가증스러웠다.

“이 녀석을 맡아주십시오.”

“흥, 아주 맛있는 먹이군요.”

병풍 뒤에서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고유생이었다. 자신의 역할이 마음에 들었는지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오래 기다린 탓에 다소 지친 모습이었으나 내력을 운용하지 못하는 운선에게는 과한 상대였다.

“강운선, 오늘이야말로 네 녀석의 뼈 마디마디를 몽땅 부러뜨려주마!”

고유생의 공격에는 빈틈이 없었다. 긴 손톱을 구부린 손으로 운선의 멱살을 낚아채는 동작은 마치 사냥감을 포획하는 매와 같았다. 매섭기로 소문난 그의 금나수였다.

“쥐새끼 같은 놈!”

운선이 요리조리 몸을 피하기만 하자 고유생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내공이 아니라 경공에서조차 상대가 되지 않음을 인정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불과 일 년도 되지 않았건만, 이토록 무공의 진전이 있을 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반드시 비급을 손에 넣어야 한다.’

운선과의 술래잡기가 길어질수록 고유생의 목표는 더욱 뚜렷해졌다. 려국의 도둑놈들이 갖기에는 너무나 신통한 비급이 아닌가? 그러기 위해서는 저놈의 날랜 발을 묶어두어야 했다.

“진헌신장”

오른손에서 쏟아져 나오는 장력은 운선의 겨드랑이 쪽을 향했다. 두 사람의 사이는 고작 스무 걸음 상간이었기에 단번에 피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운선은 본능적으로 보법을 멈추고 배를 보이며 몸을 뒤로 젖혔다.

“월산서풍(西風)”

유생은 그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왼손에 옮겨 잡은 그의 월산검이 어느새 운선의 머리를 겨냥했다. 낮게 깔려 찔러 드는 검기는 예리하고 묵직했다. 애초에 그가 출수한 장력은 허수였기에 검에 모든 공력을 실은 터였다.

‘속았다.’

이미 몸의 중심을 바꾸기에는 늦은 상황이었다. 이대로라면 이마로 검을 받아야 할 판이었다.

“곡우”

왼손에만 체중을 실은 상태에서 날린 권풍은 평소 위력의 반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급한 김에 내공을 실었으니 결코 무시할 만한 공격은 아니었다. 고유생은 월산검의 방향을 바꿔 권풍을 쳐낼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욱!”

고유생의 욕과 동시에 운선이 붉은 선혈을 뿜었다. 평정심을 잃은 상태에서 무리한 운공을 한 탓이었다. 과연 조양의 예측이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운선아, 이미 기가 뒤틀리기 시작했으니 다음번에는 정말 주화입마에 빠질지도 모를 일이다. 네가 순순히 열쇠만 내어준다면 단숨에 목숨을 거둬주마.”

“퉷!”

조양의 비아냥에 운선은 대답 대신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들을 가치도 없는 제안이었다.

“신공이 없어도 네놈들 따위에게 당하겠는가?”

물결처럼 작은 파동을 그리며 수월이 자태를 드러냈다. 운선의 손목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얇은 검신이 스스로 춤을 췄다.

“수중월영(水中月影)”

주인의 명을 들은 수월은 크게 반원을 그리며 검광을 뿜어냈다. 처음에는 은빛이었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푸른빛이 되었다. 그 색이 어찌나 신비로운지 고유생조차도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였다.

‘언제 또 검을 익혔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기가 찰 노릇이었다. 내공 외에는 별 볼 일 없던 운선이 자꾸 새로운 외공을 사용하자 무섭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고유생이 누구던가? 비록 사형과 사제의 천재성에 묻혀 실력을 폄하 받아왔으나 오대산검에서는 손꼽히는 고수였다. 특히 그의 월산검은 부능파의 비월검과 대적해도 밀리지 않는 유일무이한 문파의 내전 검법이었다.

“월산영명(靈名)”

챙!

두 보검이 맞부딪치자 부싯돌끼리 부딪친 것처럼 노란 불꽃이 튀었다. 검의 굵기나 무게의 차이 때문에 수월이 크게 휘어졌다. 이대로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부러질 것도 같았다.

“행월(行月)”

운선이 검지와 중지를 돌려 검을 고쳐 잡자, 수월의 검날이 억지로 둘둘 만 것처럼 도르르 말려 들어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휘어지더니 월산의 검신을 감아 올랐다.

‘이게 무슨 조화람?’

고유생은 당황하여 황급히 검을 쳐냈으나 이미 수월은 뱀이 똬리를 틀 듯, 월산을 사로잡아 버린 뒤였다. 아무리 당기고 밀어 보아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네 이놈!”

고유생의 일갈이 끝나기도 전에 운선의 주먹이 그의 안면 앞까지 당도했다. 뜨거운 바람이 훅 끼쳐오자 눈이 불에 덴 것처럼 따가워졌다.

“아악!”

퍽!

코뼈가 주저앉은 고유생은 그대로 혼절하였다. 얼굴이 온통 피범벅이라 누구인지도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이건 주운의 몫이다.”

내력은 쓰지 않았으나 온 힘을 다한 일격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가 주운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일만은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신공으로 얼굴을 다 태워 버리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양생(養生)”

“헉!”

쉴 틈도 없이 들어온 공격은 다름 아닌 조양의 활인검이었다. 그가 불시에 끼어들 것으로 생각하긴 했으나 참으로 비겁한 수였다. 그래도 한 편이랍시고 대신 싸워준 고유생을 방패로 삼았으니 소인배가 따로 없었다.

“당신 같은 이가 무림의 맹주라니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

한껏 이죽거렸으나 운선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놀란 마음에 내력을 끌어올린 탓에 다시 선혈을 한 움큼 뿜어냈다. 오히려 이제는 부상을 입은 조양이 더 우위에 있었다.

“규구(規矩)”

거침없는 초식에는 자비란 없었다. 공격 일변도이면서도 한 치의 틈도 허용치 않았다. 평생을 수련한 그의 활인검을 이제 막 완공한 수월검이 이길 리 만무했다. 고작 십여 합 만에 운선은 수세에 몰렸다.

“내공 한 줌 쓰지 않아도 너 따위 애송이 이기는 건, 식은 죽 먹기지.”

모든 초식을 다 아는 활인검이었으나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천지 차이였다. 수월의 화려한 초식은 겨우 몸을 방어하는 데만도 급급했다.

촥!

“윽”

왼쪽 팔에 여섯 번째 자상이 나는 찰나, 운선은 더는 방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악랄한 살인마를 죽이려면 동귀어진밖에 수가 없음을.

“주화입마 하여 몸이 불에 다 타더라도 네놈은 반드시 데려가겠다.”

운선은 수월을 크게 휘둘러 상대와의 거리를 확보했다. 약간의 틈이 생기자 두 손을 아래로 크게 휘둘러 배꼽 근처에서 수인을 만들었다. 신공을 단전에 모으기 위한 준비 동작이었다.

“이지능위대(以知能爲大) 하니 기도야택원(其道也擇圓)이라.”

운선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조금 뒤에는 정수리 위로 희뿌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양을 유심히 보던 조양은 실소를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모자란 놈, 그대로 둬도 자멸하겠지만 동귀어진하려는 야무진 꿈을 이뤄줄 순 없지.”

조양은 마지막에 쓰기 위해 남겨 둔 내력을 두 손에 가득 모았다. 이 일 장으로 지겨운 놀이를 끝낼 작정이었다. 열쇠의 행방을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이 녀석이 없으면 어차피 태을신교의 미래도, 려국의 재건도 없을 테니까.

“태허무형(太虛無形)”

양손에 가득 찬 기의 덩어리가 운선의 가슴을 향해 일순간에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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