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藏頭露尾(장두노미)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주운의 모습은 처연하기까지 했다. 흐트러진 그녀를 처음 마주하는 형진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반나절이라도 쉬어 가지 않으면 정말 큰 사달이 날 것 같았다.
“피곤하면 쉬어 갈까요? 아니, 저 혼자 산에 올라도 충분합니다.”
“아니요. 이제 한나절만 가면 두타산이 아닙니까? 제 걱정은 말고 앞장서세요.”
그러나 주운은 조금도 멈출 마음이 없었다.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사실은 충분히 인지한 상태였다. 그러나 아직은 용납할 수 없었다. 운선이 다급하여 차마 말을 전하지 못했을 뿐, 버리려는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상황이 정리되면 필시 돌아오리라는 믿음도 있었다.
“아직 몸이 다 낫질 않았잖습니까? 제가 반드시 운선을 설득하여 사저 앞에 데려올 테니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간곡히 부탁하는 형진의 말에도 주운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나도 갑니다.”
그녀의 결연한 표정에서 형진은 어떤 설득도 의미 없음을 깨달았다.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도 아니었다. 하여, 대신 절충안을 제시했다.
“그럼 산 아래 객잔에서 딱 한 시진만 쉬었다 갑시다. 밤을 새워 달려왔으니 체력 소모가 클 테니까요. 그 후에 바로 출발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죠. 그럼.”
주운은 이쯤 해서 타협하기로 했다. 기실 그녀의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길거리에 쓰러지고 싶은 것을 정신력으로 버티는 중이었다. 형진의 제안이 다소 반갑기도 했다.
“헌데, 운선이 두타산으로 올까요? 어째서 이렇게 강하게 확신하나요?”
따뜻한 국물을 한 모금 들이킨 주운이 은근슬쩍 형진의 의중을 물었다. 어쩔 수 없이 그와 함께하지만, 의심을 거둔 적은 없었다. 막상 운선을 만나면 다짜고짜 검을 휘두를 게 뻔했다. 끝까지 붙어 있으려는 이유도 이와 같았다. 만약 운선이 위기에 처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저지할 생각이었다.
“반드시 찾아야 할 사람이 있으니까요.”
“네? 무슨.”
“두타산에, 수오당에, 우영이 있습니다.”
“그가 아직 살아있었군요.”
순간 주운은 극심한 어지럼증을 느꼈다. 요 며칠 동안 많이 나아졌다 싶었건만, 아직은 몸이 정상이 아닌 모양이었다. 추운 날씨에 무리했던 터라 더 그럴지도 몰랐다.
“따뜻한 국물을 마셔요. 몸이 따뜻해지면 한결 나아질 겁니다.”
형진은 살뜰히 주운을 보살피며 그간의 사건을 세세히 설명했다. 우영을 통해 ‘해심밀경소’의 비밀을 밝혀낸 것, 그리고 그가 열쇠를 가진 것까지. 이 대단한 비밀을 발설한 사실을 조양이 알면 노발대발할 일이지만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숨기고 싶지 않았다.
“우영은 부러 자신의 손목을 내주고 운선을 불러들였지요. 반드시 찾으러 올 수밖에 없도록 묘수를 짜낸 것이죠.”
“어째서일까요? 아니, 설마?”
주운이 눈꺼풀이 서서히 감겼다. 몇 번이고 눈을 부릅떠 보았지만 이내 다시 잠이 쏟아졌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잠들게 만드는 약물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멀어져가는 의식 속에서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그리고 제 묘수이기도 합니다.”
주운이 탁자에 엎어지기 직전, 형진은 손바닥으로 그녀의 머리를 받아 내었다. 몸이 나약해져 마음 또한 약해진 것일까? 평소라면 이리 쉽게 미약에 당하지 않았을 텐데, 왠지 씁쓸하기도 했다.
“몸이 약한 아내를 이리 객잔에 내버려 두다니 제정신이오? 몇 날 며칠을 밥도 안 먹고 울기만 하더이다. 지금이라도 돌아왔으니 다시는 허튼짓 말고 잘 보살피시오.”
주운을 도와주었던 객잔 주인의 말이 떠올랐다. 형진이 부군인 줄 안 모양인지 이것저것 그녀의 상태를 알려주었다. 운선의 만행에 억장이 무너져 내리면서도 형진은 끝까지 내색하지 않고 주인의 말을 묵묵히 들었더랬다.
“저를 원망할 테지요. 그러나 괜찮습니다.”
사내에게 버림받았으면서도 여전히 외사랑을 하는 그녀가 안쓰럽기도 하고 미련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가여운 이는 여전히 그녀에 대한 연모의 마음을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이었다.
‘깨어났을 때는 당신을 버린 사내를 보게 될 겁니다. 그러니 꼭 지켜보십시오. 나약한 당신 대신에 제가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드릴 테니까요.’
보드라운 주운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형진은 나직이 속삭였다.
조양은 적을 마주하면서도 좀처럼 눈을 뜨지 않았다. 되레 초조한 쪽은 운선이었다. 교활한 자이니, 함정을 숨겨둔 것이 분명했다.
“조양! 우영은 어디 있는가?”
“나도 모르지. 혹 안다 해도 순순히 알려 주겠나?”
한껏 비아냥거리는 태도가 밉살스러웠다. 그러나 이 속에 들어온 이상 우위를 점한 자는 어디까지나 공간의 주인이었다. 조양은 서두를 것도, 조급할 것도 없었다.
“쯧쯧, 어리석은 녀석. 조금도 성장하지 않았구나. 잠시나마 네 놈에게 아쉬움을 가졌던 게 부끄러울 지경이다.”
“…….”
운선은 대답 대신 주변을 쓱 훑어보았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보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껏 어두운 실내, 향을 피워 애써 억누른 피비린내, 그리고 자리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는 조양. 아까부터 들었던 묘한 이질감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움직이지 못하는구나.’
초조했던 마음이 일순 가라앉았다. 다쳤다고 해서 쉬운 상대는 아니었으나 자신이 훨씬 유리한 입장인 것은 사실이었다. 또한, 그는 우영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 했다. 즉, 적어도 숨은 붙어있다는 뜻일 터.
“이왕 이렇게 마주했으니 옛날이야기나 하자꾸나.”
한참을 빈정거리던 조양이 갑자기 다정스레 미소를 지었다. 보나 마나 좋은 의도는 아닐 테니 별로 호응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는 운선이 먼저 그의 시선을 피했다.
“우리가 담소를 나눌 사이였던가? 나는 철천지원수와 말을 섞을 만큼 아량이 넓지 못하다.”
당장이라도 놈의 숨통을 끊어놓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그의 최우선 과제는 우영이 숨긴 열쇠였으며, 그다음은 형제들의 안위였다. 다친 조양이 눈앞에 있는 절호의 기회를 포기하기 쉽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누이의 시신 앞에서 다시는 감정에 이끌려 무모하게 행동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기 때문이었다.
“창현은!”
조양은 돌아서는 운선의 등을 향해 일갈했다. 어느덧 부릅뜬 두 눈에는 비웃음이 잔뜩 담겨 있었다.
“너의 부친이자, 려국의 마지막 왕인 창현이 어찌 죽었는지 아느냐?”
“…….”
그의 오른팔이 덜덜 떨려왔다. 한때 잘라내야 할 정도로 썩어들어갔던 그 팔이었다. 이제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데에 전혀 지장이 없었으나 이렇게 가끔 극심한 경련이 찾아오고는 했다. 마치 그날의 기억을 되새김질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 솔직한 반응을 유심히 바라보던 조양은 다시 한번 승부수를 던졌다.
“그럼 아들 종현의 목숨까지 바쳐 너를 지켰던 스승 강율천은? 그를 죽인 진범이 누군지 아느냐?”
“이놈!”
운선은 결국 참지 못하고 한달음에 조양의 바로 앞까지 뛰쳐나갔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두 눈은 실핏줄이 모두 터져 토끼 눈처럼 새빨갰다.
“감히 스승님을 입에 올려?”
“설마 아직도 내가 죽였다고 생각하느냐? 쯧쯧, 어리석은 놈.”
“내 귀로 똑똑히 들었다. 수천, 수만 번 떠올리던 목소리를 어찌 잊었겠느냐?”
지금 운선의 마음은 해변의 모래와 같았다. 파도가 밀려 나간 후에 다잡은 마음이 더 큰 파도로 인해 다시 뒤집혔다. 지금 태을신공을 운용한다면 주화입마에 빠질 것이 분명했다. 바로 그것이 상대의 노림수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는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보다 존경하는 스승 강율천이 역린(逆鱗)이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날 그곳에서 율천에게 내상을 입힌 사람은 내가 맞다. 그리고 실낱같은 목숨줄을 완전히 끊어놓은 이는 흑접쌍살이었지. 그런데 말이다. 몹시 이상하지 않으냐?”
조양은 잠시 말을 끊고 운선의 깊은 두 눈을 응시했다. 이미 그의 왼손에 들린 수월이 자신의 목을 향해 달려들기 직전이었다. 문득 이 말을 듣고도 저 검을 날릴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율천의 마지막 부탁을 기억하느냐? 그는 분명 ‘해심밀경소’를 나에게 갖다주라고 했다. 그것도 반드시 네가 직접 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면서. 그 말인즉슨, 그가 두려워했던 대상은 내가 아니라는 뜻. 너 또한 내내 그 부분이 의아하지 않았더냐? 하여 나를 의심하면서도 수차례 떠보기만 했을 뿐, 삼 년이 넘도록 기다렸던 게 아니냐?”
“그건 네놈이 스승님을 속였기 때문이다. 돌아가시기 직전, 스승님은 너를 믿었던 것을 후회하셨다.”
운선은 거침없이 응수했으나 어쩐지 목소리에 자신이 없었다. 조양의 말처럼 그는 이 앞뒤가 맞지 않는 조각 때문에 끊임없이 고민해왔다. 스승님은 무언가 두려운 대상으로부터 경전을 지키려 했다. 조양에게 배신당한 순간에야 뒤늦게 눈치챘다 해도 어쨌든 처음에는 믿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운선을, ‘해심밀경소’를 해하려 한 자는 따로 있었다. 조양과 대적할 만한, 강율천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무서운 다른 적이.
“운선아, 맞다. 지금 네 머릿속에서 떠오른 그 답이 진실이다. 내가 강가장에 찾아갔을 때, 이미 율천은 중독된 상태였다. 지금의 나처럼 자리에서 일어날 수도 없었지. 굳이 내가 아니었더라도 하루를 버티기 힘들었다. 그 상태로 내 일 장을 받아내고, 좌영을 죽이기까지 했으니 참으로 대단한 실력이었지.”
조양은 마치 죽은 율천을 보고 있기라도 한 듯이 아련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한때는 진정 친형제처럼 생각한 적도 있었다. 마지막에 마음을 바꾸지 않았더라면, 아니 그 거만한 말을 내뱉지 않았더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리려 했을 것이다.
“율천은 경국의 황제와 거래를 했다. 너를 살리는 대가로 참 많은 것을 내어주었지. 그중 하나가 바로 ‘해심밀경소’였다.”
운선은 얼음 마냥, 같은 자세로 멈춰있었다. 조곤조곤 이야기를 이어가는 조양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귓속에서 윙윙 맴돌았다. 속이 느글거리고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쩌면 꿈을 꾸는 중인지도 몰랐다. 점점 정신이 아득해졌다.
“네가 열다섯이 되면 경전을 내어준다 약속하였다. 우리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율천의 의리에 대해서는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문제는 그 사실을 다른 이들이 알게 된 다음이었지. 그놈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자신을 존경하고 신뢰하던 아우를 꼬여내 극독을 먹였다. 그리고 율천이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때는 이미 온몸에 독이 퍼진 후였다. 더 지독한 건 그걸로도 모자라 자신이 스스로 파면한 제자에게 사면을 핑계로 뒤처리를 지시했다는 점이다. 참으로 고약하고 잔인한 자가 아니냐?”
“그 말은, 설마?”
운선의 붉은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주르륵 떨어졌다. 믿고 싶지 않지만 모든 정황이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그렇다면 우영을 여태 살려둔 이유도 다 이해가 되었다.
“그래, 네 스승 율천을 살해한 진짜 흉수는 바로 려국의 마지막 대사성, 검귀 성곤이다. 뿐인가? 그는 너의 아버지 창현의 목숨도 거둬갔지.”
자지러지듯 웃어 재끼는 조양 앞에서 운선은 그저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