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不入虎穴 不得虎子(불입호혈 불입호자)
은률과의 동행은 생각보다 훨씬 지루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늘 단답형이었고 그나마 무공에 대해서만 좀 더 길게 덧붙였다. 당연히 먼저 말을 걸어올 리가 없었다.
‘이러다 도착하기도 전에 지치겠어.’
결국, 가은은 대화를 줄이기로 마음먹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싫어하는 편이었으나 그렇다고 불편한 상대에게 억지로 비위를 맞출 만큼 인내심이 강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그를 꼬드겨 제 편으로 만들어 볼까 했던 음흉한 생각도 한층 옅어졌다.
반면 은률은 함께하는 시간이 지날수록 호감이 깊어졌다. 나이 차이가 꽤 나는데도 여전히 하대하지 못하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상처에 새 약을 발라줄 때마다 영원히 이 상처가 낫지 않기를 바라기도 하였다.
“추격대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났을 테지요. 흔적이 없으니 난감하군요. 여기서 어디로 갔을까요?”
세 갈래 길에 도착한 그들은 선뜻 길을 정하지 못해 난감해졌다. 기실 태봉 쪽으로 가는 길이 정석일 테지만 교활한 신교도들이라면 그리 뻔한 짓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저쪽 길은 폐허가 된 강가장이고 왼쪽 길은 두타산으로 가는 길이오. 어느 쪽으로 가도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곤란하니 어렵더라도 오른쪽 길로 가지 않았겠소?”
“음.”
물론 그의 말이 이치에 맞기는 하였다. 게다가 아군이 마중이라도 나오기로 했다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강운선이라면?”
실제로 그를 본 일은 고작 두 번에 불과했다. 그러나 매번 그의 놀라운 무공이, 뛰어난 지략이,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무엇보다 그가 자신의 숙부가 맞는다면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강가장이 폐허가 되었다지만 강운선에게는 익숙한 장소가 아닙니까? 어쩌면 숨을 수 있는 밀실이 있을지도 모르고요.”
“허나, 강가장에 가본 적 있는 선배들의 말에 따르면 장원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소박한 곳이라 들었소. 일하는 이까지 합쳐도 고작 다섯이 살았다는데 뭘 대단한 장소를 숨겨두었을까?”
“그렇다면 더욱 유리하지 않을까요? 대다수의 정파인들은 대협처럼 생각할 테니까요.”
은률은 동의할 수 없었으나 딱히 반박하여 가은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추격대보다 닷새는 늦었으니 어느 쪽을 선택하든 허탕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그때,
“이쪽으로.”
“네? 앗!”
은률은 다짜고짜 가은의 허리를 감아쥐고는 나무 위로 버쩍 뛰어올랐다. 급한 마음에 한 행동이었건만 정작 가느다란 허리가 팔 안으로 들어오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하마터면 나뭇가지를 헛디딜 뻔하였다.
“왜?”
“쉿!”
발그레한 은률의 얼굴에서 심각한 분위기를 읽은 가은은 금세 입을 다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 무리의 검객들이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저쪽 어귀에서 돌아 나오고 있었다.
“아니, 그렇다고 진정 두타산으로 갔을까?”
설이곡은 생명의 은인에게 차마 막말은 못 하는지라 한철에게만 들리도록 목소리를 낮췄다. 아무리 생각해도 애송이 도사가 헛소리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본인이 직접 보고 들었다 하지 않나? 어차피 태봉 쪽에서도 흔적이 없었으니 밑져야 본전이라 여기고 한 번 가보세.”
한철 역시 탐탁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서용을 무시하기도 뭣 했다. 그들 중에 유일하게 귀신놀음에 속지 않았으며 애초에 강가장 쪽을 의심했던 이도 그였다.
“아무튼, 이번 일은 철저히 입단속을 해야 하네. 어린애 농간에 놀아나 그 흉한 꼴을 당한 일이 세간에 알려지면 고개도 못 들고 다닐 걸세.”
“암, 여차하면 저 도사 놈을 죽여서라도.”
두 사람은 음흉한 눈짓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위기를 구해준 것은 고맙지만 그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보았으니 도저히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최소 혀라도 잘라내야 마음이 편해질 터였다.
먼저 동굴을 통과했던 일행과 다시 합류한 것은 서용의 도움으로 구멍을 벗어난 후에도 사흘이나 지난 뒤였다. 반대편 출구는 무려 한나절을 꼬박 걸어야 벗어날 정도로 깊고 좁았다. 앞서 통과한 무리는 다행히 실신 직전에 탈출하였으나 다시 돌아가려 하니 길을 찾기가 막막했다. 우여곡절 끝에 능선 하나를 넘은 뒤에야 한철 등과 재회한 것이었다. 하여 그들은 두 사람의 꼴불견을 보지 못했다.
“근데 저놈은 어디서 튀어나온 진상인가?”
“용문파에서 차출한 이들에게 은근슬쩍 물어보니 존재감이 아예 없는 녀석이더군. 어쩌다 우연히 상황이 맞아떨어진 게지. 다른 건 몰라도 운이 억세게 좋은 놈은 분명하네.”
“흥, 운은 무슨. 조금이라도 입을 나불거린다 싶으면, 가차 없이 베어버려야지.”
두 장문이 이런 음모를 꾸미는지 꿈에도 모른 채, 서용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지난 며칠 간의 일을 복기해 보아도 자기 생각이 확실히 정답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마음 한구석에서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강운선이 두타산으로 간 것은 맞겠지. 그런데 부상을 입은 교주와 적우는? 적을 속이려고 적진에 들어간다는 발상은 참신하나, 부상자를 끌고 가는 것은 너무 무모하다.’
하지만 강가장을 뒤져보지 않은 게 아니었다. 곳곳을 쑤시고 다녔음에도 어떤 의심 점도 발견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그 좁은 장소에는 숨을 만한 곳이라고는 없었다.
각기 다른 생각에 빠진 채로, 추격대는 두타산이 있는 길 쪽으로 접어들었다. 그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다음에야 두 사람은 나무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어째서 추격대가 다시 돌아오는 걸까요? 태봉까지 갔다 온 건 아닐 테고, 강운선이 두타산에 있다는 첩보는 또 어찌 들었을까요?”
가은이 연신 고개를 갸우뚱하며 중얼거렸다. 은률 역시 이상하다 느꼈으나 영특한 그녀도 모르는 답을 알 리 없었다. 그저 방금까지 안고 있던 여인의 허리 감촉을 잊으려 남몰래 팔을 주무를 뿐이었다.
‘정녕 두타산으로 갔단 말인가? 뭐, 등잔 밑이 어두울 수 있으니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수오당은 강운선이 수년 동안 머무른 곳이라 숨겨진 지름길을 알 수도 있지. 다만 심하게 부상을 입은 성곤과 적우까지 끌고 갔을까?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미끼가 되려고 하면 모를까.’
가은은 드디어 결심이 섰다. 다소 도박 같은 선택이지만 걸어볼 만도 했다.
“우리는 강가장으로 가죠.”
“뭐요?”
은률은 기가 막혀 멍하니 가은을 내려다보았다. 꽤 기지가 있는 여인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같아서는 영 무지해 보였다.
“방금 설문주의 말을 듣지 못했소? 강운선이 두타산으로 갔다고.”
“네, 들었지요. 강운선은 갔을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대협.”
가은은 똘망똘망한 눈을 들어 은률을 올려다보았다. 얼굴은 미소가 가득했지만, 마음에는 짜증이 차올랐다. 잘 모르겠으면 고집이나 피우지 말지, 참으로 피곤한 사람이었다. 이 단순하고 무식한 사내를 자신의 검으로 쓰려면 꽤 골치가 아프겠다 싶으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정말 원하시는 게 강운선입니까? 아니면 태을신교입니까?”
“성곤이오.”
은률은 소처럼 눈을 끔뻑끔뻑하면서도 본능적으로 대답했다. 스무 해가 넘는 동안 오직 그에 대한 복수심으로 살아왔기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럼 강가장으로 가야 합니다. 성곤은 바로 그곳에 있을 테니까요.”
두타공파의 수오당은 십 년 전과 변한 것이 없었다. 오래된 소나무들이 점잖게 뿌리를 내렸으며 그 사이로 단아한 전각이 드문드문 자리를 잡았다.
운선은 울컥 치솟는 감정을 애써 누르며 연무장 쪽으로 이동했다. 그 안쪽에 위치한 장문 처소가 목적지였으나 자신도 모르게 연무장으로 시선이 갔다. 장명등 대신 수 개의 횃불로 밝힌 그곳엔 밤 수련이 한창이었다. 소박한 연무복을 입은 수십의 제자들이 일제히 같은 초식을 구현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문즉병 불문즉약(聞則病 不聞則藥)이라더니, 과연 그러하구나.’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에는 그저 단순해서 좋았다. 그의 고민은 오직 스승의 복수였다. 어떻게든 무공을 배워 흑접쌍살을 무너뜨리겠다는 집념이 그를 살게 했다. 그러나 지금, 역설적이게도 그 원수를 구하려 하고 있었다. 이제 무엇이 선인지도, 대의인지도 몰랐다. 그저 눈앞에 당면한 과제를 수행하는 것. 그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쉬익!
안뜰에 다다른 운선은 가볍게 몸을 날려 지붕 위로 올랐다. 장문의 처소라고는 하나, 평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런 검소함이 강호인들이 조양을 숭배하는 이유 중 하나임을 모르지 않았다. 한때는 그 역시 존경해 마지않았으므로.
“퉷!”
운선은 순간 역겨운 마음이 들어 묽은 침을 뱉어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에게 속았던 지난날에 대한 수치스러움이 감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칼로 도려내고 싶은 과거였다.
‘우영을 숨겼다면 필시 본인만이 드나들 수 있는 장소일 테지. 허면 폐관 수련을 하는 곳.’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운선은 한달음에 지붕을 두어 개 더 건너뛰었다. 오늘따라 구름에 달이 가려 캄캄했다. 날이 너무 어두워지기 전에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수오당 안은 마치 미로와 같아 한낮에도 길을 잃어버리기에 십상이었다.
“턱!”
내내 지붕 위를 건너다녔던 운선은 숲이 우거진 샛길에 이르러서야 땅으로 내려왔다. 장문 처소에서도 한참을 깊이 들어간 지점이었다. 더 건너뛸 지붕이 없기도 했지만, 어렴풋이 떠오른 기억 덕분이었다.
‘여기다.’
수풀에 가려져 거의 보이지 않는 사이에, 나무로 설키게 만든 쪽문이 나타났다. 길도 아닌 산등성이로 뻗은 출입구였다. 처음 와 본 이들이야 수오당의 개구멍 정도로 여기겠지만 운선은 이 문이 어디로 통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잔뜩 신경을 곤두세웠다. 교활한 조양이 혹여 함정이라도 놓았을까 조심하면서. 그리고 드디어 익숙한 목적지에 다다랐다.
“후우우.”
촌부나 살 것 같은 허름한 초옥, 낮은 울타리에는 경계심이라고는 전연 없었다. 일종의 자신감일까? 알고도 감히 들어가지 못하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오히려 이런 허술함이 운선에게는 더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그에게는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삐걱.
떨리는 손을 들어 문고리를 잡아 밀었다. 꽤 부드럽게 밀린 편이었으나 침입자인 운선의 귀에는 지나치게 요란스러운 소리였다. 주인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들키고 싶지 않은 본능이었다.
“안에 계십니까?”
운선은 부러 나지막한 소리로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 만약 조양이 돌아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아니, 차라리 마주치기를 바라는 심정이었다. 이 처절한 괴로움을 누군가에게 풀어내야 한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대상은 한 사람이니까.
“조양?”
퀴퀴한 먼지, 역한 냄새는 중요치 않았다. 운선은 자신의 정면에 앉은 검은 인영과 마주했다. 막상 대면하고 보니 두려움보다는 반가움이었다. 이참에 모든 일을 마무리 짓고 싶은 충동까지 드는 것이었다.
“왔구나. 기다리고 있었다.”
“우영은 어디 있나?”
운선의 첫 질문에 조양은 실소를 터뜨렸다. 적진의 한가운데 잠입한 주제에 당당히 요구하다니, 건방지기도 했고 무모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크게 든 마음은 아쉬움이었다. 한때는 진심으로 아끼는 제자라고 착각한 적도 있었다. 아주 기이한 인연.
“그래도 우리가 보통 인연이 아닌데 예의를 지키게. 한때는 내 자네의 의백이 아니었는가?”
“허.”
운선은 기가 막혀 코웃음이 다 나왔다. 정말이지 뻔뻔하고 양심이 없는 인간이었다.
*** 불입호혈 부득호자(不入虎穴 不得虎子):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고는 호랑이 새끼를 잡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