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115화 (115/209)

115화. 同氣相求(동기상구)

서용은 본격적으로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의식이 없는 중에도 간간이 들린 소리를 조합해 보면 꽤 중요한 사실을 알아낼 수 있을 듯싶었다.

“쉬지 않고 움직이면 사흘, 늦어도 나흘 안에 도착합니다.”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의 주인은 분명 강운선이었다. 위치가 노출된 이상 강가장에 머물 리는 없었다. 당장 멀리까지 움직일 수 없는 그들이라면 다음 목적지는 가까운 곳일 터였다. 또한, 추격대가 좀처럼 예측하기 어려운 장소일 가능성이 컸다.

‘이곳에서 사나흘 안에 도착할 수 있다?’

서용은 주변에 널브러진 나뭇가지를 주워 흙바닥에 대충 지도를 그렸다. 서쪽으로 이백리에 용문산, 동쪽으로 삼백 리에 두타산, 북쪽으로 오백 리에 고대산이 있었다.

‘용문산으로 되돌아갈 리는 없다. 그렇다면 설마 두타산?’

아무리 등잔 밑이 어둡다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적진으로 들어가는 무리수를 둘 이유가 있을까? 서용은 어쩐지 석연치 않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예상이 가장 맞아떨어졌다.

“뭔가 놓친 게 있을지도 몰라.”

부싯돌을 꺼내 불을 붙인 서용은 조심스레 강가장 내부를 살폈다. 불과 한나절 전에 사람이 북적거렸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먼지가 가득했다. 이곳저곳 부서지고 깨진 가구와 집기들을 보고 있자니 온몸의 털이 바짝 서는 느낌이었다.

“어?”

부스럭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발에 밟혔다. 불을 가져와 비추니 신경질적으로 구겨버린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주워들었다.

“콩(豆)의 우두머리(頁)가 사는 고을(邑)의 집(宀)에는 수저(匕)가 몇 개(几个)인가?”

수수께끼와도 같은 글자의 나열에 서용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분명 그들끼리 사용한 은어임이 분명한데, 도통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설마 파자(破字)?’

불필요한 글자들을 다 빼고 의미가 있는 것들만 추린 후, 다시 모아 보니 그제야 덩그러니 두 글자가 떠올랐다.

“두타(頭陀)!”

추측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파자에 숨은 의미는 정확히 두타산이었다. 당장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운선 일행의 다음 목적지는 두타산이 확실했다. 혹, 두타공파에도 신교의 첩자가 숨어들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지금쯤 추격대가 길을 돌아 이쪽으로 오고 있을 것이다. 당장 하산하여 두타산으로 진로를 바꾸게 해야겠다.’

서용은 주섬주섬 본인의 행장을 챙겨 어깨에 둘러멨다. 서둘러 움직이면 동료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 이번에야말로 실수하지 않겠다 다짐하며 그는 재빠르게 강가장 현문 밖을 나섰다.

일행과 헤어진 동굴까지는 쉬지 않고 걸어도 꼬박 하루가 걸렸다. 그 기괴한 소년이 귀신 소동을 일으킨 샛길을 지나니 머지않아 동굴이 큰 입을 드러냈다. 그 앞에는 찬영이 피우던 모닥불도 아직 그대로 있었다.

“한문주님? 설문주님?”

캄캄한 내부는 아침인데도 선뜻 들어가기 어려웠다. 정작 찬영이 귀신 소동을 벌였을 때는 전혀 공포를 느끼지 못했던 서용이었으나, 오히려 지금은 꺼림칙했다.

“저기요, 누구 있어요?”

서용은 입구에서만 서성대며 목청껏 소리쳤다. 가능하다면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때,

“여기, 사람 있소. 살려주시오.”

“어?”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니 분명 동굴 안에서 나는 소리였다. 아무리 겁이 난다 해도 이제 아니 들어가 볼 수 없게 되었다.

팍!

덜덜 떨리는 손으로 횃불을 만든 서용은 조심스레 동굴 안으로 한 발자국 들어섰다. 축축하고 서늘한 기운 때문인지 소름이 쪽 끼쳤다. 그 음산한 분위기 속에서도 여전히 가느다란 목소리가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살려주시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소리를 따라 서용은 좀 더 용기를 내었다. 넓은 입구와 달리 깊숙이 들어갈수록 통로가 좁아졌다. 연기를 피해 여기까지 몰렸다면 다들 공황 상태에 빠졌으리라. 새삼 윤찬영의 기행이 괘씸해졌다.

툭.

“어라?”

어둠 때문에 아래를 보지 못했던 서용은 푹신한 무언가를 밟고 하마터면 크게 넘어질 뻔하였다. 비틀거리다 겨우 중심을 잡은 다음 횃불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으악!”

이미 싸늘하게 식은 시체가 무려 대여섯 구나 널브러져 있었다. 걔 중에는 용문파에서 수년이나 한솥밥을 먹었던 동기도 보였다.

‘연기에 질식했구나.’

막상 시체를 보고 나니, 되레 공포심은 사라졌다. 미지의 귀신 따위는 실제의 죽음 앞에서 아무 힘이 없었다. 그리고,

“거기 누구요? 혹 우리 일행인가?”

익숙한 목소리를 따라 들어가자 아니나 다를까, 그토록 찾아 헤맨 한철의 해쓱해진 얼굴이 보였다. 그 옆에는 몸뚱어리가 구멍에 끼어 엉덩이 아랫부분만 보이는 설이곡도.

“한문주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아아, 용문파 형제로군. 참으로 잘 되었어.”

호들갑을 떠는 한철을 유심히 바라보니 참으로 가관이었다. 한 손이 설이곡의 배 아래 꽉 끼어서 옴짝달싹 못 하고 있던 것이었다.

“이제 살았다. 이제 살았어.”

구멍 바깥쪽에서 멀리 들려오는 설이곡의 목소리와 함께 그의 튼실한 엉덩이가 덩달아 실룩거렸다. 이 웃지도 울지도 못할 상황을 바라보며 서용은 왠지 모를 부끄러움을 느꼈다.

두타산 어귀에 다다랐을 때, 조양은 드디어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나날이 병세가 깊어지는 것도 짜증 나는데 내내 뒤따라오며 심기를 건드리니 그럴 만도 하였다. 결국, 그는 마차를 세웠다.

“고대협, 그만 나오시지요. 모른 체하기도 어렵습니다.”

“허허. 이것 참, 머쓱하군요.”

풀숲에서 고개를 쑥 내민 이는 예상대로 고유생이었다. 그 역시 들킬 줄 알았던 터라 당황스러운 기색이라고는 없었다. 사실 하루 전부터는 아예 기척을 숨기지도 않았다. 생각해 보면, 굳이 정체를 감출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장문주의 의도입니까?”

“일부는 그렇습니다만, 우리 사이에 숨길 게 뭐가 있겠습니까?”

고유생은 얼굴 가득 친절한 미소를 띠고 조양에게 다가갔다. 안색이 파리하고 눈 밑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양이 상태가 퍽 나빠 보였다.

‘장은, 그 뱀 같은 놈이 나를 감시하라고 고유생을 보냈구나.’

부아가 치밀어 올랐지만. 지금으로서는 참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사실 그의 상태는 꽤 심각했다. 제대로 치료하지 못한다면 저승 문턱을 밟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전에 우영 그놈을 족쳐서 숨기고 있는 사실을 토하게 해야 한다. 허나 내 몸이 버틸 수 있을까?’

옆에서 온갖 감언이설을 뱉고 있는 고유생을 보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저 늙은이를 따돌리기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괜찮은 미끼를 던져 내 편으로 만드는 게 더 유리할 것 같았다.

“고대협, 실은 경전의 비밀은 이미 밝혀내었습니다.”

“역시.”

“다만 그곳을 들어가려면 또 다른 관문이 있더군요.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도움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우리가 함께한 세월이 있는데 당연히 도와야지요. 암요.”

교활한 웃음을 흘리며 고유생은 조양 쪽으로 잔뜩 몸을 수그렸다. 그는 황석파의 제자 이전에 한 사람의 무인이었다. 일류 고수가 되고픈 꿈과 천하를 호령할 권력의 욕망이 왜 없겠는가? 장은이든 조양이든 그에게 더 유리한 편에 서서 이익을 취할 작정이었다.

“보시다시피 저는 당분간 치료에 전념해야 합니다. 하여 염치 불고 하고 제 곁에 있어 달라고 청해도 되겠습니까?”

‘흥, 나보고 자신을 보호하라는 거군. 네 놈이 무슨 꼼수를 부리는지 볼 수 있으니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지.’

평소라면 자존심이 심히 상할 제안이었으나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달랐다. 오히려 더 쉽게 감시할 수 있으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맡겨만 주십시오. 대신 저에게도 비밀을 공유하는 겁니다?”

“물론이지요. 사실 장문주는 음흉하여 일을 도모하기 어려웠지요. 우리는 오랜 친구이니 서로를 거울 보듯 들여다보지 않습니까?”

말을 하는 조양도 듣는 유생도 코웃음을 칠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세상 둘도 없는 지기인 양, 서로를 향해 신뢰의 미소를 보냈다

.

수오당까지 꼬박 하루가 더 걸렸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조양의 병세는 더 심각해졌다. 아침부터 유달리 숨이 차더니, 현문 앞에 다다랐을 때는 거의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마중 나온 제자들을 다 뿌리치고 내당으로 내달렸다.

“조맹주, 좀 쉬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보다 급한 일이 있지요.”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조양의 모습은 무척 안쓰러웠다. 오죽하면 고유생조차도 그에 대한 적대감을 잊을 정도였다. 그러나 조양은 다급하기만 했다.

‘시간이 없다. 이러다 내가 죽든 그놈이 죽든, 누구 하나 사달이 난다면 다시 기회를 잡기 어려울 것이다.’

다리가 후들거려 지팡이를 들어야만 움직일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은 다 물리치고 오직 고유생의 부축을 받아 목적지로 향했다. 평소 그가 폐관 수련을 하는 수오당 구석의 밀실이었다.

“으윽.”

문을 열자마자 참을 수 없이 역한 냄새가 코를 후볐다. 지린내와 피비린내가 섞여 극심한 불쾌감을 주었다.

“여기에 도대체 뭐가?”

두 손가락으로 집게를 만들어 코를 감아쥔 고유생이 코맹맹이 소리로 웅얼거렸다. 웬만큼 비위가 강한 사람도 일각을 버티기 힘든 고통이었다. 그러나 조양은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고 그 끔찍한 공간으로 성큼 들어섰다.

‘살아있다. 살아있어야 한다.’

밀실 안에는 변변한 가구조차 없었다. 그에 비해 공간은 또 너무 커서 작은 소리로 말해도 메아리처럼 웽웽 울렸다. 그 기묘한 분위기에 압도당한 고유생은 장승처럼 입구에 서서 다급하게 이곳저곳을 뒤지는 조양의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제기랄. 도망쳤구나.’

우영이 사라졌다. 조양은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체를 못 쓰는 그가 어떤 방법으로 이 폐쇄된 공간을 벗어났는지 기가 막힐 뿐이었다.

“누굴 찾는 겁니까?”

보다 못한 고유생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망연자실한 표정의 조양을 보니 심각한 상황인 듯한데, 자신에게도 좋지 않은 소식인 것 같았다.

“고대협, 부탁이 있습니다.”

“무슨?”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한 그는 아군인지 적군인지도 모를 고유생에게 의지하기로 마음먹었다.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으나 그에게는 최선의 대안이었다.

“제 예측이 맞는다면 곧 강운선이 찾아올 겁니다.”

“네? 어째서?”

고유생의 질문을 무시한 채, 조양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제 자신의 안위는 중요치 않았다. 그에게 남은 임무는 오직 강운선을 해결하는 것. 강운선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야만 경국의 미래가 있었다.

“그가 나와 만날 때까지는 기다리셨다가, 이야기를 마치거든 사로잡아 주십시오. 아니, 죽여도 좋습니다.”

*** 동기상구(同氣相求):

같은 소리끼리는 서로 응하여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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