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好餌(호이)
찬영은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살짝 몸을 젖혔다. 당황한 서용이 그의 일신을 놓친 틈에 어느새 등 뒤로 돌아가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도사님, 이런 실력으로 설마 저와 겨루시려던 건 아니죠?”
“어? 어?”
서용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으나 그나마도 찬영의 발에 무릎이 굽혀진 다음이었다. 무기력하게 바닥에 엎어진 채로 사지가 묶이니 한순간에 전세가 역전되었다.
“아직 실력이 미천한 저에게도 이리 쉽게 당하시니, 안타깝군요.”
“이…이…….”
욕지기가 나올 참이었으나 서용은 차마 입 밖으로 뱉지 못했다. 자신을 번쩍 들어 수레 위에 털썩 올려두는 찬영의 행동에 무기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왕 이리된 거, 같이 가시죠.”
“어, 어디로 말입니까?”
“가보면 압니다.”
다시 나귀를 재촉하는 찬영의 몸짓은 한껏 여유로웠다. 방금 기습을 당한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스스로가 미천한 실력이라 하였지만 분명 탄탄한 무공을 갖추고 있으리라 짐작되었다. 자신보다 한두 살은 족히 어려 보이는 그에게 서용은 묘한 질투심을 느꼈다.
‘이 좋은 기회를 날려 버리다니, 구제 불능이구나.’
애초에 귀신 소동이 있을 때, 오직 그만이 당황하지 않고 무리에서 자연스레 이탈하였다.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는 선배 협객들의 등 뒤에서 씁쓸한 한숨을 내쉬었더랬다.
‘귀신은커녕 고작 당나귀에 매어놓은 허수아비거늘.’
수풀에 몸을 숨긴 그의 앞으로 당나귀 두 마리가 통통거리며 지나쳤다. 연신 기괴한 웃음을 흘리며 뒤따르는 이는 고작 열댓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동태를 살피다가 일행이 위험에 처하면 구해야겠다.’
그러나 한철과 설이곡이 연달아 암기에 당하자 차마 앞으로 나설 수 없었다. 게다가 연기만 피울 뿐 딱히 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죽이려는 의도로 보이지는 않았다. 하여 가장 긴장이 풀어질 때를 노려 기습을 감행한 것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동굴 앞에서 싸워 볼 것을. 괜히 인질로 잡혀 동료들에게 짐만 되었구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스멀스멀 자괴감이 올라왔다. 가슴에 돌덩이가 내려앉은 기분이 들더니 이윽고 체증이 느껴졌다. 그 이유가 수치심 때문인지 흔들리는 수레 탓에 올라온 멀미인지 알 수 없었다.
“여어, 다 왔습니다요.”
찬영은 너스레를 떨며 낚싯대로 서용의 엉덩이를 쿡쿡 찔렀다. 불쾌해도 피할 수 없으니 치욕스러워 얼굴이 시뻘게졌다.
“여기가 어딥니까?”
“어딘지 아시면 제게 고맙다 하실걸요? 으쌰.”
찬영이 당나귀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그들은 한껏 지친 울음을 내지르면서 가파른 고갯길을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모, 저예요. 찬영이 왔어요.”
“고모?”
끼이익!
서용이 의아한 생각에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을 때였다. 다 쓰러져가는 현문이 요란스러운 소음을 내며 앞뒤로 열렸다. 뒤이어 맑은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꼭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익숙한 목소리였다.
“설마, 너 찬영이냐?”
“이 녀석!”
“제가 늦지 않게 온 모양이군요.”
기가 막힌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설이와 진건의 앞에 찬영은 넙죽 무릎을 꿇었다. 자신이 벌인 일에 대해 후회는 없었으나 미안한 마음 또한 갖고 있었다. 신교를 위기에 빠뜨릴 의도가 전혀 아니었기에 그에게도 일련의 사건들은 충격이었다.
“식량과 무기를 구해왔어요. 그놈들에게 뜯은 재물로 얻었으니 염려 마세요.”
“일단 들어가자.”
찬영에 대한 노여움이 풀리지는 않았으나 그가 가져온 물품까지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도리와 대의를 논하기에는 그들의 신세가 퍽 위급했다.
“그런데 이 도사는 누구?”
뒤늦게 서용을 발견한 설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보아하니 용문파의 도사인 듯한데 어째서 찬영의 수레 위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어요. 인질의 가치는 없어 보이지만 그렇다고 버리고 오면 꽤 귀찮아질 듯하여 데려왔어요. 추격대 무리가 모두 태봉을 향하는데 유일하게 강가장을 의심하더군요. 무공은 형편없어도 사리 분별력은 있는 것 같아요.”
“흐음.”
그다지 찬영의 의도가 공감 가지는 않았으나 일단 두고 보기로 마음먹었다. 당장은 쓸모가 없을지 몰라도 위급한 이 상황에서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서용을 수레에서 내린 후 운선에게 데려갔다.
“윤찬영이라 하였습니까?”
운선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찬영을 훑어보았다. 설이의 이야기 속에서는 꽤 연약한 소년이었는데 직접 보니 장난기 가득한 청년이었다.
“제가 지은 죄가 있어 도우러 왔어요. 다만 사과할 마음은 없습니다. 또한, 돕는 것도 딱 여기까지입니다.”
“같은 려국인이지 않니?”
매정하게 선을 긋는 찬영이 안타까워 설이가 먼저 나섰다. 어찌 보면 설이에게 찬영은 제자와 같았다. 아무리 큰 잘못을 했을지언정 쉬이 내칠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다. 하여, 자신이 그를 아끼는 만큼 운선에게 잘 보였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나라는 제게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자유로운 나그네로 살고 싶어요. 빚은 얼추 갚았으니 떠나도 되겠습니까?”
아까까지도 웃음기 가득하던 그의 얼굴이 일시에 굳어졌다. 감정이 투명하게 내비치는 점이 그의 가장 큰 단점이었다.
“가려거든 등에 멘 비월을 내려놓고 가세요.”
“네?”
운선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기껏해야 자신을 꾸짖거나 도망 못 가도록 잡을 줄 알았던 터라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거만한 오대산검 놈에게 뺏은 검이 비월이라는 것도 이때서야 처음 알았다.
“어찌 얻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비월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검이 아닙니다.”
찬영은 은근히 자신을 깎아내리는 운선에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신교의 교주 성곤도 무섭지 않은 그였다. 하물며 기껏해야 열 살 정도 더 먹은 사내가 비아냥거리니 고깝기만 했다.
“제가 아무나란 말입니까?”
“비월은 고수의 반열에 들 정도의 무공을 익힌 자이거나 그에 상응하는 인품을 지닌 자만이 가질 자격이 있지요. 본 주인인 부능파나 그의 사형 팔마 마세풍 정도는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이 중에 어디에 해당합니까?”
“나는, 나는…….”
찬영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차마 대꾸하지 못했다. 눈치를 보니 설이 역시 저치의 말에 동의하는 것 같았다.
“혹, 비월을 제대로 배운다면 모를까? 그럼.”
찬영이 피할 새도 없었다. 싸늘한 날씨가 무색하게 따뜻한 미풍이 그의 얼굴에 불어닥쳤다. 재빨리 뒷걸음질 치며 팔로 가슴을 막았으나 속수무책으로 파고드는 바람을 피할 방도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몸을 비틀어 가슴을 보호했다. 그러자 등으로 느끼고 있던 묵직한 무게감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런.’
찬영은 등 뒤를 스치고 돌아가는 그림자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이서문의 점혈 수법을 복사한 초식이었다. 비록 설이의 입을 통해 익혔으나 꽤 빠르고 정확한 손놀림이었다.
“설이가 너무 후하게 평가했군요.”
“어?”
분명 팔에 손가락이 닿았건만, 운선은 이미 제자리로 돌아간 뒤였다. 비월 역시 그의 왼손에 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설픈 실력으로 과신하다가는 언젠가 큰코다칠 겁니다. 비월을 갖고 싶다면 오직 실력으로 뺏어 보세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식식거리는 찬영을 마당 한가운데 버려둔 채, 운선은 진건과 설이를 불러냈다. 앞으로의 일을 당부하기 위함이었다.
“저 아이가 데려온 이는 용문파의 도사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태봉으로 가지 않았음을 눈치챈 것이겠지요. 이대로 있다가는 모두가 당합니다.”
“그럼 어찌해야겠느냐?”
진건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아직 성곤과 적우의 상태가 좋지 못했다. 또다시 무리하게 이동하다가 상처가 덧날까 심히 걱정되었다.
“사백님과 사형, 그리고 중상을 입은 몇을 제외한 교도들은 지금 당장 태봉으로 떠나야 합니다. 나머지도 사나흘 안에는 출발해야 하고요. 다행히 찬영이 식량과 무기를 구해왔으니 남은 인원은 이곳에서 당분간 버틸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오라버니, 할아버지는 적어도 보름은 지나야 거동할 수 있습니다. 그 전에 추격대가 따라붙으면 어쩌지요?”
설이의 고민은 당연했다. 강가장이 주변 산세에 묻혀있어 찾아내기 쉽지 않더라도 언제까지고 버틸 수는 없었다. 밀실에 숨는다고 해도 샅샅이 뒤진다면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제가 추격대를 유인하겠습니다.”
“운선아?”
“오라버니!”
운선은 사형제들을 바라보며 지그시 미소를 지었다. 누구보다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남은 사람들을 지키고 싶었다.
“어차피 우영을 찾아야 합니다. 그는 두타공파에 있으니 그쪽으로 유인한다면 강가장에는 차마 눈길을 돌리지 않을 겁니다.”
“혼자서는 위험하다. 내가 함께 간다.”
“아닙니다. 사형은 이곳을 지키셔야지요. 만약 일이 어그러진다면 설이는 어찌합니까?”
“오라버니.”
운선은 차분하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어차피 그들의 목표는 경전이었다. 망하기 직전의 태을신교보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해심밀경소를 쫓을 것이 뻔했다. 이 미끼를 잘 이용한다면 형제들의 목숨은 충분히 구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설아, 찬영은 아주 뛰어난 아이 같구나. 다만 재물과 명예욕이 지나치니 잘 가르치렴. 진건 사형, 비월을 가지고 있으세요. 그걸 뺏기 위해서라도 쉬이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지금은 찬영조차도 귀한 아군이 될 테니 내치지 마시고 잘 이용하십시오.”
“알았다.”
진건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운선을 혼자 보내는 마음이 영 내키지 않았으나 다른 방도가 없었다. 지금은 사부와 사제들을 지키는 일이 그의 최우선이므로 거기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저 도사는 어쩌시려고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소매로 훔치며 윤설이 물었다. 어쨌든 적을 인질로 잡아 왔으니 결정을 내려야 할 터였다.
“보내주지요.”
“하지만.”
운선은 말을 마치자마자 마당으로 다시 나아갔다. 심술궂은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은 찬영과 그 옆에 밧줄에 꽁꽁 묶여 의기소침하게 서 있는 서용이 보였다.
“도사님, 부탁이 있습니다.”
“네?”
그 유명한 강운선을 대면한 것만으로도 당황스러운데 그가 말을 거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부탁이라니? 자신은 인질이 아니던가?
“도사님을 풀어드릴 테니 이 길로 돌아가십시오. 대신 이곳에서 듣고 본 일은 아무에게도 전하지 말아 주십시오. 만약 약속을 어긴다면 또다시 저를 만나게 되실 겁니다.”
“네?”
그것이 기억의 끝이었다. 서용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깜깜한 밤이었다. 방금까지도 주변에 있던 태을신교의 사람들은 사라지고 오직 그 혼자만이 강가장 마당 한가운데 덩그러니 버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