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一魚濁水(일어탁수)
기괴한 무언가를 피해 다다른 곳은 더 깊은 숲이었다. 마치 안내라도 받은 듯, 그들은 고개 하나를 넘고 외길에 접어들었다. 온몸이 땀으로 뒤덮여서인지 머릿속도 축축해져 이성적인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저 공포에 질려 도망만이 목적이 되었다.
“어? 막다른 길입니다.” “저 통로는 무엇이냐?”
“동굴 같은데요?”
제일 먼저 뛰쳐나온 설이곡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에는 커다란 아가리 같은 동굴이, 뒤에는 정체 모를 요괴가 쫓아오니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으아아악”
“우선은 들어가자.”
연달아 들려오는 비명에 더는 망설일 수 없었다. 설이곡은 횃불을 든 제자를 앞장세워 천천히 동굴 속으로 발을 옮겼다.
“어?”
예상과 달리 동굴 내부는 깊고 아늑했다. 천장이 낮았으나 그렇다고 허리를 굽힐 정도는 아니었다. 동굴인지라 당연히 습했지만 서늘한 기운 때문인지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피난처로는 제격이었다.
“불을 더 들어라. 또한, 뒤에 오는 동료들이 엉켜서 다치지 않도록 공간을 마련해라.”
그제야 정신이 든 설이곡은 재빨리 지시를 내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 지시를 이행하기도 전에 또 다른 한 무리가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다 합하여 보니 얼추 사십여 명쯤 되는 듯 보였다.
“나머지는?”
설이곡은 거친 숨을 몰아쉬는 한철의 옆으로 다가갔다. 미처 말을 타지 못한 이들은 낙오된 듯싶었다. 무리의 수장으로서 수치스러움을 느낀 한철은 차마 대답도 못 하고 고개를 떨궜다.
“도대체 뭐였을까요? 아직도 따라옵니까?”
“글쎄,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습니다.”
서서히 공포심에서 벗어난 협객들은 저마다의 추측을 늘어놓으며 웅성거렸다.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웠지만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니 퍽 불편하였다.
“일이 우습게 되었으나 엎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차라리 잘 되었습니다. 다행히 이곳은 우리가 잠시 쉬었다 가기에 안성맞춤이니 찬 이슬이나 피합시다.”
한철은 민망한 마음을 감추며 동료들을 격려했다. 기실 무리의 우두머리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움츠러들 수는 없었다. 어쨌든 태을신교를 찾기만 하면 만회할 기회가 생기니 그때까지만 뻔뻔해지자 하는 마음이었다.
“우리가 피곤하여 단체로 헛것을 보았으니 너무 무안해하지 말게.”
설이곡이 한철의 어깨를 툭툭 치며 예의 간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누구보다 가장 먼저 튀어놓고도 발을 빼는 모습이 영락없는 소인배였다. 한철은 새삼 그에게 실망하여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들 눈 좀 붙입시다.”
앉은 채로 곯아떨어지는 사람, 육포를 꺼내 씹는 사람, 더러워진 옷가지를 갈아입는 사람 등 동굴 안은 분주했다. 쫓아온 그것이 무엇이든,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근방에 사는 산지기의 흔적인지, 깊은 숲을 드나드는 무당의 제웅인지 알 바 아니었다. 포근한 동굴 안에서 이 어둠만 보내고 나면 다 과거지사였다. 그러나,
“킁킁, 이게 무슨 냄새지?”
“콜록!”
“으윽.”
처음에는 냄새에서 시작했다. 그러다가 매캐한 연기가 자욱하게 동굴 속을 채워갔다. 모두 소매로 코와 입을 막았으나 어림없었다.
“일단 나갑시다!”
이러다가 모두 질식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철은 앞장서서 동굴 입구로 다가갔다. 거의 다다랐을 때에서야 붉은 불꽃이 어른거리는 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누구냐?”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불을 피워 동굴 안으로 연기를 들여보내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뿐인가? 연기의 양이 들쑥날쑥하면서도 부자연스럽게 많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부채질을 하는 듯했다. 대단히 정성스러운 골탕이었다.
“누구냐? 우리가 누군 줄 알고 감히! 콜록”
한철은 일단 으름장을 놓고 보았다. 적의 정체도 규모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작정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너구리잡이가 아주 재미있구나.”
“뭐?”
의외의 앳된 목소리에 한철은 어리둥절하여 말문이 막혔다. 명문정파의 호걸들을 단번에 잡아버린 이가 고작 소년이라고? 기가 막히는 한편 참을 수 없이 약이 올랐다.
“네 이놈!”
보법을 사용하여 대여섯 걸음을 내딛자, 단숨에 입구까지 다다랐다. 뿌연 연기가 시야를 가로막았으나 검날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일렁이는 불꽃 사이로 언뜻 보이는 소년의 머리와는 이제 딱 한 뼘 거리였다.
챙!
“앗!”
찌릿한 진동에 한철은 하마터면 검을 떨어뜨릴 뻔하였다. 맑은 타격음을 내며 그의 칼날에 부딪힌 그것은 다름 아닌 은자 한 냥이었다. 제법 무른 성질 탓에 검에 잘려야 정상이었겠지만 은자는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너…, 너!”
무기력하게 한철이 뒤로 물러서자 이번에는 설이곡이 검을 휘둘렀다. 사마귀의 일격을 기원으로 하는 이 초식은 좁은 공간에서 적에게 기습할 때 유효한 무공이었다. 폭이 좁은 검신은 바르르 떨면서 목표를 향해 휘감겨 들어갔다. 그러나,
챙!
“으악!”
설이곡도 다를 바 없었다. 심지어 그는 소년의 암기 아닌 암기를 피하지 못하고 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팔이 온통 저릿저릿하여 다시 검을 쥐어 드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아까운 은자만 날렸구나.”
두 고수를 상대하면서도 소년의 부채질은 쉴 줄을 몰랐다. 아무리 위치적으로 우위를 점한 상황이라지만 그의 기이한 무공은 놀라울 따름이었다.
“여럿이 덤빈다 해도 좁은 입구를 통과할 수 있는 인원은 고작 한둘입니다. 저놈이 암기 몇 개만 던져도 뚫고 나가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더구나 다들 연기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니…….”
“저놈이 저리 버티고 있는 한, 이 안에 있는 모두는 질식사를 피할 수 없습니다.”
“이제 어쩝니까?”
제(諸) 문파의 고수들은 각자의 호흡기를 막은 채로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이대로 죽는 게 너무 억울하고 수치스러웠지만 좀처럼 다른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인육이 가장 맛있다는데 연기로 구운 살코기는 얼마나 진미겠느냐?”
안의 상황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년은 휘파람을 불었다. 불꽃이 조금이라도 작아지면 땔감을 넣어 크기를 키우니 차가운 밤공기에도 주변만큼은 열기로 가득했다.
“한문주님! 이쪽에 통로가 있는 듯합니다.”
금정방의 제자들 셋이 은밀히 한철을 불렀다. 연기를 피하려고 안쪽으로 이동하던 중에 작은 구멍을 발견했다는 보고였다. 안쪽에서 언뜻 바람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또 다른 출구가 있음이 분명했다.
‘질식사보다 나쁠 게 무엇이 있겠는가?’
한철은 설이곡과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은 후, 드디어 결정을 내렸다. 다만 만약을 대비하여 자신과 설이곡은 맨 뒤에 서서 일의 추이를 살피기로 했다.
“안쪽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먼저 통로를 빠져나간 이의 신호가 들려왔다. 안전을 확인하고 나니, 너도나도 우르르 구멍으로 몰려가 줄을 섰다. 연기가 점점 밀고 들어오자 설이곡은 괜히 순서를 양보했나 싶어 후회되었다. 이윽고 마지막 차례가 왔을 때는 숨을 들이쉬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연신 기침을 하는 한철이 먼저 구멍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러자 설이곡이 대뜸 그의 허리를 끌어안아 바닥으로 내던졌다.
“아니, 이게 무슨 짓인가?”
“자네는 나보다 내공이 높으니 양보하게.”
“뭐야?”
설이곡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구멍으로 상체를 쑥 집어넣었다. 구멍은 좁아터져 성인 한 명이 겨우 통과할 정도였다. 그나마도 표면이 거칠고 습한 바위벽이니 신축성이 있을 리가 없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설이곡의 커다란 배가 구멍에 꽉 끼고 말았다.
“아야야!”
“이런 멍청한!”
되도록 빨리 연기 속을 탈출하고 싶은 한철은 설이곡을 있는 힘껏 밀어 보았다. 그러나 틈에 단단히 끼어버린 그의 몸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이 돼지가!”
한철은 다급하여 이번에는 당겨도 보았다. 역시 결과는 같았다. 심지어 그의 뱃살에 파묻힌 왼손은 빠지지도 않았다. 안쪽에서 설이곡이 뭐라 뭐라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으나 그의 귀에는 그저 돼지 멱따는 소리처럼 들렸다.
“이 망할 욕심쟁이 돼지 때문에 이리 허망하게 죽는구나.”
자욱한 연기 속에 갇힌 한철은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자, 이제 되었으려나?”
동굴 쪽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던 소년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연기를 피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동굴의 반대편 출구밖에 없었다. 좁고 긴 통로를 지나 맑은 공기를 마주하게 되더라도 그 바깥은 절벽이었다.
‘이쪽으로 다시 돌아온다 해도 한참 후일 테니 당분간 시간은 벌 수 있을 것이다.’
소년은 휘파람을 불며 주섬주섬 주변을 정리했다. 당나귀 두 마리가 끄는 수레는 작았으나 물건이 가득했다. 식량과 무기 외에도 지난밤 귀신 소동을 일으켰던 잡동사니들이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그의 계획이 모두 맞아떨어졌다. 상대가 생각보다 훨씬 더 겁쟁이에 멍청이들이라 가능했지, 본인도 이렇게 결과가 좋을지 예상하지 못한 터였다.
“명문정파의 소문난 협객들이라더니, 다 허명이구나.”
호탕하게 웃는 그의 얼굴은 해맑기 그지없었다. 시작은 신교를 돕겠다는 의도였으나 막상 호되게 골탕을 먹이고 나니, 진심으로 즐거웠다.
“여어, 이제 가봅시다.”
소년은 당근을 낚싯대에 메고 당나귀들 앞에서 알짱거렸다. 식탐 많은 그들은 눈앞에서 출렁이는 당근을 따라 한발 한발 걸음을 옮겼다. 소년이 달리면 속도를 내고 멈추면 한 입 베어 먹으며 평화로운 행군이 계속되었다.
“겨울이 물러가려나? 오늘따라 바람이 따뜻하구나.”
어느덧 산등성이 사이로 해가 수줍은 얼굴을 내밀었다. 강가장으로 향하는 고갯길까지는 이제 고작 두 시진도 남지 않았다. 소년은 슬슬 배가 고파졌다. 이참에 잠깐 쉬어 갈까 싶어 근처 바위에 걸터앉았다.
“멈추시오!”
막 수통을 들어 물을 마시려던 때였다. 잔뜩 긴장한 목소리의 주인은 날카로운 검날로 소년의 목덜미를 겨냥했다. 마치 검을 처음 들어본 사람처럼 손을 달달 떠는 모양이 인질보다 더 인질 같아 보였다.
“당신은 누구시오? 정……, 정체를 밝히시오!”
“그러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소년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획 돌려 재꼈다. 검의 주인은 너무 놀라 하마터면 들고 있는 검을 떨어뜨릴 뻔하였다. 바짝 올려 묶은 머리가 땀으로 범벅이 된 그는, 다름 아닌 용문파 도사 서용이었다.
“질문은 내……, 내…… 내가 먼저 하였습니다.”
“으하하하하.”
소년은 검 하나도 제대로 들 줄 모르는 약골 주제에 협박이랍시고 흉내를 내는 도사가 우습기만 하였다. 겁을 내기는커녕, 한동안 고개를 젖히고 깔깔 웃어댔다. 그 탓에 서용의 검날에 베여 목덜미에는 실낱같은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어라, 큰일이다.’
서용은 애초에 상대를 다치게 하고픈 마음이 없었다. 서둘러 검을 거둬들이고자 손목을 당겼다. 그런데 웬걸? 아무리 힘을 주어도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새 웃음을 멈춘 소년이 검날을 손가락으로 잡아당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 목에 상흔을 내셨으니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군요. 얼핏 보아도 제가 아우인 것 같으니 먼저 이름을 밝히겠습니다. 저는 지나가는 나그네이자 방랑객, 윤찬영이라 합니다.”
한순간에 주도권을 빼앗긴 서용은 검을 잡힌 채로 엉거주춤 서 있을 뿐이었다. 그의 얼굴이 울상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