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112화 (112/209)

112화. 魔戲(마희)

오대산검의 고수들이 대부분 부상을 입었으므로, 추격대의 기수는 용호문의 문주 한철이 맡았다. 마지막까지 신계문의 설이곡과 경쟁하였으나 문파의 규모로 보나 제자의 인원으로 보나 더 압도적이었다.

기세등등한 한철에 반해 설이곡은 내내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문파를 오대산검의 바로 다음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설문주, 인상 좀 펴시게. 우리끼리 경쟁해서 무엇 하겠는가? 적은 오직 태을신교이며, 우리의 목적은 강운선이네.”

“누가 인상을 썼다고 그러는가? 조금도 샘하는 마음이 없으니 매도하지 말게.”

두 사람은 오랜 친우였기에 서로의 의중을 모르지 않았다. 설이곡은 한철이 짐짓 점잖은 척하며 비아냥대는 꼴이 퍽 신경질이 났다.

“태봉으로 바로 갔을까? 허나, 거기까지는 거리가 너무 멀지 않은가?”

“그래도 어딜 가겠는가? 이 경국 땅에서 그들을 숨겨줄 곳은 없네.”

“흐음, 그나저나 태을신공은 대단하지 않은가? 황석산에서 그놈을 보았을 때만 해도 장문주에게 비할 바가 못 되었지. 뿐인가? 더 거슬러 올라가 불과 십여 년 전에는 아예 무공의 무 자도 모르는 어린애가 아니었던가?”

“기억하지, 조맹주님이 아니었더라면 진작에 객사했을 놈이.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처음에는 서로를 떠보려고 시작한 대화였으나 죽이 잘 맞는 터라 점점 수다가 되어갔다. 기실, 아무리 크게 당했다손 치더라도 뒤쫓는 대상은 태을신교였다. 부담감과 공포를 이겨내는 데에는 수다만 한 것이 없었다. 덕분에 그들 뒤를 바짝 따르던 용문파의 제자들은 적에 대한 몰랐던 낭설까지도 들을 수 있었다.

“용아, 진짜 강운선이 태봉으로 갔을까?”

어린 도사 하나가 자신의 옆에서 묵묵히 짐을 지고 있는 동기를 툭 치며 물었다.

“아니, 절대로.”

“그럼 갈 곳이 없잖아. 저들의 말처럼 경국 땅에서 발붙일 곳이 있겠어? 한두 명이어야 신분을 속이지.”

서용은 이마에 몽글몽글 맺힌 땀을 닦으며 주변 산세를 죽 훑었다. 그리고 곧 시선을 돌려 앞서가는 협객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강호에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분명했지만 어쩐지 경망스럽고 어리숙한 면이 있었다. 상황을 판단하는 수준이 딱 그러했다.

‘이 경로라면 그가 선택할 장소는 딱 한 군데. 바로 강가장이다.’

강율천이 지키던 그 예전부터 그가 죽은 지금까지 누구도 쉬이 발을 들여놓지 못한 신성한 곳. 그러한 곳이기에 함부로 떠올리지 못했으리라.

‘강운선은 그곳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하여 몸을 숨기기에는 안성맞춤이다. 반면 이 중에 강가장을 가본 사람은 없다. 되레 함정에 빠질지도 모른다.’

“서용?”

어린 도사는 묵묵부답인 동기에게 마음이 상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같은 나이에 입문하여 함께 자랐음에도 서용은 어렵고 불편한 이였다. 소문난 몸치라 기본 초식도 제대로 익히지 못하는 놈이 쓸데없이 책만 읽어대서 모르는 무공이 없었다. 게다가 무슨 점쟁이처럼 예측하는 것이 다 맞으니 가끔은 소름이 끼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입을 헤 벌린 모습으로 중얼거리는 때에는 반드시 불길한 말을 뱉어냈다. 그런데 하필이면 지금 그 특유의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아닌가?

“설마 아니지? 서용?”

“아무래도 알려야겠어.”

“뭘?”

이윽고 행렬이 잠시 멈춰서자 서용은 결심이 섰다. 그를 말리는 동기를 떨쳐내고 서둘러 한철의 앞으로 뛰어갔다. 짐이 많아 뒤뚱거리는 모습이 꼭 오리 같았다.

“한문주님.”

“어? 자네는?”

“네, 용문파의 제자 서용이라 합니다.”

“헌데?”

마뜩잖은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한철의 시선이 꽤 불쾌했으나 서용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무명 소졸에 불과한 자신을 존중해주리란 기대는 애초에 없었다.

“이대로 방향을 잡으면 태봉입니다. 허나 그들은 그리로 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손을 들어 행렬의 반대편 길을 가리켰다. 그쪽은 태봉과는 한참 떨어졌을 뿐 아니라 오히려 두타공파가 있는 금당 쪽에 가까웠다.

‘이 애송이는 어디서 튀어나왔길래 이리 허튼소리를 하는가? 그래도 용문파의 도사라 하니 함부로 대할 수는 없겠구나.’

한철이 눈살을 찌푸리고 서서 말이 없자, 옆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설이곡이 끼어들었다. 그는 원래도 말에 거침이 없는 편이었다.

“이보게, 젊은 도사 양반. 경험이 많아도 우리가 몇 곱절은 많으니 훈수 두지 말게. 보아하니 자네는 한창 기초나 닦을 나이 아닌가? 잔말 말고 선배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면서 한 수 배우게.”

“하지만, 설문주님. 부상자가 많은 그들이 태봉으로 갈 리 만무합니다. 게다가 추격대가 붙을 것을 뻔히 알지 않습니까? 강운선은 그리 무모하고 멍청한 자가 아닙니다.”

“뭐라고? 멍청?”

좋게 타일렀는데도 서용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아무리 오대산검이라 해도 용문파의 가장 낮은 항렬인 자가 감히 대선배인 자신에게 또박또박 대드니 자존심도 상했다. 하여 슬슬 말투에 짜증이 섞여 나왔다.

“건방지기가 하늘을 찌르는구먼. 그럼 우리는 그만 못해서 등신처럼 태봉으로 간다는 뜻인가?”

“아, 아니요. 저는 그저.”

설이곡이 노발대발하자 추격대 모두의 시선이 이쪽으로 모였다. 그제야 한철이 끼어들어 중재에 나섰다.

“이보게.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까마득한 선배가 아닌가? 응당 예의를 지키는 것이 도리이거늘, 아무 말이나 함부로 한 점은 자네가 잘못했네.”

친절한 어투였으나 그의 말속에는 가시가 잔뜩 돋아있었다. 감히 애송이 주제에 건방 떨지 말라는 점잖은 꾸중이었다. 그 속내를 깨닫고 나서야 서용은 입을 꾹 다물었다. 고개를 깊이 숙여 읍한 다음, 총총히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아니, 왜 굳이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는 사문을 망신스럽게 하나?”

옆에서 어린 도사가 연신 그의 태도를 나무랐지만 서용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민망한 마음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이리 대책 없이 쫓았다가 역습을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떻게든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설득해야 할 텐데 그에게는 권력도 지위도 없었다.

‘수십 혹은 수백의 제자들을 거느리는 문파의 장문이란 자들이 참으로 고압적이구나.’

그동안 자신이 믿어왔던 신념이 와르르 무너진 기분이었다. 물론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존경해마지 않던 묵안 조상원이 려국의 세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 날 이후, 신념의 벽에는 수많은 실금이 남았다. 그리고 기장로들의 죽음을 외면하던 장문주 외 오대산검 장문들의 작태를 확인했을 때에는 그 실금의 기억이 거대한 균열로 바뀌었다.

‘장문주는 애초에 용문파를 도울 마음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태을신교를 불러들이는 덫으로 우릴 이용했다.’

용조현의 주검 앞에서 오열하며 서용은 오대산검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의문이 생겼다. 의와 협이 무엇인가? 선과 악이 누구인가?

‘이들에게는 의리 따위 없다. 오직 출세를 위한 욕망에 사로잡혀 서로를 이용한다. 위계와 서열만을 강조하는 이 꽉 막힌 조직에서 나는 무얼 바라고 남아 있는 것인가? 여기에는 희망이 없다.’

신념을 잃은 서용은 당장이라도 무리 밖으로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역시도 정파라는 소속감을 버리기에는 한낱 허영심 많은 어린애에 불과했다. 그런 자신의 비겁함이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날이었다.

이윽고 날이 저물어 주변이 어둑어둑해졌다. 태봉으로 가는 길은 내내 산길이므로 마땅히 쉴 곳도 없었다. 그제야 한철은 뭔가 크게 착오가 있음을 깨달았다.

“설문주, 아무래도 잘못 판단한 듯하네. 그놈들이 태봉으로 갔다면 분명히 이 길을 지나야 하는데 아무런 흔적이 없지 않은가?”

불안하기는 설이곡도 마찬가지였다. 아까 용문파 애송이 도사의 말이 자꾸 떠올랐다. 부상자가 많고 추격대도 있는데 이 산길을 지나는 건 멍청하고 무모했다.

“한문주, 아까 그 도사 놈이 말한 방향에 뭐가 있지?”

“글쎄, 그러고 보니 그 고갯길이 낯이 익던데……. 아!”

“어? 설마!”

그제야 무언가가 떠오른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가본 적 없는 그곳. 강운선에게는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한 그곳은 강가장이었다.

“말머리를 돌려라. 되돌아간다.”

한철은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이 어둠 속에서 시간을 축내느니 한시라도 빨리 놈들의 꼬리를 잡아야 했다. 또한, 강가장에 무슨 꼼수가 숨겨져 있는지 몰랐다. 괜히 여유를 두었다가 역습의 기회를 주면 큰일이었다.

“자자, 서두릅시다.”

설이곡의 지휘 아래 오대산검 및 중소 문파의 고수 오십은 서둘러 행장을 챙겼다. 다행히 막 짐을 풀던 차라 너무 늦지 않게 행렬을 정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

“으흐흐흐흐.”

숲의 어둠을 뚫고 음산한 웃음이 울려 퍼졌다. 곧이어 무언가가 풀잎을 쓸어넘기는 소리까지 들리자 일행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온 신경을 귀에 쏟고 나니, 이번에는 산새들이 한꺼번에 날아가는 소리도, 먼 곳에서부터 산짐승의 울부짖음도 들렸다.

솨솨솨솨솨

“으흐흐흐흐흐.”

여인인지 사내인지 모를 웃음이 다시 한번 바람결을 타고 날아왔다. 추격대의 특성상 횃불도 들지 않은 터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야를 가린 채 듣는 소름 끼치는 소음의 변주는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뭐, 뭐지?”

“설마 범인가?”

“귀…, 귀신?”

온갖 추측이 난무한 가운데, 서용은 차분하게 봇짐을 열어 부싯돌을 꺼냈다. 긴장한 탓에 손이 덜덜 떨렸지만 세 번의 시도 만에 작은 불씨가 생겼다. 주변에 있던 이들이 하나둘 그것을 받아 가니 드디어 주변이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무리에서 제일 앞에 선 한철의 눈에 들어온 건, 저 멀리 보이는 희뿌연 무언가였다. 검은 머리를 출렁출렁 흔드는 양이 하얀 장포를 두른 사람 같았다.

“누구시오?”

까드득

호두알을 부대낄 때 나는 소리가 이러할까? 이빨을 맞부딪쳐 갈아내는 소리인지도 몰랐다. 확실한 것은 너무나 불쾌하고 소름 끼치는 장면이라는 점이었다.

“귀, 귀신이다.”

누군가의 겁에 질린 말이 시작이었다. 한철의 뒤에 바짝 붙어 있던 이들이 점점 뒷걸음질 치며 퇴로를 확보했다. 누구보다 용맹하다 자부하는 협객들이었으나 사람이 아닌 대상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모양이었다.

“누구시오?”

겁이 나기는 한철도 마찬가지였다. 긴장감을 감추려고 옆에 붙어선 설이곡의 팔을 바짝 잡아당겨 보았다. 웬걸, 그의 친우 역시 잔뜩 공포에 질린 얼굴로 몸이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아까부터 움직이지 않으니 허수아비 따위가 아니겠어? 산짐승 소리가 사람 소리처럼 들린 게지.’

한철은 떠오르는 잡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크게 휘저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삐를 당겨 앞으로 움직였다. 고작 망상에 사로잡혀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더 늦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으흐흐흐흑.”

와다다다닥!

“으아아악!”

여태 검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거리던 하얀 장포의 그것이 기묘한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달려왔다. 그러자 언제 나타났는지 양옆에서 푸른 불꽃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무리를 향해 덮쳐오는 것이었다.

“귀신이다!!”

“으아아악!!”

꽤 질서를 지키고 있던 대열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나마 이성의 끈을 잘 잡고 있던 몇몇도 비명에 놀라 혼비백산하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냅다 반대 방향을 향해 내달렸다. 사람과 말, 그리고 쓸데없는 짐까지 뒤엉켜, 그야말로 난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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