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旁岐曲逕(방기곡경)
사흘을 꼬박 걸었으나 산길만으로 통하니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위기를 넘겼다고는 하지만 성곤의 상태는 날로 심각해졌다. 아무래도 태봉까지는 무리였다.
“사형, 결단을 내려야 하겠습니다.”
“무슨 수가 있느냐?”
진건 역시 운선과 같은 생각이었다. 이 속도로 태봉까지는 달포가 훌쩍 넘을 터였다. 뒤에는 추격대가 따라붙었을 테니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강가장으로 갑시다.”
“강가장?”
“네, 아무리 늦어도 열흘이면 도착합니다. 우리가 가진 식량으로 보름은 거뜬히 버틸 겁니다. 또한, 화악산을 통하면 태봉으로 가는 샛길이 있습니다. 비교적 부상이 가벼운 이들을 먼저 보내 피해를 최소화하는 게 좋겠습니다.”
진건은 고민이 깊어졌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으나 또 다른 문제가 있기 때문이었다.
“강가장은 지금 폐허나 다름없다. 네가 버틸 수 있겠냐는 말이다.”
“사형. 저는 괜찮습니다.”
운선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왜 괴롭지 않겠는가? 주운과 앞날을 약속하면서도 부러 피하고 싶던 장소가 그곳이었거늘. 허나, 지금은 그따위 회한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성곤과 적우의 목숨이, 그리고 수많은 교도의 목숨이 달려 있었다.
‘폐허가 되었더라도 내당의 밀실이나 뒷산 동굴에는 숨어지낼 만한 공간이 있을 것이다.’
강가장을 선택한 이유는 또 있었다. 바로 두타공파가 지척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추격대를 따돌리는 것만큼 중요한 임무가 하나 더 남았다.
‘우영을 찾아야 한다. 굳이 열쇠의 존재를 까발리면서까지 우리를 불러들인 이유가 있을 테니까. 가능하면 진짜 열쇠까지 얻는다.’
운선은 피곤에 지친 일행의 행렬을 쭉 훑어보았다. 서 있기도 힘들 만큼 고통스러울 텐데도 얼굴을 찡그린 사람 하나 없었다. 살겠다는 의지, 살아야 한다는 책임감 덕분이었다. 나라를 잃고 가족을 잃어가면서 그들에게는 삶이 의무가 되었다.
“오라버니, 정작 본인의 상처는 돌보지 않으니 걱정입니다. 이러다가 상처가 벌어지기라도 하면 고생해요.”
어느새 다가온 설이 짐을 가득 짊어진 운선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그제야 팔뚝에 감아놓은 천에서 핏물이 번지고 있는 양이 보였다.
“아프지 않아.”
“어이구, 자신을 돌보지 않는 우두머리는 신뢰를 받을 수 없다고요.”
멋쩍게 웃는 운선을 세워 놓고 설이는 익숙한 손길로 상처를 다시 싸맸다. 내내 무리의 중심에서 지휘하느라 정작 몸과 마음의 상처는 돌보지 못하는 그가 안쓰럽고 딱했다.
“그런데 설아,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일이 있다.”
“뭐요?”
“인질 말이다. 분명 태봉으로 토벌대가 오리라 예상했으면서 어째서 교환할 인질이 없었던 거야?”
휘몰아치는 사건들 때문에 차마 묻지 못한 질문이었다. 내내 궁금했지만 모든 일이 자기 탓이라 괴로워하던 서문에게는 물어보기 어려웠다. 이제 그 일은 일단락이 되었으니 정황을 알고 싶었다.
“온전히 제 잘못입니다.”
운선을 올려다보는 설이의 눈에는 후회가 가득했다. 어째서 그 아이를 간과하고 있었던가? 자신이 아니었다면 사형제들의 죽음은 없던 일이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인질을 풀어준 이는 윤가 찬영입니다.”
“윤찬영?”
“네, 오라버니가 운평에서 구한 포로 중 한 명이었지요.”
다시 길을 나서기 위해 행장을 꾸리며 두 사람은 대화를 이어갔다. 어차피 언젠가는 알아야 할 일이었기에 이참에 다 털고 가는 것도 좋을 듯싶었다.
“찬영은 그날 어미를 잃었어요. 부능파가 끼어드는 바람에 미처 운평을 빠져나가지 못했지요. 그러고 보니 그 어린애가 벌써 열넷이 되었군요.”
윤설은 멀리 능선을 바라보며 지난날을 떠올려 보았다. 황석산에 숨어 살면서도 그녀는 태봉을 오가며 연락책이 되었다. 그때 유독 아꼈던 이가 찬영이었다. 어미를 잃고도 씩씩하고 밝은 아이였기에 더 정이 가고 마음이 쓰였다.
“오라버니가 떠나고 태봉에 정착한 뒤에는 더욱 사이가 가까워졌어요. 같은 본(本)을 쓰는 성씨인 것도 이유가 되었지요. 마치 친동생이 생긴 기분이었어요.”
외로웠던 설이에게 찬영은 친구이자 가족이었다. 하여 웬만한 일은 함께했으며 그러다 보니 중요한 임무도 자연스레 공유했다. 설이가 찬영에게 무공을 가르친 것도 그즈음이었다. 자신과 동족을 지키기 위해서 신교도들은 모두 어느 정도의 무공은 익혀왔다. 다만 설이가 직접 가르친 이는 찬영이 처음이었다. 신기하게도 찬영은 글로 접한 무공도 곧잘 시연해 냈다. 가르치는 재미가 붙은 윤설은 점점 더 그에게 공을 들였다.
“글로만 배웠을 뿐인데 운지행을 한다?”
“네, 저도 깜짝 놀랐어요. 뿐인가요? 웬만큼 강호에서 소문난 무공은 얼추 흉내를 낼 수 있는 수준이랍니다. 그러나 내공은 달라서 제 능력으로는 가르칠 수 없었습니다. 아마 좋은 스승을 만났다면 훨씬 대단했겠지요.”
설이는 자랑스러움과 부끄러움이 뒤섞인 묘한 감정을 느꼈다. 자신의 실수로 괴물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두려움도 생겼다.
“찬영이 괴짜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어요. 유달리 재물을 밝히고 행동이 가벼운 건 어두운 과거 때문이라 생각했지요. 그런데 이리 큰 사고를 칠 줄이야.”
오대산검의 인질을 풀어준 이가 찬영이라는 걸 아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밀실의 모든 통로를 아는 이도, 고수들을 상대로 거래를 할 배짱을 지닌 이도 태봉에서는 오직 그밖에 없었다.
“헌데 설아,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어. 사실 우리에게 인질이 있었더라도 작금의 상황은 피하기 어려웠을 거야. 기껏해야 분노를 풀기 위해 그들의 목숨을 앗는 수밖에 더 있겠어? 네 잘못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모두 네 탓으로 돌리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럴까요?”
“그럼.”
빈말이 아니었다. 운선이 파악한 장은은 인질 따위에 흔들릴 인물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그들을 부러 사지로 보낸 이가 누구였던가? 오히려 인질을 잡고 있었다면 그들의 목숨을 빌미로 강호인들의 분노를 키우고 복수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을지도 몰랐다.
“그 아이는 어디 있어? 직접 만나 보고 싶은데.”
“자기도 잘못을 알았는지 태봉을 떠났답니다. 지금 어디서 무얼 하는지도 몰라요.”
설이의 깊은 한숨 속에는 찬영에 대한 걱정도 다소 섞여 있었다. 그만큼 그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을 테지. 운선은 마음 약한 설이가 귀여워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 주었다.
“오라버니, 이제 떠나지 않을 거예요? 그럼 주언니는…….”
주운의 이름이 나오자 운선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녀와 헤어진 지 벌써 열흘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말도 없이 떠나왔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어떤 변명도 필요치 않았다. 용서를 구할 자격도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는 건 아니었다. 다시 며칠 전으로 돌아간다 해도 선택은 같을 테니까.
“그저 인연이 아니었던 게지.”
잠시나마 행복한 꿈을 꾸었다. 고통스러운 그의 삶을 지탱해줄 평생 잊지 못할 꿈이었다. 운선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수도인 한경까지는 말을 타고 사흘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형진은 이른 새벽에 길을 나섰다. 스승의 안위가 걱정되는 데다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가시지 않았다. 되도록 서둘러 움직인다면 달포 사이에 두타산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여기 닭국수 하나 말아 주시오.”
“네에.”
용문산을 내려오니 이미 아침이 한참 지난 시각이었다. 입맛이 없었으나 먼 길을 가야 했기에 눈에 바로 보이는 객잔으로 들어갔다. 작고 허름하여 점소이도 따로 없었다.
“꽤 오래 가겠구나.”
국수를 기다리는 사이, 형진은 오른쪽 옆구리 아래를 손으로 지그시 눌러보았다. 꼬박 이틀을 치료했건만 아직도 손가락 한 마디가량의 멍울이 잡혔다. 당분간 내력을 쓰지 않는다면 보름이면 나아진다고 하였으나, 마음이 조급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중이야 어찌 됐든 추격대에 지원해 운선의 뒤를 쫓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국수 나왔어요.”
“감사합니다.”
보잘것없는 모양새였지만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국수는 꽤 맛깔스럽게 보였다. 정작 눈앞에 음식이 나오자 갑자기 배가 고픈 듯도 했다. 형진이 천천히 젓가락을 들어 면발을 들어 올릴 때였다.
“좀 더 몸을 추슬러도 돼요.”
“아닙니다. 그간 보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중에 다시 꼭 찾아와 인사드릴게요.”
연약하지만 강단 있는 목소리. 쌀쌀맞으면서도 다정한 그 목소리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이와 너무 비슷했다. 형진은 허공에 젓가락을 멈춘 채로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주운?”
“어?”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 사이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 황석산에서 헤어진 이후, 감감무소식이었던 주운이 눈앞에 버젓이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형진은 가늘게 떨리는 손을 감추고자 황급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어째서 여기 있습니까? 신교와 함께 떠난 게 아닙니까?”
“무슨 말인지.”
뜻밖에 마주친 것도 모자라 형진이 영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니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왜 자신을 보자마자 태을신교를 떠올렸을까? 그때 분명 운선을 따라갔다고 생각했을 텐데?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혹, 운선이 어디 있는지 아나요?”
“사저?”
한달음에 자신에게 다가와 묻는 주운에게 놀라 형진은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난번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 마르고 수척해진 모습에 마음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운선은 지금 오대산검에 쫓기고 있습니다.”
형진은 그의 근황을 전하는 동시에 주운의 안색을 살폈다. 어쩐지 운선의 소식을 듣는 모습이 이전과 달라 보였다. 안 본 사이에 두 사람 간에 무슨 일이 있었음이 분명했다.
“사저, 이곳까지 운선과 같이 온 겁니까? 그가 여기에 당신을 버리고 갔나요?”
“…….”
주운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모습에서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반년 이상 강호에 나타나지 않았던 운선이 어디서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는 이것으로 다 설명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태을신교를 위해 주운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도.
“앞으로 어쩌실 겁니까?”
“글쎄요, 운선이 위험하다면 그를 찾아갈밖에요.”
이 지경까지 왔는데도 주운의 선택은 오직 한 사람이었다. 그 아픈 사실을 확인하면서도 형진은 주저하지 않았다. 계획은 바꾸면 그만이었다.
“사저, 저와 함께 갑시다. 운선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
눈물 젖은 얼굴로 고개만 끄덕이는 주운을 바라보며, 형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연모하는 마음을 애써 숨기고 보내준 여인이었다. 그토록 그리워하면서도, 차마 고백조차 하지 못하면서도, 오직 그녀의 행복만을 바랐다. 그러나 그 결과가 눈물이라면, 이제 다른 선택을 할 작정이었다.
‘이제 내가 그녀를 지킨다.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