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110화 (110/209)

110화. 蘆木櫃(노목궤)

은률은 보이지 않는 상대를 찾아내기 위해 숲을 한 바퀴 쓱 훑었다. 부상이 심각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어린애를 두려워할 그가 아니었다. 자신을 비웃은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하고 싶었다.

“여어, 그 몸으로 다니다가는 경국의 국경도 넘지 못할걸요?”

“누구냐?”

“하아, 누군지 알면 뭐라도 할 수 있답니까? 개미 한 마리도 못 죽일 것 같은데?”

“쥐새끼처럼 숨어 있지 말고 썩 나와라!”

“누굴 바보로 아나? 보나 마나 단칼에 죽이려 할 텐데 내가 미쳤나?”

소년은 다시금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다혈질인 은률은 독이 바짝 올라 어깨를 들썩거렸다. 이 건방진 녀석의 입을 찢어놓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이보세요. 지금 당신이 가는 방향이면 며칠 못 가 금세 잡힐 겁니다. 또한, 가는 길에는 민가도 없는데 어찌 버티실는지요? 저를 죽이지 않고 귀한 물건을 주신다면 먹을 것과 말을 드리지요.”

“뭐?”

처음에 은률은 상대가 자신을 농락한다고만 생각했다. 어쩌면 성곤의 덫이 아닐까 의심도 했다. 자신을 안심시킨 뒤에 기습하기 위한 포석일지도 몰랐다.

“흥! 내가 속을 줄 알고!”

“쯧쯧, 제가 굳이 왜요? 저는 이편도 저편도 아니니 제 이득만 차리면 그뿐입니다. 에잇, 그럼 마십시오. 저는 더 좋은 거래가 있어 이만.”

“아, 아니!”

은률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막상 제안을 철회하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대로 놓치면 용문산은커녕 이 골짜기조차 벗어나기 힘들었다. 게다가 소년이 너무 당당하고 뻔뻔한 태도로 일관하니 되레 믿음이 가기도 했다. 차라리 미친 척 거래를 해볼까?

“무얼 주면 되는가?”

“음, 허리에 찬 검이요. 그게 참 멋져 보이는데요. 갖고 싶어요.”

“뭐야?”

은률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게졌다. 아무리 어린애라기로서니 감히 비월을 탐내? 거래고 뭐고 당장 멱살이라도 잡아야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가만, 오히려 잘 된 거 아닌가? 비월로 유인하여 거리를 좁힌 다음에 단숨에 제압하면 저놈이 가진 물건도 내 것이 되지 않겠는가?’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은률은 목소리부터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최대한 친절하게, 상대가 겁먹지 않도록.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일단 얼굴은 마주하고 얘기하지. 목소리와 거래를 할 순 없지 않나?”

“하하, 내가 바보 멍청이도 아니고. 검을 한 번만 휘둘러도 두 동강이 날 텐데 어찌 나갑니까?”

“으으.”

은률은 난감한 상황에 말문이 막혔다. 기실 장은이 아닌 누군가와 이리 길게 말을 섞어본 것도 퍽 오랜만이었다. 이마에서는 벌써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나쁜 머리 굴리지 말고 빨리 결정하세요. 저도 꽤 바쁘답니다.”

“뭐야?”

분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지르기는 했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었고 그나마 머리도 나빴다. 시간을 끌어봤자 좋을 게 없었다.

“좋다. 검을 내어줄 테니 날 도와다오.”

“진작 그렇게 나올 것이지.”

은률의 대답을 듣자마자 숲 뒤쪽에서 거대한 검은 형체가 불쑥 나타났다. 눈을 찌푸리고 한참 바라보니 말을 탄 소년의 모습이었다.

‘멍청한 놈. 설마 말을 탔으니 내가 어쩌지 못하리라 생각했구나. 잘 되었다. 틈을 보아 멱살을 낚아채리라.’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으니 녀석을 사로잡는 건 시간문제였다. 아무리 자신이 중독되었다 하더라도 그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무공을 모르는 풋내기가 감히 오대산검의 내로라하는 고수를 무시하다니. 본때를 보여주어 세상의 이치를 가르쳐주리라 마음먹었다.

“검을 이리 주세요.”

은률은 순순히 비월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는 있었으나 말을 탄 소년은 은률과 스무 걸음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실수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은률은 거리를 가늠하고 있었다. 딱 세 걸음만 다가오면 몸을 날릴 작정이었다.

따닥따닥

소년은 여유만만하게 웃으며 검 쪽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시선은 오로지 목표물에 고정되어 있었으며 조금도 의심의 빛이 없었다.

‘지금이다!’

드디어 그가 열댓 걸음 정도 앞에 당도했을 때, 잽싸게 몸을 날렸다. 평소보다 느린 몸짓이었지만 충분히 상대를 낚아채고도 남을 속도였다. 은률의 갈고리 같은 손이 눈 깜짝할 사이에 소년의 목덜미 앞까지 당도했다. 잡는 동시에 말에서 내동댕이친다면 사지가 골절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이놈! 감히 나를 농락해?”

“아앗!”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은률은 고작 열서너 살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소년 따위가 금나수를 피할 수 있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러나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일이 벌어진 다음이었다.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바닥에 고꾸라진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아하하하, 세상에. 어쩜 저리 천박하게 넘어졌을까?”

소년은 허리가 끊어질 듯이 몸을 젖히고는 자지러지게 웃어댔다. 나중에는 두 발을 동동 구르기까지 하였는데 참으로 신통하게도 허공에 발을 띄워 결코 말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네 이놈!”

은률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쳤으나 정작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저 영악한 놈이 그 짧은 사이에 혈도까지 찍은 모양이었다.

“하핫, 절대로 못 잡을 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자아, 그럼.”

소년은 가벼운 몸을 훅 날려 바닥에 내려섰다. 얼마나 동작이 날랜지 말은 자기 주인이 내렸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잔뜩 약이 오른 은률조차도 이런 해괴망측한 경공은 처음 보았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이 검은 제 것이지요?”

무공을 익힌 성인에게도 버거운 비월을 소년은 가뿐하게 들어 올렸다. 검집에서 살짝 검을 빼보더니만 창백한 날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지는 양이 꽤 만족스러워 보였다.

“아, 맞다. 약속은 지켜야지요. 자!”

드디어 비월에 대한 감상을 끝낸 소년은 은률의 옆으로 성큼 다가왔다. 끊임없이 욕을 뱉어내는 상대의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몸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는 그를 버쩍 들어 올려 말 안장에 거세게 내려놓았다.

“여기에 식량도 묶어놓았으니 가면서 드십시오. 혈도는 아마도 한 시진쯤 뒤에 풀릴 겁니다. 근데 제가 아직 미숙하여 더 걸릴지도 모르겠어요. 아무튼, 안녕히 가세요.”

은률이 대꾸도 하기 전에 소년은 말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렸다. 마치 그 뜻을 알아듣는 듯, 말은 뒤도 안 돌아보고 달리기 시작했다.

“아 참! 묶어두는 걸 깜빡했네. 어쩔 수 없죠. 부디 말 등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이 개자식아!”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은률의 등 뒤로 소년의 자지러지는 웃음이 들려왔다.

***

‘분명 보현 사숙이 말씀하신 그놈과 동일 인물이다. 태봉의 밀실을 아는 것을 보니, 려국인일 가능성이 큰데 어째서 신교의 일을 다 망쳐놓았을까?’

이야기를 듣는 동안 가은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융통성 없는 은률의 말이 아니었다면 거짓이라 생각할 정도로 기이한 이야기였다. 아무리 부상을 입었다지만, 오대산검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인 정은률을 골탕 먹였다. 뿐인가? 황석파의 보물인 비월을 가져가다니, 대범한 가은도 혀를 내두를 배짱이었다.

“뭐 그런 놈이 다 있답니까?”

잔뜩 주눅이 들어 더듬거리는 은률이 가엽기도 하여 가은은 부러 화를 내었다. 되도록 그의 편이라는 확신을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상황이 그리되었으니 문주님을 뵐 면목이 없소. 이제 어찌해야 할지 알 수도 없고.”

물론 장은을 만나고 싶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배신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깊은 속내까지는 들키고 싶지 않았다. 고마움과 신뢰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었다.

“네, 이제 좀 이해가 갑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요?”

한참을 턱을 괴고 고민하던 가은은 드디어 좋은 생각이 났는지 은률의 손을 더럭 잡았다. 상대의 얼굴이 새빨개진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잔뜩 신이 난 표정이었다.

“몸을 추스르는 대로 우리끼리 강운선을 추적해요. 태을신교를 뒤쫓다 보면 비월의 행방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대협은 무공이 고강하고 저는 잔머리를 쓸 줄 아니 우르르 몰려다니는 추격대보다 유리한 면이 있지 않겠어요?”

뜻밖의 제안에 당황했지만 생각해보니 꽤 괜찮은 방법이었다. 그 사이 장은에 대한 마음도 정리된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그럽시다. 그래요.”

“고마워요. 제 생각에 동의해줘서.”

가은의 밝게 웃는 모습이 햇살처럼 눈에 부셨다. 은률은 어느새 가슴 깊숙이 박혀버린 그녀에 대한 연정을 더는 모른 척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욕심을 부릴 생각은 없었다. 그저 이렇게 웃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은률을 돌보다 보니 하루가 금세 지나갔다. 가은은 필요한 약재를 가져오고 상황도 살필 겸 용문파에 다녀오기 위해 동굴을 나섰다. 걱정 가득한 은률의 배웅을 받으며 내려오는 길은 나무에 달빛이 가려 캄캄했다. 그러나 가은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일과 밝혀야 할 진실에 대한 고민 탓에 다른 감정 따위는 느낄 겨를이 없었다.

‘사부님께는 뒷글자를 알아내 오겠다 하면 된다. 나의 생사엔 관심이 없을 테니 반대하진 않을 테지. 추격대보다 먼저 강운선을 찾아야 한다. 그에게서 진실을 확인한 후에 다음 행보를 결정하자.’

더듬더듬 목걸이를 만져보는 가은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소소정이 현진의 진짜 정체를 말해주었을 때, 그녀는 묘한 흥분에 휩싸였다. 고작 약초꾼의 딸이 아닌, 버려진 왕실의 핏줄이라는 사실이 슬프면서도 자랑스러웠다. 그것만으로도 위험을 무릅쓸 이유는 충분했다.

고유생과 독대했음에도 장은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기실 상대가 자신의 흉계를 눈치챘음이 자명했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사숙, 이리 무탈하게 돌아오셨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역시 사숙은 허투루 보아서는 안 되겠군요.”

“뭐라고? 이런 괘씸한!”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고유생은 장은의 비아냥에 결국 분통을 터뜨렸다. 엎드려 빌어도 모자랄 판에 거만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라니, 어찌 이리 안하무인인지 기가 턱 막혔다.

“이 모든 게 우리 황석파를 위한 일이지요. 네, 예측하신 대로 사숙은 미끼가 맞았습니다. 의심 많은 이서문을 속일 방법은 사숙과 풍림밖에 없었으니까요. 대의를 위한 희생이었지요. 그렇다고 제가 발 뻗고 잤겠습니까? 사숙을 사지에 몰아넣었으니 이후의 모든 결과는 제가 책임지려 했습니다.”

“허튼소리!”

고유생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옆에 놓인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꽤 단단한 나무였건만 쫙 소리를 내며 두 동강이 나버렸다.

“지금 제게 화를 내실 때가 아닙니다. 우리 황석파의 사활이 걸려있는데 이딴 이야기로 시간을 축내실 겁니까?”

“네게는 내 목숨이 하찮더냐? 오냐, 말 잘했다. 내 목숨이 얼마나 하찮은지 한번 확인해보자꾸나.”

수염까지 부르르 떠는 고유생의 얼굴에는 단호한 결심이 섰다. 문파고 나발이고 오늘은 저놈과 끝장을 내리라. 그동안 켜켜이 쌓였던 울분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사숙, 현로 선생이 말씀하시더이다. 그 수수께끼의 답을 안다고. 하여, 사숙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뭐?”

막 검을 꺼내려던 고유생의 손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그럼 드디어 그곳에 갈 수 있다는 말과 같았다.

“사실이냐?”

“네, 사숙께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 마당에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그간 버릇없게 군 점은 사죄드립니다. 이제 틀렸다는 걸 알았으니 바로잡으려 합니다.”

흥분하여 어쩔 줄 모르는 고유생의 앞에 장은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언제나 불리한 때에는 쉬이 내어주는 무릎이었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꽤 자존심이 상했다. 하등 전력에 도움도 되지 않는 늙은이에게 고개를 숙이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곳의 비밀을 밝혀내는 것. 그리하여 려국을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철저히 짓밟고 싶었다.

“사숙, 추격대는 내일 묘시에 출발합니다. 다만 부상을 입은 현로 선생만은 두타공파로 향합니다. 제가 금황자를 만나고 오는 동안 사숙께서 그 뒤를 쫓아주십시오.”

“내가? 어째서 그래야 하느냐?”

그의 앞에 장은이 무릎을 꿇는 순간 이미 마음의 결정이 끝난 고유생었다. 그러나 짐짓 못마땅한 기색을 보이며 한참을 거들먹거렸다. 그 속내를 꿰뚫고 있는 장은은 머리끝까지 짜증이 났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우리와 협력하자 했으나 분명 숨기는 것이 있습니다. 백형진이 그와 밀담을 주고받더니 새벽같이 용문산을 내려가더이다. 아픈 스승을 두고 떠났을 때는 필경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이지요. 하여 지금이 기회입니다. 현로 선생의 뒤를 밟아 비밀을 캐내야 합니다.”

“허나 내가 움직이면 눈치채지 않겠느냐?”

고유생이 반문하자 장은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통에 짜증이 밀려왔다.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이가 은률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니 기껏 눌러놓았던 울혈이 다시 솟구치는 것 같았다.

“오히려 나을지도 모르지요. 조맹주와는 내내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오지 않으셨습니까? 들키면 적당히 핑계를 대어 무마하십시오.”

다소 궁색한 변명이었지만 또한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고유생 또한 임기응변에 능하고 영악하니 되레 잘 대처할지도 몰랐다.

“그래, 태을신교를 추격하는 일이 가능할 듯싶으냐?”

어느새 분노가 사그라든 고유생은 친근함을 가득 담아 물었다. 당분간 같은 배를 탔으니 개인적 감정은 잠시 묻어둘 작정이었다.

“비록 이서문이 죽었으나 그들을 만만히 볼 수 없지요. 특히 강운선은 아주 영특합니다. 우리가 추격대를 보내리라는 사실은 벌써 눈치챘겠지요. 과연 어찌 따돌릴지는 지켜볼 일입니다.”

고개를 주억거리는 그의 사숙을 바라보며 장은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미끼를 다 던져놓았으니 이제 천천히 건져 올리기만 하면 되었다. 고유생의 귀환은 생각해보니 전화위복이었다. 이제 잘 드는 검만 돌아온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어쩐지 사랑하는 동생이 보고픈 밤이었다. 구름에 가린 달을 바라보며 장은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은률아, 어디 있느냐? 인제 그만 돌아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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