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夏爐冬扇(하로동선)
추격대 차출을 둘러싼 회의는 이른 아침부터 시작되어 한낮이 되도록 끝날 줄을 몰랐다. 이미 태을신교를 다 잡은 것처럼 잔뜩 흥분한 사람들은 너도나도 선발대가 되겠다며 아우성쳤다. 누구 하나 검은 속내를 가지지 않은 이가 없었음에도 입으로는 정의를 부르짖었다. 그 모습이 과연 의와 협을 좇는 협객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 지경이었다.
결국, 가은은 그 불편한 자리를 참아내지 못하고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맑은 공기라도 쐬어야 이 끔찍한 두통이 멎을 것 같았다. 마음에는 분노와 복수심이 가득했으나 그녀로서는 이를 풀어낼 방법이 없었다. 저 대단한 사람들을 이기는 방법이 있기는 한 걸까? 믿을 거라고는 머리밖에 없었으나 그나마도 영악한 소소정에게는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그야말로 암담하고 처참한 기분이었다.
“으으.”
“어?”
얼마나 걸어 나왔을까? 용이봉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 가은은 귓가를 스치는 미세한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신음은 흡사 짐승의 소리처럼 들렸다.
‘설마 범인가?’
머리끝이 쭈뼛쭈뼛 서고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무공의 기초도 모르는 가은에게는 말이 안 통하는 들짐승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존재였다. 하물며 인적도 드문 곳이니 자신이 이곳에서 시체가 된들, 아무도 모르지 않겠는가? 여태 부귀영화 한 번 제대로 누려보지 못했는데, 이런 외진 곳에서 비명횡사라니, 상상도 하기 싫었다.
“으으, 거…기…….”
이번에는 좀 더 명확하게 들렸다. 그러고 보니 짐승의 소리보다는 음성에 가까웠다. 사람이 내는 소리가 분명했다. 가은은 그제야 냉정함을 되찾았다.
“누구? 누구세요?”
가은은 혹시 괴한이라도 튀어나올까 싶어 호신용 단검을 꺼내 들었다. 황급히 책에서 본 사람의 급소를 떠올려 보았다. 경맥과 혈 자리를 외워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사…사…….”
“누구냐니까요? 어?”
소리의 출처를 확인한 가은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전혀 상상하지 못한 인물이 풀 사이에 웅크리고 누워 고통에 찬 신음을 뱉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엉켜 얼굴이 보이지 않았으나 누군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아랫배를 감싸 쥐고 있는 그의 오른손에는 검지가 없었다.
“정대협?”
가은은 시위에 재워진 활처럼 확 튀어 나갔다. 그의 몸에 손을 대니 불에 지진 것처럼 뜨거웠다. 큰 용기를 내어 머리카락을 살짝 헤쳐보았다. 얼굴에 식은땀이 잔뜩 배어 나와 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쓴 몰골이었다.
‘크게 다쳤구나.’
크고 작은 자상이 가득했지만, 무엇보다 손으로 감싸 쥐고 있는 아랫배 쪽이 유독 축축했다. 검은 옷이었음에도 피가 범벅인 것쯤은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가은은 본능적으로 사람을 불러와야겠다 생각했다. 일단은 목숨을 구해 놓고 볼 일이었다.
“정대협, 제가 내려가 사람을 불러올게요. 제발 그때까지만 버텨주세요.”
“아아, 가지…마…….”
은률의 피 묻은 손이 가은의 가느다란 팔을 덥석 붙잡았다. 비몽사몽 간에도 자신의 상황을 들키면 안 된다는 강한 집념 덕분이었다.
“절대 안 돼. 내가 돌아온 거…알리면…….”
“네? 어째서…….”
의아한 듯 되물었지만 가은은 벌써 돌아가는 정황을 파악했다. 그녀 역시 방금까지 혜윤당 안에 있었으니 태봉에서 겪은 이야기를 다 들은 참이었다. 그곳의 누구도 정은률은 어찌 되었는지 모른다고 하였다. 그런 그가 이곳에 있다? 필경 숨겨진 사정이 있으리라는 판단이 섰다. 게다가,
‘살아온 이들 중에는 중상자가 없었다. 헌데 정대협과 같은 고수가 이리 크게 다쳤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살아있음을 숨기고 싶어한다? 분명 저들 중에 거짓말을 한 이가 있음이야.’
또다시 혼절했는지 팔을 잡은 은률의 손이 한결 느슨해졌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가은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전화위복. 어쩌면 이 사람이 나의 귀인이 될지도 모른다.’
권력도 돈도 명예도 없는 그녀에게 잘 드는 칼이 생긴다면? 심지어 언제든, 누구에게든,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는 칼이라면? 가은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파도가 휘몰아쳤다. 범에게 쫓기는 그녀를 위해 하늘에서 튼튼한 동아줄을 내려줬음이 분명했다. 정은률, 가은에게는 그가 누구보다 굵고 튼튼한 동아줄이 아닐 수 없었다.
은률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을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는 가은의 얼굴이었다. 그는 여인을 그리 가깝게 마주한 적이 없었기에 아직 꿈을 꾸는 중이라 생각했다.
“정신이 들어요? 참으로 큰일 날 뻔했어요.”
가은은 들고 있던 물수건으로 은률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인상을 찌푸리지 않은 그의 얼굴은, 잘생기지는 않았으나 온순하고 순박해 보였다.
“해독은 했고 아랫배에 입은 자상은 다행히 깊지 않아 치료가 어렵지 않았어요. 다만 내상을 입었을지 모르니 의원을 찾아가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아아…….”
그제야 은률은 완전히 꿈에서 깨어났다. 정신을 잃기 직전 보았던 이가 선녀가 아닌 가은이었음을 깨닫자 왠지 모르게 부끄러우면서도 안심이 되었다.
“내상은 입지 않았으니 다른 의원은 필요치 않소.”
더듬더듬하면서도 그의 확고한 의지는 제대로 전달되었다. 가은은 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토벌대로 떠났던 분들 대부분이 돌아오셨어요. 다들 정대협의 생사를 모른다고 하여 걱정하였습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가은은 상대의 마음을 흔드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은률처럼 여인에 대한 경험이 없고 대인관계가 협소한 이들을 꾀는 일이란 식은 죽 먹기였다. 심지어 운도 따라주었다. 상처가 깊지 않았기에 굳이 의원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오롯이 자신 혼자 생명을 구해준 셈이니 이보다 더 큰 생색이 있으랴? 게으른 아버지 대신 열심히 산을 타며 약초를 캔 덕분이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더니. 부지런히 일한 덕을 오늘에서야 보는군.’
잔뜩 흥이 오른 가은은 부러 더 야단스럽게 은률을 간호했다. 따뜻한 죽을 떠먹여 줄 때쯤에는 상대의 방어벽이 완전히 허물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제대로 몸을 추스르려면, 언제까지 이런 동굴에 머물 수 없어요. 하여 곧 내려가 장문주님을 모셔오겠어요. 대협께서 이리 살아 돌아온 걸 아시면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아, 아니. 안돼. 제발…….”
마음이 다급해진 은률은 그녀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마침 일어서려던 가은은 몸의 중심이 무너지면서 은률의 품 안으로 스러지고 말았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 아아…, 저는…….”
어쩔 줄 모르는 은률의 콧속으로 여인의 체취가 훅 끼쳐 들어왔다. 해독이 덜 된 탓인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정대협.”
가은은 은률의 품에 몸을 맡긴 채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까칠하게 올라온 턱수염이 그녀의 보드라운 뺨을 콕콕 쑤셨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당신이 싫다고 하면 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 오히려 더 좋답니다. 오래전부터 존경하고 흠모하던 분과 함께 있다니 오늘 하루가 꿈만 같아요.”
턱 밑에서 그녀의 따스한 입김이 훅 끼쳐오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설렘에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소녀건만 지금은 그저 꽃내음이 나는 여인 같았다. 당장이라도 어깨가 부서져라, 품에 안고 싶었다.
“저는…, 저는…….”
“정대협, 이유는 묻지 않을게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도울 겁니다. 다만 오늘을 잊지 말아 주세요. 제가 당신을 구했다는 것, 그리고 제 마음을요.”
거기까지 말하고는 단숨에 가냘픈 몸을 일으켰다. 덕분에 은률은 엉거주춤 손을 벌린 자세가 되고 말았다. 그 모습이 순수하고 바보 같아서 가은은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사정이 있는 거지요? 어쩐지 장문주님이 정대협의 생사를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싶었지요.”
‘하아, 역시 그랬구나.’
은률의 달아오른 몸이 차츰 가라앉았다. 슬슬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니 근심과 걱정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당장 그의 앞에 닥친 일은 여인에 대한 연정이 아니라 가족같이 생각했던 사형의 배신이었다. 자욱한 독 연기 속에서 쓰러지면서, 그는 자신이 한낱 버리는 패였음을 깨달았다. 친형님, 아니 아버지와도 같았던 장은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자신은 미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대로 버려질 순 없다.’
힘겹게 살아 돌아왔건만, 지금 심정은 적의 덫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리석은 자신이 한심하고 혐오스러웠다.
***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당황스러움은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 가물가물 감겨가던 눈을 부릅뜨고는 단검을 꺼내 팔뚝을 깊게 그었다. 찌릿한 고통이 전신에 퍼지자 멀어져 가던 의식이 점차 돌아왔다. 적어도 이 자리를 벗어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퍼엉!
폭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연기를 내뿜던 수레가 마지막 한숨을 토해냈다. 은률은 비틀거리는 몸을 가까스로 추스른 뒤, 수레의 손잡이를 잡았다. 반쯤 기댄 몸이 당장이라도 고꾸라질 듯 피로했으나 지독한 정신력으로 버텨냈다.
끼이익!
얼마나 지났을까? 문이 열리며 희뿌연 형체 두어 개가 시야에 들어왔다. 드디어 기다리던 그 순간이었다. 은률은 앞뒤 잴 것 없이 수레를 힘껏 밀었다.
“으아아아아!”
퍽!
“악!”
은률의 기합 소리, 수레에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처참한 비명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끈적끈적한 무언가가 얼굴에 튀었으나 아무 느낌도 없었다. 무언가가 아랫배를 훑고 지나가는데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이곳을 벗어나고 말겠다는 굳은 의지만이 그를 지탱해주고 있었다.
“잡아라!”
“놓치면 안 된다.”
이윽고 수레를 손에서 놓은 은률은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쏟아지는 끊임없는 소음을 뒤로하고, 짙은 안개 속을 뚫고 지나갔다. 젖은 숲의 냄새와 무언가가 타는 역한 냄새가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구역감이 몰려왔으나 게워낼 겨를도 없었다.
턱!
그때 발목을 감아쥐는 느낌이 들더니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허우적거렸지만, 맥없이 허공만 휘적거렸을 뿐이었다. 발목이 더는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힘없이 꺾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붕’ 떠오른 몸은 끝도 없는 내리막길로 구르기 시작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몸을 둥글게 말아 표면적을 줄이는 일이었다. 무참히 찌르고 베는 바위와 나뭇가지들이 무수히 스쳐 지나가는 동안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앗!”
몸을 일으킨 은률은 통증을 따라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배가 온통 피투성이였다. 수레를 밀고 나올 때 누군가의 칼에 베인 것 같았다.
‘이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태봉의 성곽을 벗어나긴 했으나 아직도 갈 길이 구만리였다. 이 정도 부상이라면 용문산까지만도 한 달이 족히 걸릴 터였다. 앞이 캄캄했다.
“큭큭.”
누군가의 웃음이 들린 것은 태봉 입구의 골짜기를 막 벗어났을 때였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낭랑하고 맑은 목소리가 의심할 바 없이 소년이었다.
“누구냐?”
“내가 누구게요?”
*** 하로동선(夏爐冬扇): 여름 난로와 겨울 부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