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刻苦勉勵(각고면려)
성곤의 치료를 마친 설이가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꼬박 하루 동안 잠도 못 자고 조부를 보살핀 탓에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설아, 사백님은 어때?”
밤을 꼬박 새운 것은 운선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큰 눈이 금방이라도 핏줄이 터질 것처럼 새빨갰다.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어요. 허나 내상이 심해 한동안은 내력을 쓰지 못할 거예요. 무리하면 그다음은 목숨도 장담하기 어려워요.”
“그럼 적우 형님은?”
“사형은 깨어나 봐야 알겠지만, 지금으로선 고비를 넘겼다고 봐도 될 것 같아요. 워낙 괴물 같은 사람이니 회복이 되리라 믿어봐야죠.”
비틀거리는 설이를 안아 일으키며 운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두 사람까지 잃는다면 태을신교는 끝이었다. 기둥과 같았던 서문의 죽음은 교도들 모두에게 깊은 절망감을 주었다. 하여, 누구든 나서 일을 수습하고 마무리해야 다음이 있었다.
“오라버니, 그놈들은 우리가 벼랑 끝에 몰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요. 반드시 뒤따라올 테니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으면 모두가 죽습니다. 하니,”
설이가 운선의 두 팔을 꼭 붙잡았다. 이 말이 그에게 얼마나 부담이 될지 잘 알고 있기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밖에 없었다. 그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의 희망이었으므로.
“오라버니가 나서서 이끌어주세요.”
“뭐? 내가? 난 그럴 자격도, 능력도 없어.”
운선은 소스라치게 놀라 설이의 손을 뿌리쳤다. 아직 사형제들의 죽음을, 누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도 못한 채였다. 게다가 그 책임이 오롯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었기에 더더욱 설이의 부탁을 외면하고 싶었다.
“운선아, 설이 말이 옳다. 우리에게는 구심점이 필요하고 그에 가장 적역이 너다.”
“사형…….”
팔에 부목을 댄 진건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언제나 무표정한 그였으나 사랑하는 형제를 잃은 지금만큼은 처연하고 슬퍼 보였다.
“안 그래도 너에게 전할 물건이 있구나. 잠깐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느냐?”
“네? 무슨…….”
진건은 큰 걸음으로 운선의 앞까지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리고 한 손으로 한참 동안 목 주변을 뒤적이더니 반짝이는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이게 뭡니까?”
“열쇠. 우리의 보물을 숨긴 열쇠다.”
진건의 손에서 딸랑거리는 수파에는 작은 구슬 두 개가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雷(뢰), 雨(우)?”
구슬 안에 새겨진 글자를 보는 순간, 운선은 어떤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스승의 주변을 돌며 희롱하던 흑접영의 좌영. 그의 아우가 위험에 빠지자 던졌던 반지.
“사형, 좌영에게서 이것과 같은 구슬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다만 그때의 글자는 분명 霜(상)이었어요.”
“그래, 맞다. 그에게도 하나가 있지.”
진건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만들어졌다. 이 길고 긴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가야 하나 생각하니 막막하기만 했다.
“해심밀경소에 비밀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
“네.”
운선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자 진건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젠가 그도 알게 되리라 여겼으나 자신이 직접 전달하게 되리라고는 단 한 번도 예상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이런 일은 서문이 도맡아 했기 때문이었다. 문득 그의 부재가 느껴져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 안에 숨겨진 글자는 어떤 장소를 가리킨단다. 물론 나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 비밀은 왕실의 핏줄이 아닌 그 누구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 하여 장은이 현진에게 유독 집착했던 것이다.”
“아아.”
누이를 생각하자 운선의 마음이 먹먹해졌다. 그 긴 시간 동안 모진 책임을 홀로 지고 있었을 그녀가 새삼 안쓰럽고 안타까웠다.
“그곳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무엇이길래 모두가 갖기 위해 안달하는 것입니까?”
“려국의 모든 것.”
진건이 머뭇거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윤설이 끼어들었다. 그녀 역시 이 일에 전혀 책임이 없지 않았다. 목에 걸린 또 다른 구슬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무도 가보지 않았고, 확인하지 않았으니 진정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른대요. 다만 려국의 왕족이 수천 년간 지켜오던 것이라고 전해지지요. 그걸 모르니 모두가 눈이 벌게져 탐내는 게 아니겠어요? 누군가에는 무공 비급일 수도, 또 누군가에는 진귀한 보물일 수도 있겠지요. 각자의 욕망에 따라 바라는 이상이 다를 테니까요.”
운선은 문득 조양이 바라는 게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의형제인 강율천을 속이고, 오대산검의 사형제들을 기만하며 얻으려 하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비밀은 철저히 감춰져 책 속에 봉인되었다. 그곳은 오직 경전의 수수께끼를 풀어낸 이만이 찾을 수 있도록. 그런데 우리의 선조들은 겁이 많았던 것 같구나. 혹 운이 좋아 누군가가 찾아내더라도 함부로 열 수 없도록 열쇠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이것, 일곱 개의 칠원성군이란다.”
구슬은 모두 일곱 개. 그 안에 적힌 글자는 모두 비 우(雨)가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날씨를 관장하는 북두성과 칠원성군을 의미하였다. 왕실의 대사성이었던 성곤은 자신의 제자 일곱에게 칠원성군의 별호를 주고 각각의 구슬을 나눠 맡겼다. 서문은 雷(뢰), 진건은 霧(무), 이정은 露(로), 좌영은 霜(상), 현진은 雲(운), 적우는 雨(우), 그리고 윤설은 雪(설).
“그러나 우리가 지금 가진 것은 사형의 것, 적우와 설이의 것까지 세 개다. 내 것은 어디 있는지 알지만 찾을 수 없고, 이정과 현진의 것은 현진만이 알고 있어 찾을 방도가 없구나. 그리고 좌영의 것은 우영이 가지고 있는 듯싶다.”
진건은 차마 소소정과 그의 딸 이야기는 꺼낼 수 없어 에둘러 설명했다. 언젠가는 말해야 하겠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그의 왼쪽 어깻죽지에서 이미 소소정의 암기를 빼냈건만, 어쩐지 통증이 느껴지는 듯도 하였다.
“문은 일곱 개의 열쇠가 다 있어야만 열린다. 하여, 열쇠에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우리는 그곳이 영원히 묻히기를 바라고 있고, 열쇠는 단 하나만 제대로 지켜도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허나,”
진건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들의 눈앞에서 한껏 비아냥대던 조양의 얼굴이 떠오르자 온몸에 털이 바짝 곤두섰다. 그 뱀 같은 놈이라면 반드시 구슬을 찾아내 문을 따고야 말 것 같았다.
“좌영의 구슬 하나, 그리고 잃어버린 세 개까지 하여 넷. 이리 안일하게 굴다가 그곳이 발각된다면, 그리하여 수천 년의 역사를 빼앗긴다면, 려국은 진정 사라지겠지. 아니 우리 모두의 뿌리가 없어지는 것이란다.”
“열쇠를 다시 찾겠다는 말씀입니까?”
진건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무모하고 막막한 일인지 알기에 차마 운선에게까지 짐을 지워주고 싶지 않았건만, 이제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오라버니, 얼마나 어깨가 무거운지 잘 압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설 곳은 없어요. 모두가 목숨을 걸고 지켜온 이 나라를 고작 우리가 함부로 포기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네?”
윤설은 비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운선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의 손은 흡사 체한 것처럼 차갑고 축축했다. 몰랐던 진실을 알게 된 충격과 거대한 짐을 짊어지게 된 부담감 때문이리라. 너무나 공감이 되기에 진건도, 윤설도, 묵묵히 운선의 결정을 기다릴 뿐이었다.
“포기할 생각은 결코 없습니다. 아니, 이렇게 된 이상 제가 그곳을 찾아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직접 확인하겠습니다.”
설이의 눈이 금세 투명해졌다. 울지 않기 위해 연신 눈을 깜빡이면서도 운선을 향해 밝은 미소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의 짐을 내려줄 수는 없지만 나눠들 작정이었다. 설사 자신의 어깨가 무너져내리더라도 상관없었다.
“사부님께서 주화입마에 빠질 뻔한 이유 역시 그 열쇠 때문이었다. 조양은 우영의 팔을 잘라 열쇠를 뺏었다 했고 그것을 사부님께 보여주며 거래를 제안했다.”
“그렇다면 이미 조양에게 열쇠를 넘겨주었단 말입니까?”
조양의 손에 잡혔다면 우영이 실토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의 악랄한 고문은 심지가 굳은 운선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하물며 려국을 배신한 적이 있는 우영에게는 굳이 지킬 신념도 없었을 터였다.
“아니, 우영은 넘겨주지 않았다. 조양이 손에 들고 흔든 구슬에는 炎(염) 자가 적혀있었으니까.”
“설마…….”
진건은 다시금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우영이 무슨 마음으로 그리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조양에게 넘긴 것은 가짜가 틀림없었다.
“좌영이 지니고 있던 반지 속의 구슬은 霜(상) 자. 즉, 우영은 일부러 열쇠의 존재를 조양에게 폭로하여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려 했던 것 같다.”
“그럼 다음 목표는 우영에게서 열쇠를 찾아오는 일이군요.”
운선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미 쓸모없어진 우영을 조양이 아직도 살려둘 리 만무했다. 혹여 살려두었다 해도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을 텐데 과연 찾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어렵고 힘든 일이겠지. 허나, 지금은 하나의 열쇠라도 포기할 수 없구나.”
세 사람은 심란한 마음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특히 본의 아니게 운선에게 많은 책임을 지워준 진건은 미안함을 넘어 죄책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서문이 없는 지금, 그들에게는 오직 운선만이 희망이었다. 무공의 고하를 떠나 그만큼 려국을 이끌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운선아, 네 잘못이 아니다.”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뱉은 한 마디였다. 사형이었다면 훨씬 자연스러웠을 텐데, 뻣뻣하고 말주변이 없는 그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건은 용기를 내었다. 마지막 남은 가족을 잃은 운선에게 작은 위로라도 주고 싶었다.
“이 모든 결과는 우리 계획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조양을 간과했고, 심지어 나는 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누군가가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면 그것은 나다.”
그러자 설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교환할 인질을 놓친 이유는 오로지 자신의 과실이었다. 그 무거운 마음을 이제야 터놓고 얘기할 수 있으니 오히려 다행이었다.
“사형, 도대체 무슨 어이없는 말씀이세요? 일을 망친 사람은 접니다. 인질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제 탓입니다.”
운선은 바닥에 엎어져 울먹이는 설이에게 다가가 그녀의 등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어차피 모두가 부채감을 안고 살아가야 했다. 누구 한 사람의 몫이 아니었다.
“그리 따지면 다시 돌고 돌아 저의 죄가 됩니다. 우리 그냥 공범이 되는 것으로 해요. 려국을 다시 찾는 그 날까지 사형제들의 몫까지 버텨내겠습니다.”
진건은 그날 처음으로 운선에게서 익숙한 얼굴을 떠올렸다. 그것은 인자하고 현명했던 그의 주군, 백성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았던 려국의 마지막 왕, 창현의 모습이었다.
‘죽기 전에 우리의 꿈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사형.’
아련하게 올려다본 하늘 위로 반쯤 차오른 달이 눈이 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온전한 모양을 갖추고 말겠다는 굳은 의지를 품은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