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犬免之爭(견토지쟁)
“그런데 어떻게 탈출했단 말입니까?”
한철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대뜸 끼어들었다. 보현이 워낙 실감 나게 얘기하는지라 마치 자신이 그곳에 갇힌 기분이었다.
“우리는 무려 사흘을 꼬박 갇혀 있었습니다. 아무리 단련된 무인이라지만 점차 지치고 갈증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지요. 차라리 마교 놈들이라도 들여다보았으면 했건만, 쥐새끼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더군요.”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기정은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공포와 고통이었다.
***
불행인지 다행인지 바닥은 생각보다 부드러운 편이었다. 내공이 깊은 고수들이었기에 대다수는 타박상이나 골절로 그쳤을 뿐, 큰 부상은 없었다. 그러나 네댓 명 남짓은 그대로 목숨을 잃었다. 독 때문에 실신한 중에 무방비 상태로 바닥에 떨어진 탓이었다.
“제길!”
“빌어먹을!”
동료를 잃은 이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욕설을 뱉었다. 격한 감정을 가라앉히려는 발악이었지만 그렇다고 사정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열 평 남짓한 깜깜한 토굴은 춥고 습했다. 미끈한 벽면을 짚고 올라가기에는 높이 또한 까마득했다.
“망했다.”
용가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영락없이 마수에 걸렸으니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다른 수가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졸렬하고 비겁한 이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하고 괴성을 질렀다. 깊고 좁은 굴에 소리가 부딪쳐 처절한 메아리가 되었다.
“말려 죽일 작정이구나.”
바짝 마른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자고로 무인은 정정당당히 겨루어 명예롭게 생을 마쳐야 하거늘, 배고프고 목말라 죽는다니 수치스럽기 그지없었다.
“이제 다 틀렸습니다.”
보현의 어깨에 기댄 기정은 더는 버틸 기운이 없었다. 차라리 이 고통을 스스로 끝낼까 싶은 약한 마음도 들었다.
“물 한 모금만 마셨으면.”
눈가만 따끔할 뿐, 눈물도 나지 않았다. 애써 침을 삼켜 보았지만, 목이 찢어질 듯한 통증만 느껴졌다.
“물 한 모금에 은자 한 냥.”
그때였다. 기정의 발밑에서 허연 손이 쑥 튀어나오더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게 아닌가?
“꺄악!”
기정은 너무 놀라 그만 까무러치고 말았다. 보현이 사매를 받쳐 드는 동시에 검을 쑥 빼 들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누구냐?”
그러자 이번에는 손이 들어가고 허옇고 둥근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아니, 아니, 물 한 모금에 은자 두 냥.”
작은 얼굴에 꽉 찬 이목구비. 장난기 가득한 표정의 소년은 고개만 달랑 내민 채로 연신 키득거렸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다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건 또 무슨 음흉한 흉계인가?’
용가현은 이제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소년을 이용하여 경계심을 늦추게 한 후에 더 끔찍한 고문을 가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여 그의 앞으로 나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조금이라도 허튼수작을 부리면 일 장을 날릴 생각이었다.
“너는 누구길래 갑자기 나타나 엄한 소리를 하는 것이냐?”
“아이고, 무서워라. 설마 나를 때려죽이려고?”
소년은 부러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으나 표정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상대에 대한 경계심이 전혀 보이지 않는 태도였다.
“용문주님, 우리가 당장 죽게 생겼으니 일단 뭐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아이가 튀어나온 구멍이 탈출구가 될지 모르니 일단 잘 구슬려서 방도를 찾아보지요.”
보현이 슬쩍 가현에게 다가가 귀엣말을 전했다. 그녀 역시 아이가 의심스러웠으나 지금은 그보다도 이곳을 빠져나가는 일이 더 중요했다. 이보다 더 나빠질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상황이었다.
‘아이를 위협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혹 덫이라고 해도 잘 이용한다면 기회가 생기지 않겠는가?’
마음이 약해진 가현은 찬찬히 일행을 둘러보았다. 다들 한계에 다다른 얼굴이었다. 무작정 자신의 고집대로 우길 수는 없을 듯싶었다.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느냐?”
“일단 때리지 않는다 약속하세요. 그리하면 도와드릴지도 모르죠.”
소년은 짐짓 삐친 척을 하며 툴툴거렸다. 그러나 여전히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아까 물 한 모금에 은자 한 냥이라 했지요? 이걸 받아요.”
보현은 품에서 은자를 꺼내 소년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반질반질한 은자를 꽉 쥐고 주물럭거리던 소년은 구멍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방금 가격이 올랐지만 선자님이 친절하시니 넘어가지요. 여깄습니다.”
다시 나온 손바닥 위에는 작은 표주박이 놓여 있었다. 반쯤 차 있는 물은 정말 한 모금 분량이었다.
“고마워요.”
보현은 냉큼 표주박을 들어 기절한 기정의 입술에 갖다 대었다. 갈증이 극에 달했던 이들은 그 모습을 보고 나자 단숨에 소년 쪽으로 몰려들었다. 덕분에 그들 앞에 있던 용가현은 어깨가 쭉 밀려 중심을 잃고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나도 주게.”
“여기 은자가 있네.”
소년은 그 꼴이 재밌는지, 한참을 킥킥대더니 이윽고 몸을 움직였다. 하늘을 보고 누웠던 자세에서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돌려 턱을 괴고 엎드린 자세가 되었다.
“자자, 줄을 서세요. 제가 몸이 하나이지 않습니까?”
“으음.”
가현은 그 양이 못마땅하여 자신도 모르게 깊은 신음을 뱉어냈다. 어디서 나타난 놈인지 모르겠으나 태을신교 관계자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함정이라기엔 너무 경박하고 졸렬했다.
“자네, 우리가 이곳을 나가도록 도와줄 수 있나?”
한차례의 야단법석이 지나간 뒤, 가현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만약 아니 된다고 하면 소년을 구멍에서 끄집어낼 생각이었다. 구멍의 틈을 조금 벌리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여기 모두가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도와줄 수는 있지요. 허나 공짜는 안 됩니다.”
“뭐?”
“한 사람당 금덩이 하나! 뭐 없다면 그에 상응하는 다른 귀중품도 괜찮습니다.”
소년은 자기 할 말이 다 끝나자 아예 눈을 감고는 휘파람을 불었다. 조금도 양보할 마음은 없어 보였다.
“어쩌지요?”
“어쩌긴요, 이렇게 죽을 수는 없지요.”
고유생은 망설이는 용가현을 붙잡아 끌더니 나직하게 덧붙였다.
“딱 보아도 어린아이인 데다가 혼자인 듯하오. 일단 귀중품을 내어주고 빠져나간 이후에 아이를 처리하면 될 게 아닙니까?”
용가현은 무공도 모르는 소년을 상대로 사기를 지는 것이 영 찝찝했으나 일단 고유생의 의견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정파의 고수들은 너도나도 이성을 잃고 흥분하기 시작했다.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각자 귀중품을 찾아 자신의 몸을 뒤지더니 금세 번쩍번쩍한 금품이 바닥에 잔뜩 쌓였다.
“오오, 이 정도면 충분하네요.”
소년은 가지고 온 보자기에 그것들을 챙겨 넣더니 구멍으로 쏙 빠져나갔다. 보현이 놀라 옷자락이라도 붙잡으려 했건만, 어찌나 몸이 날랜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설마 사기를 친 건 아니겠지요?”
“허허, 기가 막히는군.”
그로부터 한 식경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걔 중에는 너무 쉬이 소년을 믿었다며 용가현의 섣부름을 원망하는 이들도 있었다.
“적반하장이 따로 없군요.”
가현의 옆에서 위로하는 보현 역시 초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돈과 귀중품이야 잃을 수 있지만, 영영 살길이 없어졌으니 황망할 뿐이었다. 그때,
툭!
천으로 엮은 밧줄 하나와 작은 망치가 구멍을 통해 들어왔다. 그리고 낭랑하고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구멍을 조금 넓혀 밧줄을 잡고 나오세요. 맨 앞에는 반드시 거기 계신 예쁜 선자님이 서시고 맨 뒤에는 저 못생긴 할아버지가 따라오세요.”
졸지에 못난이가 된 고유생은 버럭 화를 냈지만 아무도 반발하지 않았다. 일사불란하게 천을 잡은 그들은 이윽고 토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
“아니, 그 소년이 진정 탈출구를 열어주었단 말입니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한철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갑작스럽게 적의 함정에 나타난 소년이라니,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힙니다. 허나, 여기 계신 오대산검 형제 모두가 그를 직접 보았으니 결코 허상이 아닙니다.”
보현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내며 주변을 쓱 돌아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용가현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의심이 좀 풀린 눈치였다.
“허면, 고선배님의 말씀대로 소년을 붙잡았습니까?”
“그게…….”
보현은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소년 하나를 수십의 정파 고수들이 어쩌지 못했으니 새삼 수치스러웠다.
“소년은 천으로 만든 밧줄을 멀리서 당겼을 뿐, 그 후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통로가 너무 비좁아 망치로 부수며 이동하느라 차마 그를 잡을 새도 없었지요.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보현이 말을 잇지 못하자 기정이 나서 대신 마무리를 지었다.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기분이 들어 그들은 소년을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혹여 태을신교가 따라올까 봐 겁이 나 부리나케 산에서 내려온 게 전부였다.
“아무튼, 이리 살아 돌아왔으니 되었습니다. 또한, 이번 일로 태을신교가 큰 타격을 입었으니 여러분의 공이 무엇보다 크다 하겠습니다. 바로 토벌대를 꾸려 그들을 추적합시다. 이 위대한 경국의 땅에서 마교 놈들을 뿌리 뽑읍시다.”
장은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어나 사람들을 선동했다. 자신에게 불리한 말이 나오기 전에 화제를 바꾸기 위함이었다.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노려보는 고유생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태연스레 주먹을 불끈 쥐고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다행히 공명심에 취한 중소 문파의 장문들이 동조하여 장내는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태을신교를 몰아내자!”
“몰아내자!”
분노에 찬 용문파 제자들도 궐기에 합류하였다. 이제 장문인이 함께 있으니 두려운 것이 없었다. 용문파의 치욕을 갚고 형제들의 복수를 하리라 다짐하며 목이 찢어지도록 구호를 외쳤다.
“와아!”
떠들썩한 강호인들 사이에서 가은은 섬과 같았다. 누군가로부터 현진의 죽음을 전해 들은 순간, 주변의 모든 공기가 멈춰버린 기분이었다. 비로소 만난 어머니와의 추억은 고작 일각도 채 안 되는 동안이 전부였다. 이 모든 것이 해심밀경소, 그리고 이 와중에도 거짓을 꾸며대는 장은 때문이었다. 아니, 주제도 모르고 감히 려국의 보물을 탐하는 저 간악한 경국인들이야말로 그녀의 원수였다.
‘어머니, 두고 보세요. 은이가 반드시 복수해 드릴게요. 꼭 보물을 찾아 려국의 재건을 도울게요. 그리고 저 간악한 무리를 응징하겠어요.’
가은의 동그랗고 반짝이는 눈이 주변을 쭉 훑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두 사람에게서 그녀의 시선이 떠날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