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燕雀處堂(연작처당)
장은은 부러 상석을 비워두고 조양의 상태가 매우 심각함을 좌중에 알렸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맹주의 희생을 추앙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결코 권력에 관심이 없음을 재차 피력하면서도 태을신교의 악랄함을 역설했다. 일련의 참극에 크게 동요한 무림인들을 한층 더 부추기기 위함이었다.
“태을신공의 위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합니다. 반드시 강운선을 쫓아 경전을 되찾아야 할 것입니다. 다행히 칠원성군 중 둘이 더 죽었으니 마교 섬멸이 눈앞에 있습니다. 추격대를 편성하여 마무리를 짓지요.”
“맞습니다.”
“맞습니다.”
장은의 선동에 모두 한껏 흥분하여 함성을 질렀다. 오대산검의 피해도 막심하긴 하였으나 태을신교의 몰락을 직접 보았으니 기쁠 만도 하였다. 게다가 태을신공. 무려 무림 맹주까지도 위협한 전설의 무공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맹주님의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이를 어찌합니까? 장문주께서 임시로라도 직(職)을 맡아주시면 저희가 나서 선발대에 서겠습니다.”
성질 급한 한철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에 질 새라 설이곡이 앞으로 나섰다.
“맞습니다. 이번 일은 황석파의 공이 크니 장문주의 계책에 따라 움직이겠습니다. 저희 또한 기꺼이 추격대가 되겠습니다.”
“와아!”
두 장문을 지켜보는 장은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이것이야말로 일석이조의 수가 아니던가? 사실 절벽 아래에서 조양과 성곤이 협상이라도 했더라면 일이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유리해지지 않았을 터였다. 두 늙은이의 자존심과 고집이 되레 장은을 도와주게 된 셈이었다.
애초에 그는 조양과의 약속을 지킬 마음이 없었다. 성곤을 놓치더라도 조양과 일전을 벌여준다면 그를 맹주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마진건과 운선이 모두 뛰어내릴 때까지 기다려, 뒤늦게 나타난 것도 다 계획의 일부였으니까.
‘아무리 조양이라도 세 명의 고수를 감당하기는 어렵지. 아까 보니 심맥이 상한 듯하니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야.’
이제 모든 결정권은 자신에게 있었다. 조양을 잘 구슬려 비밀을 알아내면 더욱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상관없었다. 저 늙은이가 죽으면 오대산검의 수장은 뻔히 황석파의 차지가 될 것이었다.
“맹주님!”
모두가 승리에 취해 있을 때, 제 문파의 제자들 네댓 명이 헐레벌떡 혜윤당으로 뛰어 들어왔다. 꽤 쌀쌀한 날씨인데도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은 것을 보니 어지간히 놀랄 일인 모양이었다.
“문주님! 문주님!”
“아니, 무슨 일이냐?”
장은은 불쾌했으나 짐짓 아닌 척, 인자하게 말을 받았다. 기껏해야 주변의 문파가 찾아와 합류하겠다는 소식이리라 짐작했다.
“왔습니다. 돌아왔어요.”
“뭐?”
용문파의 제자들은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용문주님이 돌아오셨습니다.”
혜윤당은 일순간 정적이 되었다. 오직 소식을 전하러 온 제자들의 숨소리만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태봉으로 떠났던 토벌대가 돌아왔다고요.”
“뭐?”
그제야 여기저기서 함성이 쏟아졌다. 문파 별로 나뉘었던 대열이 금세 흐트러지고 저마다 문밖을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빼 들었다. 그중 몇몇은 울음을 터뜨리고 몇몇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말도 안 돼.’
장은은 남몰래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고유생은 살아 돌아오면 아니 되었다. 그 늙은이라면 자신의 흉계를 눈치채고도 남았으리라.
“문주님.”
소소정은 보현과 기정의 반가운 목소리에 자리에서 떨치고 일어났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깊게 베인 팔의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매.”
두 사람을 둘러싼 선운검파의 제자들은 가쁨의 눈물을 흘렸다. 혹시나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현실이 되자, 반가움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은 다른 문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용가현이 들어서자 용문파의 모든 제자가 바닥에 엎드려 오열하였다.
“문주님.”
“사부님.”
그는 퍽 초췌한 모습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형제들을 훑어보는 그의 눈은 당장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처럼 붉게 충혈되었다.
“아아,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냐?”
아우의 싸늘한 주검 앞에서 용가현은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무사히 살아 돌아온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제 몸 같던 아우들이 죽었고, 수백 년을 지켜온 문파가 하루아침에 재가 되었으니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문주님.”
흥겨웠던 장내 분위기는 용가현의 등장 이후 다시 초상집이 되었다.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오열이 한동안 진정될 줄을 몰랐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장은은 긴 소매를 들어 올려 연신 눈가를 찍어 눌렀다. 그러면서도 곁눈질로는 고유생과 정은률의 모습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숨기는 일이 여간 어렵지 않았다.
“나를 찾나?”
‘역시.’
장은은 씁쓸한 미소를 소매 뒤에 감추었다가 낯을 싹 바꾸고 고개를 들었다. 죽은 줄 알았던 형제가 돌아와 감격에 겨운 표정이었다.
“사숙님, 참으로 다행입니다. 사숙님이라면 반드시 돌아오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흥, 퍽이나.”
고유생은 속이 비비 꼬이는 기분이었으나 딱히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장은의 숨은 의도를 몰라서가 아니었다. 이번 일로 약점을 잡아 다시금 장은의 위에 올라서기 위함이었다. 황석파를 장악할 수 있다면 이 정도 분노쯤은 감추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헌데, 은률은요?”
한참 동안 호들갑을 떨던 장은은 그제야 뭔가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 모두가 살아 돌아왔다면 은률이 돌아오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건방진 녀석은 생사를 알 수 없다. 천둥벌거숭이처럼 먼저 뛰쳐나가더니만 돌아오지 않았구나.”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고유생의 얼굴에 찝찝함이 묻어나왔다. 비록 마음에 차지 않는 아이였으나 그렇다고 죽기를 바란 적도 없었다. 결국, 은률의 흔적을 찾지 못하고 돌아왔으니 죄책감도 없지 않았다.
“자세히 이야기해보십시오. 은률은요?”
아무리 다그쳐도 고유생이 입을 다물고 있자, 장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옆에 있는 선운검파의 보현과 기정에게로 향했다. 저들은 이 답답함을 풀어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장문주님, 정대협은 저희와 함께 있지 않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정말 송구합니다.”
보현이 공수하며 읍하자 기정도 주춤주춤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토벌대의 대부분이 돌아왔건만, 황석파의 핵심 인물을 두고 왔으니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게 다 어찌 된 일입니까?”
장은은 심란하여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살아 돌아올 거라 믿었던 은률은 없고 죽으라고 보낸 고유생이 나타났으니 속이 바짝 타들어 갔다. 어제 먹은 음식이 목구멍에 걸린 기분이었다.
“저희는 태을신교의 함정에 빠졌습니다.”
보현이 이야기를 시작하자 소란스러웠던 장내가 서서히 조용해졌다. 오열하던 용문파마저도 점차 그녀의 얘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정은률이 동태를 살피겠다 뛰쳐나간 다음에, 나머지 일행들은 사주를 경계하며 자리에 머물렀다. 그가 단독 행동을 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이왕 나섰으니 뭐라도 알아 오겠지 싶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어쩐지 연기가 점점 짙어지는 듯하더니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독이 틀림없습니다.”
보현은 사저인 기정의 어깨를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른 고수들의 상태도 살피니 피차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냄새가 역하지 않아 방심했던 것이 패착이었다.
“나는 아직 견딜 만합니다. 구역감이 올라오는 형제들은 안쪽에 앉아 운기조식하십시오. 상태가 나쁘지 않은 이들이 엄호하겠습니다.”
용가현의 지시에 열 명 남짓한 고수들이 일행을 빙 둘러쌌다. 그나마 독에 내성이 있거나 내력이 웅혼한 황석파와 용문파의 장로급 인사들이었다.
“여기서 벗어나야 하지 않겠소?”
용가현의 옆에 선 고유생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아직은 괜찮았으나 언제까지 버틸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나마 기력이 있을 때 움직이는 것이 더 나을 듯싶었다.
“허나, 연기와 안개가 심해 무리가 함께 이동하기 어렵습니다. 혹여 흩어졌다가 더 큰 함정에 빠질지 모르니 난감합니다.”
용가현은 본래 소탈하고 허세가 없는 사람이었다. 하여 연륜이 있는 고유생에게 허심탄회하게 도움을 구할 마음이었다.
“용문주, 안타깝게도 모두를 구할 수는 없네. 각자 흩어져 살길을 찾았다가 다시 모일 수밖에. 혹 도태되는 이가 있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용가현은 반박하고 싶었으나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모두가 끝이었다.
“그리합시다.”
드디어 결심이 선 용가현이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형제들! 저쪽에 붉은 기와가 보입니까? 유독 선명한 것을 보면 연기가 미치지 못하기 때문일 테지요. 하여 흩어졌다가 저기서 만납시다.”
탄식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렇게 당하느니 어떻게든 살길을 도모하는 편이 더 나았다.
“자, 셋을 세면 다른 방향으로 달립시다. 하나,”
보현과 기정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당장이라도 구토를 할 정도로 매스꺼웠지만, 지금은 어떻게든 참아야 했다.
“둘,”
고유생의 쭉 찢어진 눈이 점점 더 가늘어졌다. 경공에는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다. 다만 어떤 불길한 생각 때문에 갈등 중이었다. 태을신교는 우리가 이곳에 급습할 것을 미리 알고 있던 게 분명했다. 심지어 시기와 경로까지도. 하여 미리 대비하였으니 함정을 빠져나가기 쉽지 않을 터였다. 제 한 목숨 살기 위해서는 혼자서라도 태봉을 벗어나는 것이 더 나을 듯싶었다.
“셋!”
흙먼지를 일으키며 뜀박질이 시작되었다. 수십의 고수들은 각자 선택한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고유생 역시 있는 힘껏 연기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는 동료들의 생사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성 바깥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 길로 태봉을 벗어나 장은의 멱살을 쥐러 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후두둑!
갑자기 땅이 훅 꺼지더니 디디고 있던 발이 허공에 붕 뜨는 것이었다. 서둘러 다음 발을 길게 뻗어보았으나 어림없었다. 거의 열 평이 넘는 원이 한꺼번에 푹 꺼지니, 그 누구도 재앙을 피하기 힘들었다.
“으악!”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깜깜한 토굴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동안 느낀 공포는 생전 처음 겪는 충격이었다. 몇몇은 처절한 비명을, 또 몇몇은 그대로 실신하였다. 용가현을 비롯한 몇은 허공을 휘저으며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 했지만, 속절없이 떨어지는 와중에 희망은 없었다.
“퍽!”
***
*** 연작처당(燕雀處堂):
처마 밑에 사는 제비와 참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