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105화 (105/209)

105화. 打草驚蛇(타초경사)

운선이 태을신공을 배웠으리라 짐작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허나 기껏해야 이서문이나 적우 정도로 여겼지 성곤과 비등한, 어쩌면 그 이상의 완성도를 갖추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조양은 반탄지공으로 입은 타격보다도 정신적인 충격이 훨씬 컸다. 너무 기가 막혀 한동안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조양!”

운선의 외침은 협곡에 부딪히더니 메아리가 되어 수 갈래의 소리로 되돌아왔다. 여러 말이 필요 없었다. 눈앞에 있는 저 흉한은 스승의 살인을 사주하고, 사형제들을 죽였으며, 려국의 동포들을 앗아갔다. 오직 그의 가슴 속에는 복수심만이 가득했다.

“으음.”

조양은 뻐근한 가슴을 왼손으로 쓱쓱 문질렀다. 고작해야 타박상을 입은 정도였다. 운선이 그의 사형을 보호하기 위해 장력을 흐트러뜨리다 보니, 내력의 일부만 튕겨낸 덕이었다. 그러나 이미 두 고수를 상대한 조양에게는 남은 체력이 없었다.

‘내력으로는 상대하기 버겁겠다. 그렇다면…….’

다시금 활인검을 꽉 그러쥐었다. 검법만으로도 한 시진은 거뜬히 버틸 자신이 있었다. 그 사이에 아군의 지원이 온다면 영 불가능한 일은 아니리라.

“상산(象山)”

조양은 때마침 날아오는 주먹을 향해 검기를 방출했다. 평소보다 묵직함은 덜했으나 그만큼 속도는 빨라졌다. 게다가 검신이 전혀 회전하지 않는데도 검 끝의 움직임은 화려했다. 세 갈래로 쪼개져 각각의 그림자를 만들어낸 검은, 상대가 내지른 두 주먹의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촤락!

긁히는 소리와 함께 운선의 오른쪽 팔뚝 안쪽에서 핏방울이 터져 나왔다. 스치기만 했을 뿐인데도 검날의 두께 때문에 꽤 깊고 긴 자상이 만들어졌다.

“곡우(穀雨)”

그러나 그 정도 상처에 물러날 운선이 아니었다. 부상으로 덜덜 떨리는 오른손을 왼손이 감아쥐더니 크게 반원을 그리며 상대의 명치 쪽으로 뻗었다. 주먹이 만들어낸 회오리가 어찌나 뜨겁고 거센지, 물기를 머금은 흙이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날아올랐다.

“흥! 너 따위에게 당할 리가 없지.”

위력적인 권풍이었으나, 조양에게는 크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의 영명권은 마세풍에 비하면 아직 미흡했다. 또한, 신공을 많이 운용한 운선이기에 이미 지쳤던 탓도 있었다. 조양은 고개만 옆으로 돌려 몰아쳐 오는 권풍을 살짝 피해버렸다.

“규구(規矩)”

이번에는 활인검의 반격이었다. 대각선을 교차하는 검의 움직임에 따라 허공에는 큰 사람인(人) 자가 그려졌다. 그 끄트머리에서 힘을 집결한 검기는 부드럽게 휘어지며 상대의 어깨를 수직으로 갈라놓았다. 상처 때문에 한쪽 팔이 자유롭지 못한 운선의 약점을 파고든 공격이었다.

“청명(淸明)”

뜨거운 바람이 훅 끼쳐와 조양의 안면을 덮쳤으나 아까의 위력에 반도 미치지 못했다. 신공은 상대의 내력을 되받아치는 신통함이 있는 한편, 본인의 체력도 곱절로 갉아먹었다.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인 운선에게는 시간을 끌수록 불리했다. 안타깝게도 조양은 그 사실을 운선보다도 먼저 깨달았다.

‘전화위복이군.’

버티다 보면 기회가 오겠지 생각하던 차였건만, 운선의 약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으니 그야말로 행운이었다. 조양은 방어 일변도의 서른여덟 개의 초식을 번갈아 사용하며 상대의 권풍을 완전히 차단했다. 흥분한 운선이 내력을 아끼지 않으니 이미 자신의 승리와 다름없었다. 화수분이 아닌 이상 내력은 곧 바닥이 날 터였다. 한 식경이면 충분했다.

“처서(處暑)”

챙!

회심의 일격이 활인검에 튕기자 운선은 초조함이 극에 달했다. 여기저기 찢기고 베인 상처에서 쉴 새 없이 핏물이 맺혔다.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으나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똑.

무심코 운선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나뭇잎을 타고 흘러내린 굵은 물방울 하나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작은 웅덩이에 떨어졌다. 손바닥만 한 파장이 은은하게 번지더니 물에 비친 운선의 얼굴을 못난이처럼 일그러뜨렸다.

“수월심(水月心), 월영(月影)이 일그러지지 않으려면 언제나 수면이 고요해야 한다.”

어디선가 현진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운선은 성급하게 내지른 두 주먹을 차분하게 거둬들였다. 눈을 어지럽히는 검광을 피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조급했던 마음이 가라앉고 온몸을 찌르는 듯한 고통이 사그라들었다.

“오수(悟修)”

조양의 초식은 방어에서 공격으로 바뀌었다. 대각선으로 몸을 보호하던 검은 일직선으로 방향을 틀었다. 두 개의 초식을 연달아 구현하면서도 마치 하나처럼 자연스럽게 펼쳐냈다. 어느새 검 끝이 운선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여기서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대로 얼굴을 관통할 참이었다.

“운선아!”

당황한 진건의 고함과 함께 운선의 몸이 순식간에 뒤로 확 젖혀졌다. 그와 동시에 왼손에서 뱀같이 구불구불한 무언가가 활인검을 단단히 휘감았다. 여태 소매 속에 감추고 있던 보검, 수월이었다.

“아앗!”

당황한 조양은 서둘러 검을 당겼으나 어찌 된 일인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덩굴에 완전히 감긴 것처럼 옴짝달싹 못 하고 허공에 멈춰버렸다.

“대서(大暑)”

활인검을 수월이 잡아두는 동안, 운선의 오른손은 주먹으로 바뀌었다. 안 그래도 뜨거운 기운이 태을신공의 기운까지 담자 불덩이가 되었다. 당장이라도 손을 태울 것처럼 주먹 안에서는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차마 조양이 피하기도 전에 그의 가슴팍 정중앙에 쭉 뻗쳐 들어갔다.

“억!”

재빨리 반대편 손바닥으로 주먹을 받아내었지만, 완전히 방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뒤로 주르륵 미끄러진 조양은 한 장 밖에 있는 소나무 줄기에 부딪히고 나서야 몸을 가눌 수 있었다.

“컥!”

붉은 피를 울컥 뱉어낸 그의 입가는 온통 피범벅이었다. 운선의 주먹을 잡은 왼손바닥은 불에 달군 인두로 지진 것처럼 피부가 다 벗겨졌다. 필부(匹夫)였다면 그대로 절명이었다.

‘드디어 완공에 다다랐구나.’

초조한 마음으로 대결을 지켜보던 성곤의 얼굴에 흐릿하게 미소가 떠올랐다. 기혈이 뒤틀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운선의 일취월장한 실력을 보고 나니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에게도 버거운 태을신공이었다. 5단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왜 자신은 완공에 이르지 못하는지 알 수 없었다. 오히려 무(無)에서 시작했기에 완(完)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그 또한 오늘에서야 깨달은 것이었다.

“으음.”

조양은 재빨리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최대한 신공의 화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숨을 크게 들이쉬자마자 부질없는 짓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시묵공으로 누르기에는 이미 심맥(心脈)까지 상한 듯했다.

‘제길, 여기서 이대로 죽는 것인가?’

설마 저 애송이에게 당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조양은 참을 수 없이 수치스러웠다. 진작에 죽여버려 화근을 없앨 걸 하는 후회도 밀려왔다. 목표까지 고작 한 걸음 남았을 뿐인데, 원통하고 억울했다.

“마지막이다.”

운선은 여전히 활인검을 감싸 안고 있는 수월을 가볍게 흔들었다. 똬리를 튼 뱀이 제집을 찾아가듯, 검은 기특하게도 주인의 왼쪽 소매 사이로 휘리릭 감겨 들어갔다.

“월영(月影)”

툭!

툭!

수월이 다시금 둥글게 휘어나오는 찰나, 여덟 번의 굵은 타격음이 좁은 골짜기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곧이어 수십 개의 발 구름 소리가 바위벽을 쿵쿵 쳐내려오는 것이었다.

“운선아.”

교도들의 부축을 받아 겨우 몸을 움직인 성곤이 나직하게 그를 불렀다. 운선은 그 부름의 의미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딱 한 초식이면 끝날 것 같았기에 검을 쉽게 거두지 못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양어깨에 사형제들을 짊어진 진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운선은 샛노래진 현진과 서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수월의 검신은 그의 소매 속으로 사라졌다.

“하하하.”

운선의 쓸쓸한 뒷모습이 마지막이었다. 살아있는 이들이 죽은 이의 흔적도 지우고 사라져, 협곡은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완전하게 비워졌다. 다만 홀로 남은 조양의 웃음만이 공허한 협곡 안을 가득 채웠다.

“조양아, 조양아, 참으로 가엽구나.”

허공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모멸감과 수치심만이 남아 있었다. 지금까지 쌓아왔던 명성도, 두타공파를 오대산검 최고의 문파로 키워온 성취감도 한순간에 물거품이 된 것 같았다.

어느덧 초라하게 가늘어진 빗방울들이 그의 눈 안으로 드문드문 떨어졌다. 따갑고 시렸지만 피하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고 모른 체하기에는 이 굴욕이 너무 참혹하고 비통했다. 반드시 저들을 찢어발겨 이 신성한 땅에 남겨 두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

“맹주님, 괜찮으십니까?”

개인 처소에 찾아온 장은의 태도는 살갑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조양은 당장이라도 그의 모가지를 비틀고 싶은 심정이었다. 성곤과 담판을 지을 동안 나머지를 맡아달라 그토록 신신당부했건만, 일이 다 끝난 뒤에야 슬금슬금 나타나다니. 의심의 여지 없이 황석파의 기만이요, 배신이었다.

“태을신공은 참으로 무서운 무공이군요.”

“어째서 강운선이 나타났음을 나에게 말하지 않았는가?”

너스레를 떠는 장은을 향해 조양이 일갈했다. 인제 보니 의도적으로 강운선의 존재를 숨겼음이 틀림없었다. 미리 알았더라면, 결코 이리 쉽게 당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계획의 실패는 모두 이 교활한 놈의 노림수 때문이었다.

“앗, 제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이런, 요즘 나이를 먹어 그런지 자꾸 깜빡깜빡하지 뭡니까? 늙으면 죽어야지요.”

“장은!”

“이런, 이런. 그리 화를 내시면 다시 기가 뒤틀릴지 모르는데 괜찮겠습니까? 다행히 저는 스쳐 맞은 덕에 경상에 그쳤으나 맹주님께서는 긴 요양이 필요하실 듯합니다.”

세상 걱정스러운 말투였으나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불과 한나절 만에 서로의 처지가 바뀌었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는 오대산검을 이끌어갈 유일무이한 존재가 된 셈이었다.

“백형제, 스승님을 모시고 두타공파로 돌아가십시오. 뒷일은 제게 맡겨두시지요.”

장은은 호들갑을 떨며 자신을 노려보며 서 있는 형진에게 말을 붙였다. 조양이 중상을 입은 이 시점에서 두타공파는 그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세상 똑똑한 척하지만 어리숙하기 그지없는 애송이 따위는 무시해도 좋았다.

“허나 우리의 동맹은 유효하지요? 제가 성심껏 지휘하여 태을신교 놈들을 일망타진하겠습니다. 맹주님께서는 당분간 요양하시면서 몸을 추스르십시오.”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마친 장은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이제 그의 앞길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얄미운 늙은이에게 한 방 먹인 데다가 오대산검도 장악하게 되었으니 한편으로는 강운선이 꽤 고맙게 느껴졌다.

“형진아, 가까이 오너라.”

“네, 사부님.”

겨우 흥분을 가라앉힌 조양이 자신의 제자를 옆으로 불렀다. 이제 그에게 남은 패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수도에 가서 황제를 만나라. 이금이 역심을 품었음을 알리고 장은을 이용하여 태자를 모해 하려는 정황을 알려라.”

“네. 그리하겠습니다. 그런데 사부님은?”

조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숨을 쉴 때마다 송곳같이 뾰족한 무언가가 폐부를 찌르는 듯한 통증 때문에 당장 혼절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은 쓰러질 수 없었다. 그에게는 아직도 이뤄야 할 많은 과업이 있었다.

“부상은 별 것 아니다. 이대로 두타산으로 돌아가 우영을 처리해야겠다.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구나.”

의심 많은 그는 내내 성곤과 진건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불리하다 한들, 마음만 먹었으면 열쇠를 뺏을 수 있었을 텐데 그리하지 않았다? 이 부분에서 막힌 생각이 좀처럼 나아가지 않으니 직접 확인해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품속에서 황제에게 올릴 서신을 꺼내 형진에게 건넸다.

“잘 전하고 오너라.”

형진은 서찰을 가슴에 고이 품고 침상 아래 무릎을 꿇었다. 위험한 상황에서 사부를 모시지 못하는 불충을 사죄하기 위함이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 타초경사(打草驚蛇):

풀을 두드려 뱀을 놀라게 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