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狡免三窟(교토삼굴)
찬란한 검광도, 화려한 동작도 아니었다. 고작 두어 번 감겨 들어오는 초식이었건만, 조금도 단순하지 않았다. 조양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검신에 담긴 웅혼한 신공이 주변의 공기까지 바꿔놓은 모양이었다.
“오수(悟修)”
내력을 넣을 새도 없이 가까스로 태일검을 받아낸 조양의 팔이 덜덜 떨렸다. 예상과 달리 성곤의 내상은 이미 다 나은 듯했다. 이대로 맞붙는다면 괜한 시간 낭비만 할 뿐, 아무 이득도 없었다.
“교주님, 정녕 거래는 아니 하실 작정입니까?”
“흥! 너 따위와 무얼?”
성곤의 검은 더 빠르고 묵직하게 허공을 갈랐다. 조양이 운지행으로 피하지 않았다면 필시 몸이 두 동강이 날 뻔한 일검이었다.
“후회할 텐데?”
“개수작 부리지 마라!”
이리저리 몸을 피하기 바쁜 조양과 달리, 성곤의 공격은 점점 더 살벌해졌다. 어떻게든 이놈을 제압하여 제자 한 명이라도 구해야 한다는 일념이었다. 그가 뭐라 지껄이든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딸랑!
그때 조양이 왼쪽 소매를 걷어 손목을 좌우로 흔들었다. 팔찌에 달린 작은 방울이 요란스럽게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교주님, 이게 보이십니까?”
“아아…….”
흐릿한 날씨에도 영롱한 빛을 발하는 작은 구슬. 구슬 속에서는 선명하게 ‘炎(염)’ 자가 보였다. 유심히 구슬 속을 바라보던 성곤의 얼굴이 점점 험악하게 변해갔다. 아무리 그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정체를 모를 수는 없었다.
“형의 유품이라고 죽어도 내놓지 않기에, 아예 손목을 끊었지요. 막상 제가 가지고 보니 왜 그리 처절하게 지켰는지 이해가 가더이다. 참으로 아름답지 않습니까?”
“네 이놈!”
이성을 잃은 성곤의 눈이 순식간에 충혈되었다. 당장이라도 피눈물을 쏟을 것처럼 새빨갰다. 조양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여태 방어에만 급급했던 활인검을 높이 쳐들더니 빗줄기를 가르며 상대를 향해 뻗었다.
챙!
챙!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자 두 사람 다 말이 없어졌다. 내내 욕을 내뱉던 성곤도, 조롱을 멈추지 않던 조양도 입술을 꾹 다물고 검에 집중했다.
‘얼굴에 푸른빛이 도는 것을 보니 기가 역류했군. 예상이 적중했음이야.’
조양은 내심 쾌재를 불렀으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상대가 전력을 다하도록 유도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태을신공은 대단한 무공임은 틀림없지만, 그만큼 위험 요소가 많았다. 정신력이 흐트러진 상태에서 무리하게 운공을 한다면 필경 감당해내지 못하리라.
“으음…….”
백여 합을 부딪치고 나서는 성곤의 손놀림이 눈에 띄게 무뎌졌다. 공격 일변도였던 태일검의 초식이 점점 활인검을 막는 데 급급해졌다. 두 검 모두 일반적인 검보다 묵직했으므로 한 번의 실수도 치명적이었다. 결국, 수세에 몰리는 쪽이 뚜렷해졌다.
조양의 공격은 빠르고 거셌다. 팔의 반경을 넓혀 힘을 더하면서도 속도는 조금도 줄이지 않았다. 그만큼 검신에 더 많은 내력을 주입한 덕분이었다. 그에게도 이번 공격이 승부수였다. 내상이 다 낫지 않은 몸으로는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양지(良知)”
성곤의 등 뒤로 돌아선 조양은 활인검을 크게 휘두르며 왼쪽 옆구리를 접어 몸을 굽혔다. 운지행의 보법으로 하체를 보호하는 동시에 상체를 최대한 움직여 상대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시묵공을 잔뜩 머금은 검은 우렁찬 굉음을 내며 허공을 갈랐다.
챙!
다행히 태일검으로 막아내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검을 막은 것이었다. 상대의 내력의 5할 이상을 몸으로 받은 성곤은 더는 참지 못하고 울컥 선혈을 뱉어냈다. 평소였다면 받은 힘을 고스란히 튕겨내어 곱절로 돌려주었을 테지만 이미 평정심을 잃은 터라 불가능했다.
“교주님, 다시 생각해보시지요. 남은 열쇠는 어디 있습니까?”
“네 이놈!”
검을 사이에 두고 노려보는 그의 눈에는 분노의 불길이 이글거렸다. 흥분하여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순간부터 이미 패배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 철천지원수의 목은 따리라 마음먹었다.
“네놈의 명줄을 반드시 끊어놓겠다!”
“과연, 가능하시겠습니까?”
조양의 얇은 입술이 한쪽으로 쭉 찢어졌다. 상대를 향한 조롱과 연민을 담은 비웃음이었다.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으나 그의 몰골은 처참했다. 실핏줄이 다 터져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검붉은 얼굴은 마치 다문천왕(多聞天王)과 같았다. 자신의 그릇에 담지도 못할 신공을 익힌 대가가 바로 이 모습이었다.
후두둑.
털썩
그때였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살짝 진동했다. 화들짝 놀란 조양은 일단 뒤로 물러나 주변을 살폈다. 혹 숨겨둔 다른 패거리가 있는 것은 아닌지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아아”
그의 눈에 바닥을 뒹구는 흑의인 셋이 들어왔다. 그들 모두 동작이 굼뜬 것으로 보아 어디 한 군데씩은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듯이 보였다. 속도를 최대한 줄였음에도 절벽의 높이가 워낙 높아 충격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 모양새였다.
“설마…….”
조양은 굵고 하얀 눈썹을 잔뜩 구기며 절벽 위쪽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다시 한 뭉치의 검은 점이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아뿔싸! 태을신공을 익힌 이가 또 있구나. 하지만 이서문이 아니라면 누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았다. 고개를 연신 갸우뚱하는 조양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렇게 되면 위험한 쪽은 오히려 자신이었다.
“교주님!”
하나둘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교도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조양을 포위했다. 그들은 오직 교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본인의 안위는 돌보지 않았다. 어차피 절벽에서 몸을 던지는 순간 죽음을 각오했기 때문이었다.
“저놈을 놓치면 안 된다!”
성곤의 일갈에 흑의인들의 간격이 한층 촘촘해졌다. 조양이 머뭇거리는 사이 수가 점점 늘어나 좁은 협곡을 완전히 둘러쌌다. 그야말로 인간 담벼락이 된 셈이었다.
휙!
“억!”
조양이 소매를 크게 휘두르자 우측 가장 전면에 섰던 흑의인 둘이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굵은 대침이 한 치에 오차도 없이 그들의 미간 정중앙에 박혀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방어를 위한 최대한의 발악이었을 뿐이었다. 아무리 무림 맹주라지만 겹겹이 쌓여 위협하는 인간 벽을 뚫을 재주는 없었다.
“어디 죽일 수 있음 죽여 보아라.”
물론 조심스럽기는 양쪽 다 마찬가지였다. 섣불리 움직이기에는 상대가 너무 강했다. 교주의 명만 기다리며 대치 상태를 지속하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조양!”
굵고 거친 목소리와 함께 덩치 큰 사내의 인영이 덮쳐왔다. 긴 창을 휘두르는 그의 모습은 거대한 들짐승 같았다. 마지막 차례로 절벽을 내려온 마진건이었다.
“으아아아!”
아군도 베어버릴 것처럼 미친 듯이 창을 휘두르는 진건 때문에 협곡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서 있는 스승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나마 간신히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끊어진 것이었다. 오직 조양을 죽이고 말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그는 그저 살인귀와 다름없었다.
“흥!”
조양은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이 좁은 공간에서 겹겹이 싸여 옴짝달싹 못 하기보다는 미친 들소와 한판 붙는 게 훨씬 나았다. 저놈만 제압하면 분명 수가 생길 터였다. 그는 누구보다 적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검귀의 역린. 그것은 그의 제자들이었다. 하물며 자신을 배신하고 떠난 우영의 죽음에도 평정심을 잃는 스승이 성곤이었다.
“상산(象山)”
잠시 모아두었던 장력을 한꺼번에 방출하자 어마어마한 기운이 쏟아졌다. 진건이 창으로 크게 원을 그려 막았으나 안면으로 불어닥치는 뜨거운 바람을 완전히 차단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태일광명(太一光明)”
제자의 위험을 확인한 성곤은 남은 힘을 끌어모아 태일장을 출수했다. 그러나 고작 3할도 되지 않는 내력으로는 교도들을 전부 구할 수 없었다.
퍽
“으악!”
서너 명의 교도들이 차마 받아내지 못하고 흘러나간 장력에 갈대처럼 스러졌다. 진건 역시 몸을 온전히 보호하지 못하고 어깨를 내어주고 말았다. 결국, 왼쪽 무릎이 꺾인 채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진건아!”
성곤이 다시금 울컥 선혈을 토했다. 아까보다도 짙게 검은 것이, 내상이 더 심각해진 것 같았다.
‘이 자리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놈을 그냥 보내지 않겠다!’
진건은 바닥에 미타를 지지하여 천천히 일어났다. 왼쪽 어깨에 박힌 소소정의 구슬 주변에는 독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왼쪽 팔은 완전히 마비되어 감각이 없었다.
휙, 휙!
미타의 속도는 현저히 줄었으나 여전히 위력적이었다. 회전을 거듭할수록 창날의 푸른빛이 잔상을 남겨 하나의 원을 만들어냈다. 그 사이로 물기를 머금은 바람이 점차 소용돌이가 되었다. 중앙은 마치 거대한 아귀의 입처럼 자잘한 주변의 것들을 빨아들였다.
“아주 재밌는 무공이군요.”
웃음기 가득한 비아냥과 달리 조양은 자세를 고쳐 잡았다.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가장 무서운 초식은 방어를 고려하지 않는 공격이었다. 진건의 저 무식한 몸짓이 바로 그것이었다.
조양의 양손이 단전 아래로 향했다. 미지근하고 묵직한 기운이 손바닥으로 서서히 모였다. 뜨거워지는 찰나를 놓치지 않고 다시금 손을 평행하게 끌어당겼다. 늑골 바로 아래까지 도달했을 때, 수인을 만들어 양쪽으로 쭉 뻗었다. 그 두 팔을 가슴 앞으로 모으는 순간이 마진건을 향하는 일장이 될 것이었다. 그야말로 남은 내력의 대부분을 쏟아붓는 필살의 공격이었다.
“심지(心智)”
조양이 뻗은 수인을 따라 물방울 뭉치가 만들어졌다. 얼핏 보면 거대한 물기둥이 미타의 검은 구멍 사이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진건의 창은 세차고 굵은 공기 덩어리를 감당해내지 못했다. 수 초 만에 원이 이지러지더니, 좌측 하단부터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탓에 회전이 완전히 멈춰버리자 조양의 다음 일 장이 연달아 도착했다.
“심행(心行)”
조양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심지심행(心智心行). 쌍둥이 같은 두 번의 일장은 시묵공 중에서도 최상위 초식이었다. 내력 소모가 워낙에 큰 무공이기에 평상시라면 절대로 쓰지 않았겠으나, 지금은 여유를 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그에게도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진건아!”
성곤의 부릅뜬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 떨어졌다. 다음 상황은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미타가 이미 방어할 의지를 잃은 상태에서 주인을 지켜줄 리 만무했다. 일장이 이대로 가슴에 명중한다면 그대로 절명이었다. 정작 그는 주화입마에 빠져 한 발자국도 뗄 수 없었다. 이 막장의 원흉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퍽!
“억!”
자신만만하던 조양의 얼굴에 경악과 공포가 번져 나갔다. 거의 완벽하게 구사한 심지심행은 진건이 아닌 다른 이의 가슴을 강타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거대한 바위를 내리친 것처럼 두 손이 저릿하더니, 출수한 장력이 고스란히 되돌아왔다. 그 고통은 오롯이 본인의 몫이었다.
“강운선!”
조양과 진건의 사이를 가로막아 선 이는 운선이었다.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그의 눈동자에는 오직 조양, 단 한 사람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 교토삼굴(狡免三窟):
교활한 토끼는 숨을 세 개의 굴을 파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