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牽强附會(견강부회)
절벽에 튼튼한 여덟 개의 밧줄을 내리는 데에는 일각도 걸리지 않았다. 방금까지도 몸을 사리던 정파의 고수들이었지만, 장은의 일장 연설이 끝난 후에는 너도나도 내려가겠다 아우성쳤다.
‘아무리 사부님이라도 수십의 적을 홀로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게다가 강운선까지 합류했으니 위험한 상황일지도 모른다.’
형진은 어떻게든 회복하기 위해 기를 운용해 보았다. 그러나 숨을 들이쉴 때마다 배꼽 아래쪽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루 이틀 요양한다고 해서 나아질 부상은 아닌 듯싶었다.
“백형제,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맹주님이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습니까? 게다가 모두 경전에 눈이 멀어 목숨이라도 내놓을 것 같으니 우리가 나설 필요도 없겠습니다.”
어느새 다가온 장은이 연민을 가득 담은 눈으로 형진을 내려다보았다. 그를 향한 감정은 반쯤 진심이었다. 몸을 사렸기에 망정이지 폭주하는 이서문을 상대했더라면 자신도 같은 신세가 됐을지도 몰랐다. 반면 그를 보는 형진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여태 어디 있다가 지금 나타나신 겁니까?”
“뭐, 보시다시피 크게 다쳐 거동이 어려웠지요.”
“흥!”
날 선 형진의 질문에도 장은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이 철없는 애송이의 비아냥쯤이야 아무렇지도 않았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예상했던 대로 일이 흘러가는 중이었다. 여기에 조양까지 다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퍽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이서문과 현진이 죽고, 적우까지 크게 다쳤으니 태을신교는 당분간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 그 사이 경전의 비밀까지 풀어내면 될 터!’
자존심은 좀 상했지만, 조양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여전히 금황자의 저울대 위에 올라서 있을지도 몰랐다. 그럼 이제부터 신뢰를 얻으면 그뿐, 실망할 일이 아니었다. 태자 이석은 우매하고 겁이 많았다. 황제가 승하하고 나면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애에 불과했다. 약간의 노력만으로도 금황자는 쉬이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그 노력의 원천이 자신이 되면 될 일이었다.
‘반드시 그의 눈에 들고 말겠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드디어 정파의 제자들이 하나둘 절벽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두 개의 밧줄씩 엮어 네 명이 한 번에 움직이니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절벽은 위에서 보던 것보다는 바위 표면이 거칠지 않고 위험한 장애물도 거의 없었다. 웬만한 무인이라면 바닥에 도달하기까지 충분히 자신의 몸을 보호할 정도였다.
스승을 대신하여 절벽을 타는 영인은 그제야 태을신교의 교도들이 거침없이 몸을 던진 이유를 깨달았다.
‘마교인들은 음흉하고 교활하다더니 과연 그렇구나. 조맹주님이 아니었다면 조금도 눈치채지 못할뻔했어.’
물론 강운선의 신공은 직접 보고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처럼 밧줄이 있다면 모를까, 신공만으로 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속도를 감당할 수 있을까?
‘신공이 그리 대단하다면 나 또한 배워보고 싶구나.’
같은 생각을 하는 이는 영인뿐만이 아니었다. 오대산검이 아닌 중소 문파의 제자들이야말로 경전에 대한 욕심이 솟구쳤다. 그중에서도 용호문의 문주 한철과 신계문의 문주 설이곡은 유독 눈이 시뻘게져서 달려들었다.
‘어떻게든 강운선을 잡아 경전을 손에 넣고 말리라.’
문파의 규모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오대산검에 크게 뒤질 것 없는 그들이었다. 일전에 고대산파의 일도 그렇고, 용문파의 멸문은 자명한 일이었다. 이참에 공을 세워 그 자리를 꿰차고 들어갈 욕심이었다. 뿐인가? 장은의 말이 반만 진실이어도 신공은 그야말로 강호를 뒤흔들 초절정의 무공이었다. 무공을 조금이라도 배워본 이라면 욕심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밧줄을 타고도 한참을 내려온 끝에 드디어 발이 바닥에 닿았다. 그제야 사람들은 용문파의 장로들이 왜 이곳으로 들어갈 방도가 없다고 했는지 깨달았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는 거대한 협곡이었다. 골짜기 물에 잔뜩 젖은 웅장한 바위들 사이로 제멋대로 자란 기화요초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누군가는 미끄러운 바위를 밟는 순간 몸이 기우뚱하여 하마터면 크게 엉덩방아를 찧을 뻔하였다.
“어째서 이곳을 탈출구로 삼은 거지?”
제일 처음 바닥에 발을 디딘 한철은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휘둘러 보았다. 기가 막힌 광경에 이곳에 내려온 이유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그때,
“어? 조맹주님?”
누군가의 외침에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무릎 높이까지 오는 잡초들 사이에서 허연 조양의 백발이 언뜻언뜻 보였다. 젖은 바닥에 앉아 운기조식을 하는 양이, 어딘지 크게 다친 듯싶었다.
“조맹주님.”
한철은 성큼성큼 걸어가 조양을 둘러싸고 있는 온갖 풀들을 걷어냈다. 습한 사이에 있던 탓인지, 아니면 진짜 내상이라도 입은 탓인지, 그의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이윽고 조양의 몸이 완전히 드러나자 너도나도 주위에 몰려들었다. 겉보기에 상처는 없었으나 쉬이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을 보니 필경 부상을 입은 듯싶었다. 한철은 더럭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아직 이 주변에 적들이 진을 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 조양의 주변을 엄호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또한, 적은 이미 사라졌으니 안심하십시오.”
조양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차분하지만 어딘지 기운이 없는 목소리였다. 한숨을 크게 내쉰 뒤에 이번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나 보니, 절벽을 타고 출렁이는 밧줄 여덟 개가 눈에 들어왔다.
‘아, 저것이로군.’
기가 막히게도 자신의 목숨을 구한 것은 고작 저 여덟 개의 밧줄이었다. 죽일 듯이 달려들던 강운선의 처절한 몸짓이 다시금 떠오르니 헛웃음이 다 나왔다. 하마터면 이 자리가 자신의 무덤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모한 짓이었어.’
사실 그가 호기롭게 절벽을 뛰어내린 목적은 단 하나였다. 계획의 무산. 어차피 성곤의 신공이 없다면 절벽을 뛰어내리는 계획은 불가능했다. 자신이 그를 상대하는 동안에는 누구도 그곳에서 살아나갈 수 없었다.
‘경전을 일부 보았기에 망정이지, 저 높은 절벽을 뛰어내린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시묵공과의 충돌이 없었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완공했을 텐데, 아쉽구나.’
***
몸을 가뿐하게 돌리며 바닥에 닿은 조양은 새삼 태을신공의 위력에 감탄했다. 비록 일신의 무공 때문에 더 깊이 익히지는 못했으나 어쨌든 절벽을 뛰어내린 것은 신공 덕분이었다.
“어째서 네놈이!”
그러나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었다. 휘몰아치는 광풍이 안면으로 훅 끼쳐오자 조양은 본능적으로 허리를 뒤집어 몸을 젖혔다. 과연 명불허전의 장풍이었다.
“여어, 검귀를 다시 만나니 여기가 저승인가? 이승인가?”
“설마 눈치챘는가?”
조양의 비아냥거리는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너희 계획은 이미 끝났다는 무언의 조롱이었다. 성곤의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신의 대단한 제자 이서문은 아마 오늘을 버티기 어려울 겁니다. 그가 무너지면 마진건쯤이야 쉽지요. 사실 이서문이 우리에게는 최대의 골칫거리였는데 이리 마무리를 짓게 되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조양을 노려보는 성곤의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위험한 작전임은 당연히 알았으나, 서문이라면 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가 있었다. 허나, 이 작자가 방해하는 이상 계획은 이미 틀어졌다.
“그래, 마무리를 짓자. 적어도 네놈만은 살려 보내지 않겠다.”
방금까지도 온갖 회한에 젖은 것 같던 성곤의 표정이 일시에 확 바뀌었다. 평소처럼 냉정하고 고요한 모습이었다. 더불어 그의 주변에 휘몰아치던 기운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역시 려국의 대사성답군요. 운평에서 해결하지 못한 싸움을 이제 마무리 지어 볼까요? 아아, 그전에!”
조양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퉁퉁 쳐댔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키득거렸다.
“태을신교의 제자들은 퍽 대단하더군요. 제가 일전에 누구를 만난 지 아십니까?”
“…….”
성곤은 대답 대신 오른손을 고쳐 잡았다. 지난번처럼 간사한 입을 놀려 마음을 혼란스럽게 할 작정인 듯싶었다. 같은 수법에 두 번 당할 그가 아니었다.
“우영!”
“뭐?”
일순 그의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생각지도 못한 제자의 이름이 적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온갖 불안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왔다.
“참으로 어려웠지요. 꼴에 아직도 자신이 태을신교의 일원이라 생각하더군요. 제가 아는 고문이란 고문은 다 해보았는데도 끝까지 입을 열지 않더란 말입니다. 정말 애먹었습니다.”
조양의 말이 계속될수록 성곤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아직 낫지 않은 내상이 다시금 단전을 콕콕 쑤셔왔다. 이것 역시 저놈의 수작임을 알면서도 한 번 뒤집힌 속은 좀처럼 가라앉히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놈이 딱 하나, 당신 이야기에 반응하지 않겠습니까? 존경하는 스승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려주니 배신감에 몸을 부르르 떨더군요. 그다음은 뭐, 예상하신 대로입니다.”
성곤은 더는 듣고 싶지 않은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조양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제 남은 일은 한 가지였다. 저 짐승 같은 놈을 찢어 죽이는 것. 그의 주변으로 다시금 뜨거운 기운이 모이기 시작했다. 태을신공으로 뼈까지 불태워버릴 작정이었다.
“강운선도 압니까? 당신의 실체를?”
조양은 상대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계속 이죽거렸다. 한편으로는 언제 불어닥칠지 모를 태일장(太一掌)을 방어하기 위해 대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차피 싸움을 피할 수 없다면 최대한 상대의 정신력을 흔들어놔야 승산이 있었다. 그에게도 성곤은 버거운 상대였다. 수년 전 맞붙었을 때 입었던 부상이 여전히 그를 괴롭히는 중이었다. 상대가 이미 회복을 했다면 더더욱 힘든 싸움이 될 것이었다.
“하얀 내, 소의 뿔, 아홉 개의 우물!”
“뭐?”
성곤의 짙은 눈썹이 세차게 꿈틀거렸다. 설마 저놈이 경전의 비밀을 풀었단 말인가? 아주 오래전 잊고 있었던 그곳의 암호를 듣는 순간 손바닥에 가득 모였던 신공의 기운이 맥없이 풀어졌다.
‘맞구나!’
조양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우영의 해석을 의심한 것은 아니지만, 성곤을 만나 반드시 확인해야 안심이 될 듯싶었다. 저 반응이라면 암호의 의미는 완전히 알아낸 것과 다름없었다.
“이미 저는 그곳을 알아냈으니 찾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허나 이 녀석이 아주 재밌는 얘기를 하지 뭡니까? 열쇠가 있다나?”
성곤의 얼굴에는 평정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상대를 죽이고 싶다는 분노와 이 난관을 어찌 받아들여야 하나에 대한 망설임으로 범벅이 되었다.
“하여 협상을 제안합니다. 저에게 나머지 열쇠를 넘긴다면 태을신교는 물론, 당신이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을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경국 황실을 거슬리지 않는 한, 태봉 주변은 얼씬도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어차피 당신의 꿈은 려국의 재건이 아니지 않습니까?”
“싫다면?”
“려국 왕실의 하나 남은 핏줄, 창현의 아들에게 진실을 들려주어야겠지요. 과연 그 여린 아이가 견딜 수 있겠습니까?”
혼란스러워하는 성곤의 머리 위로 굵은 빗줄기가 하염없이 쏟아졌다. 진실이 밝혀지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다만 여태 자신을 의지하던 운선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게 될 일이 끔찍했다. 애초에 그의 대답은 하나였다. 저놈을 죽이면 그뿐, 다른 대안은 없었다.
“현묵(玄默)”
성곤의 오른손이 크게 반원을 그리며 차가운 공기를 뜨겁게 데웠다. 그의 몸을 적시던 물방울들이 마치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듯, 바닥이 아닌 하늘 위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영롱한 그것들은 태일검의 시퍼런 검날에 부딪히자마자 작은 파열음을 내며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