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102화 (102/209)

102화. 口蜜腹劍(구밀복검)

이윽고 토사로 만든 방어벽이 허물어졌다. 그러나 그들의 눈앞에는 끔찍한 살육의 현장만이 펼쳐져 있었다. 함정에 빠졌던 스무 명의 고수 중에서 살아남은 이는 반도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중상을 입어 혼자서는 거동도 힘든 지경이었다.

오대산검의 제자들은 각자의 형제들을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여기저기서 비명과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불과 반나절 전에 대화를 나누던 동기가, 사부가, 주검이 되어 널브러져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래도 선운검파와 두타공파는 사정이 나았다. 용조현의 처참한 시체를 확인한 용문파의 제자들은 하늘이 무너진 것 같았다.

‘용조현마저 죽었으니 이제 용문파는 어찌 된단 말이냐?’

겨우 정신이 든 형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스승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 마당에, 참혹한 결과를 마주하니 심란하기만 했다.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고 싶었지만, 내상을 입은 터라 당분간은 움직이기도 힘들 것 같았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절벽 아래로 갈 방도가 있습니까? 이대로 두었다가는 모두 놓칩니다.”

형진의 외침에 용문파의 장로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절벽 아래로 가는 길은 없습니다. 일전에 강운선이 그리로 뛰어내렸을 때도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뒤져보았으나 찾지 못했습니다.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길밖에는.”

기가 막힌 상황에 답답해진 형진은 울컥 선혈을 토해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자신이 부끄럽고 한심했다.

“강운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 감정은 분명 열등감이었다. 려국의 고아 따위가 늘 자신보다 주목받고 앞서 있는 것이 미치도록 싫었다. 뿐인가? 아무리 노력해도 갖지 못했던 관심과 애정을 다 뺏어간 이도 그였다. 평생을 존경한 스승도, 난생처음 연모한 여인조차도 언제나 선택은 운선이었다.

‘반드시 찾아내 갚아주리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만은 넘어서리라.’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거대한 울분의 덩어리가 치받쳐 올라왔다. 애써 삼키려고 할수록 두 눈이 뜨거워지고 실핏줄이 터졌다. 눈가에 맺힌 눈물이 핏빛이었다.

“장문주! 여태 어디 있다가 이제 나타난 겁니까?”

소란스러운 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니, 장은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히고 인상을 쓴 양이, 험한 일을 겪은 사람 같았다. 제 문파들의 제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를 빙 둘러쌌다. 걱정하는 부류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원망과 분노의 감정이었다. 황석파가 앞장서서 설쳐놓고 정작 중요한 때에 자취를 감췄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우선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저의 책임이 큽니다. 그러나 보다시피 저는 크게 다쳐 한동안 몸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난장이 된 절벽을 휘둘러보는 장은의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 이 모든 결과가 자신의 불찰이었음을 사죄하는 목소리에는 침통함이 가득했다.

“소백화를 데리러 갔을 때, 강운선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이미 용문파의 비밀 통로를 모두 꿰뚫고 있더군요. 불시의 공격을 받은 저는 부끄럽게도 크게 다치고 말았습니다.”

장은은 잠시 말을 끊은 후, 자신의 옷깃을 열어젖혔다. 빗장뼈부터 명치에 이르는 일직선으로 시퍼런 피멍이 들어 있었다. 기실 장은과 같은 고수가 아니었다면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 만한 상처였다.

“저는 끝까지 발악하였으나 요사한 신공에 당했지요. 태을신공,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 익히 알고 계시는 해심밀경소에 숨겨진 비밀의 신공이었습니다.”

뜻밖의 이야기에 분위기가 급변하였다. 방금까지도 장은을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던 이들이었건만, 전혀 다른 대상을 향한 욕망이 차츰 가슴 속에서 솟구치기 시작했다.

“저 또한 강운선과 제대로 맞붙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고작 반년 만에 절세 고수가 된 비결이 바로 해심밀경소였던 것이지요.”

이미 흐름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흘러간다고 생각한 장은은 더욱 열과 성을 다해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 어째서 우리가 이리 당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합리화가 주된 내용이었다.

“하여, 지금은 태을신교를 끝까지 쫓아 뿌리를 뽑아 버려야 합니다. 강운선을 잡아 그 요사스러운 경전을 뺏어와야 할 것입니다. 다만 저들에게 잡힌 사형제들에 대한 부분은,”

장은은 곁눈질로 슬쩍 용조현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대놓고 반대하는 유일한 이는 이미 황천길로 가버렸으니 참으로 다행이었다.

“둘 중 하나입니다. 애초에 인질이 없었거나, 이미 죽였거나. 그들은 끝까지 인질의 위치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교환할 대상이 없었다는 말이지요. 지금 우리에게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사형제들을 구조하는 일보다 강운선을 쫓는 일이 훨씬 시급합니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소소정이 장은의 곁에 나란히 섰다. 옷이 피투성이였으나 정신만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털끝만큼의 미련도 남지 않았기에 마음에는 진득한 복수심만이 들어찼다. 또한, 현진의 시체를 확인한 이상 잠자코 관망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은 네 글자를 알아내야만 했다. 반드시 그들의 뒤를 따라가 비밀의 장소도, 정인의 목숨도 거둬들일 작정이었다. 직접 자신의 손으로.

“맞습니다. 그리고 이 일에는 여기 계신 여러분들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오대산검에 힘을 보태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당연합니다.”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명문정파의 호걸들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결의를 다졌다. 죽은 사형제들의 복수뿐만이 아니었다. 고작 반년 만에 애송이 강운선을 절세 고수로 만든 ‘해심밀경소’. 그 비급만 차지한다면 오대산검과 비등한 수준의 문파로 거듭날 수 있을 터였다. 이 일기일회를 마다할 이는 강호 바닥에 아무도 없었다.

자못 감동한 표정으로 좌중을 둘러보는 장은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역시 강운선과 경전을 들먹거리는 것만큼 효과 좋은 약발은 없었다. 이제 이들을 이용하여 다음 단계로 나아갈 차례였다.

***

운선이 한눈을 판 사이, 장은은 정신없이 동굴을 빠져나왔다. 예상하지 못한 태을신공의 위력에 어안이 벙벙했다. 사십여 년간 무학을 연구하고 익히면서도 들어본 적 없는 무공이었다. 일격을 맞았음에도 오히려 그 곱절의 힘을 되돌려 보내다니, 신기하면서도 두려웠다.

‘일단 피신한 뒤, 차차 확인하면 된다. 강운선이 나타났다는 건, 그들의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뜻. 어서 돌아가 계획을 무산시켜야 한다.’

가슴이 답답하여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진시까지는 이제 일각도 남지 않았다. 필경 절벽 앞으로 장소를 정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걸 막지 못한다면 지금껏 노력한 일이 모두 허사가 될지도 몰랐다.

어찌어찌 뛰어오다 보니, 금세 비밀 통로의 입구에 다다랐다. 이 바로 위는 용문파 장문의 처소였다. 혹시나 일어날 상황에 대비하여 미리 알아두길 잘했다 싶었다. 이곳에서 잠시나마 운기조식을 한 후에 움직일 생각이었다. 자신이 운선에게 당한 사실을 누구라도 알면 망신이었다.

덜컹!

기관이 작동하자 침상과 연결된 문이 삐걱대며 열렸다. 한동안 아무도 쓴 적이 없었는지 불쾌하고 요란한 소리였다. 그리고,

“장문주, 오랜만입니다. 안녕하셨습니까?”

태연하게 그를 맞이하는 이는 조양이었다. 아예 이쪽으로 나올 것을 알았는지 침상을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이 퍽 거만하고 재수 없었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그 대단하신 두타공파의 장문 아닙니까? 아니, 아니지, 우리 오대산검의 수장, 조맹주님이 아닙니까? 건강이 몹시 안 좋으시다 들었거늘, 어찌 이 먼 길을 오셨습니까?”

항상 친절과 예의를 갖추는 장은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저 늙은 여우가 어떤 의도와 속셈을 가지고 나타났는지 모르겠으나, 자신의 일을 방해하려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기분이 많이 상하신 모양입니다. 그런데 어쩝니까? 저 또한 당한 만큼 갚아주는 성격인지라, 강호 후배의 건방진 행보를 모른 척할 수 없었습니다. 하여, 제가 이번에 한 수 가르쳐 드려도 되겠습니까?”

극진한 존칭은 상대에 대한 조롱이었다. 또한, 스무 살이나 어린 장은이 감히 자신의 뒤통수를 치고 맹주의 자리를 노린 것에 대한 노여움이었다.

“장문주, 그대의 뒷배가 혹 금황자입니까? 하여 ‘해심밀경소’에 그리 집착하는 겁니까?”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후배는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군요.”

장은은 애써 당혹감을 감추며 대답했다. 이미 다 알고 온 듯했으나 굳이 자기 입으로 확인해 줄 필요는 없었다. 다음 황위를 잇는 황자가 어느 쪽일지에 따라 그들의 위치도 달라질 것이었다. 지금은 비록 이 수모를 겪어야 하지만 조만간 저 늙은이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수 있으리라.

“흐음, 뭔가 대단히 착각하는 모양이군요. 그간의 정이 있고 하니, 제가 선심 한 번 쓰도록 하지요.”

조양이 팔짱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멀뚱히 바라보고 선 장은의 앞을 얼쩡거리는 태도가 여간 얄밉지 않았다.

“혹, 이금이 장문주에게 ‘해심밀경소’가 무엇인지 알아 오라 하던가요? 표정을 보니 맞는 것 같군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는 경전의 비밀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굳이 아는 질문을 한 이유는 당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무슨!”

장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걷혔다. 지금 저 늙은이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은 철저히 금황자에게 농락당한 꼴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의심이 들었다. 그간 석연치 않았던 장면들이 머릿속에 끊임없이 펼쳐졌다.

“장문주, 백날 옹주를 붙잡고 캐물어도 경전의 진실을 알아낼 수 없을 겁니다. 하여 그 궁금증을 제가 풀어드리지요. 단, 지금까지 했던 건방진 행동을 사과받은 다음에 말입니다.”

“으악!”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조양은 오른손을 들어 그의 단전을 세게 눌렀다. 장은은 예상치 못한 일격에 놀라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설마 태을신공입니까?”

조양은 어찌나 흥분했는지 허옇고 긴 수염을 부르르 떨었다. 장은과 같은 고수에게 이 정도 상처를 입힐 수 있다면 상대는 뻔했다. 적어도 영명권을 파(破)할 수 있는 자. 웅혼한 내력을 갖추었거나 상대의 내력을 튕겨낼 수 있는 무공을 익힌 자.

‘성곤…….’

조양의 얇은 입술 사이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때 확실히 죽이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후회가 되었다. 하여,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태을신교를, 성곤을 짓밟아 버리고 말아야겠다, 조양은 다시 한번 깊게 다짐했다.

“내 뜻에 따른다면 경전의 비밀을 알려드리지요. 그뿐만 아니라 앞으로 함께 일을 도모합시다. 어떻습니까?”

굳이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그깟 무림 맹주 자리야, 금황자의 눈에 들고 나면 손쉽게 얻을 수 있었다. 지금은 조양에게 넙죽 엎드려서라도 정보를 취할 때였다.

“조맹주님, 그간 경거망동한 점, 사죄드리겠습니다. 기꺼이 오른팔이 되어드리겠습니다.”

조양의 앞에 넙죽 무릎을 꿇은 장은의 얼굴에 교활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찬란한 앞날을 위해서라면 이깟 무릎이야 백 번이어도 내어줄 수 있었다. 그것이 그의 변하지 않는 신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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