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101화 (101/209)

101화. 摩頂放踵(마정방종)

***

경국이 약속을 어기고 태봉을 쑥대밭으로 만든 그 날, 서문은 현진을 처음 만났다. 왕실의 친족들은 이미 태봉을 빠져나갔건만, 아무도 버려진 옹주의 생사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직 죽은 창의의 충신이었던 성곤만이 그녀의 존재를 잊지 않았다.

서문이 스승의 뒤를 따라 무너지기 직전의 초옥에 도착했을 때,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열 살이 채 되지 않은 소녀가 죽은 어미를 품에 안고 있었다.

“옹주님!”

성곤은 황급히 뛰쳐나가 소녀를 감싸 안았다. 머리 위에서는 당장이라도 서까래가 그들을 덮칠 것처럼 흔들거렸다. 그러나 그 처참한 비극 속에서도 소녀는 울지도 떨지도 않았다. 어딘가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반들반들한 눈동자 속에는 두려움 대신 붉은 불길이 이글거렸다.

서문이 그녀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것은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후였다. 어미를 잃고 나라에 버림받은 어린애라고는 믿기지 않는 당당함이었다.

“대사성, 저를 제자로 받아주세요. 어머니의 복수를 하고 싶습니다.”

“옹주님.”

성곤은 물끄러미 현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버지 창의를 똑 닮았으면서도 그와 달리 고집이 세고 강단이 있어 보였다. 다시 일어설 려국을 이끌 인재로서 손색이 없었다.

“결단코 쉬운 길이 아닐 겁니다. 괜찮겠습니까?”

“허울뿐인 직함 따위 저에게는 아무 의미 없습니다. 이제 저는 옹주가 아닙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서문은 왠지 모르게 코끝이 시큰해졌다. 어떤 마음으로 여기까지 따라왔을까? 상상할 수도 없는 끔찍한 아픔일 테지. 하여 그는 오라비로서 평생 그녀를 지켜주어야겠다 다짐했다.

그날 이후로 두 사람은 늘 함께였다. 남들이 보기에는 서문이 현진을 보호해주는 것 같았으나 기실 그 반대였다. 성정이 여린 서문을 보듬어주고 일으켜준 사람은 언제나 현진이었다. 또한, 오직 그를 훈계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사형은 어찌 그리 게으릅니까? 왜 신공 연마를 그만두신 겁니까?”

현진은 뛰어난 자질을 갖추고서도 무공 연마에는 한없이 게으른 사형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은 아무리 배우고 싶어도 능력이 부족해 허락받지 못한 태을신공이건만, 그는 2단계에 들어서자마자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다.

“태을신공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힘이 없단다. 다만 외공을 익힐 때마다 그 무공을 곱절로 증진 시킬 수 있지. 참으로 기특한 신공이지만 나 같은 게으른 이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지 않겠니? 나는 부채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우니 욕심내고 싶지 않구나.”

현진은 서문의 대답을 들으니 더욱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애초에 부채를 선택한 것도 그랬다. 근접전이 아니면 무용지물인 데다, 혈을 제대로 짚지 못하면 반격을 당해 수세에 몰리기 쉬웠다. 그런데도 굳이 부채를 고집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그럼 신공도 검법도 배우지 않을 작정입니까?”

서문은 자신을 새삼 한심하게 보는 현진을 향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저리 면박을 줘도 그 의중이 사형에 대한 걱정임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현진아, 만약 내가 검을 쥔다면 그때는 신념도 목숨도 버리겠다는 뜻일 거다. 내 평생 검을 들지 않는 것이 꿈이니까 말이다.”

***

잠시 멈칫했던 오대산검의 고수들이 그들 주변으로 슬금슬금 몰려들었다. 굶주린 포식자들처럼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하긴 아주 먹음직스러운 두 사람이었다. 서문을 죽이면 마교 섬멸의 공을 세울 수 있고, 운선을 사로잡으면 경전의 행방을 알게 될 터였다.

“운선아, 이리 오너라.”

“사형…….”

한차례 울음을 토해낸 서문이 쉰 목소리로 사제를 불렀다. 그에게는 이제 슬퍼할 여유도 없었다. 우선 아우들과 교도들을 구하는 일이 먼저였다. 그리고 그 마무리는 오로지 운선만이 할 수 있었다.

“잘 들어라.”

서문은 그의 귀에 얼굴을 바짝 갖다 대었다. 누구도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었다.

“조양이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사부님은 그를 상대하기에도 벅찰 것이다. 하여 네가 저들을 살려야 한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앞을 향했다. 오대산검은 고작 스무 명도 되지 않았으나 하나같이 강호에서 내로라하는 고수였다. 일당백인 그들 앞에 태을신교의 교도들은 종이 인형과 다름없었다. 토사로 쌓은 벽도 벌써 반 이상 허물어졌다. 이대로 버티다가는 전멸이었다.

“오직 너만이 태을신공을 모두 배웠다.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네, 사형.”

서문은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운선을 보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오리라 예상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운선아, 미안하구나.”

그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검을 한 자루 주워들었다. 이미 피로 시뻘겋게 물들어 날이 무뎌진 검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검의 주인은 개의치 않았다. 운선을 노리고 몰려드는 적을 찌르고 벨 뿐이었다. 오직 상대를 죽이겠다는 욕망만이 가득한 공격이었다.

“진건아! 가라!”

울부짖는 그의 목소리를, 진건은 바로 알아들었다. 언젠가 서문이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는 그가 견뎌야 할 때가 온 것이었다. 부채를 버리고 검을 든 사형의 모습을 보는 순간, 진건은 이곳이 그의 마지막 무대임을 깨달았다.

“적우야, 이제 가자.”

여태 방어에만 급급하던 진건의 창이 갑자기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함부로 덤비던 도사 하나를 밀어냄과 동시에 반대편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소소정의 어깻죽지를 길게 베어냈다.

“악!”

소소정은 기겁을 하며 주저앉았다. 설마 그가 살기 가득한 공격을 할 줄은 예상도 못 했기에 무기력하게 당한 것이었다. 기실 그녀를 바라보는 진건의 눈에는 여전히 망설임이 있었다. 인연은 끝나버렸지만, 감정의 찌꺼기를 털어내지 못한 탓이었다.

“너를 봐주는 일도 오늘이 끝이다.”

진건은 그의 창 미타를 한 바퀴 돌리더니 저고리 고름을 뚝 잘라내었다. 바람을 타고 팔랑팔랑 떨어진 그것은 소정의 무릎 위에 사뿐히 안착했다.

“봐주었다고? 하, 하하하.”

미련 없이 돌아서는 정인의 등을 보며 소정은 헛웃음을 쳤다. 고작 옷고름 하나로 끊어낼 사이였거늘, 무얼 바라고 지금껏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가? 왼쪽 옷소매는 이미 피범벅이었다. 그러나 어깨의 상처는 아프지도 않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뚫고 나온 끔찍한 통증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결국, 소정은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모두 호랑이 바위로 간다!”

우렁찬 진건의 목소리가 온 산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간신히 살아남은 십수 명의 교도들이 명에 따라 하나둘 바위 쪽으로 향했다. 그들의 뒤에서 서문과 진건이 혼신의 힘을 다해 방어선을 만들었다.

“세 명씩 뛰십시오. 되도록 밑을 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교도들은 운선의 신호에 맞춰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깎아지른 낭떠러지가 두렵기는 했으나 운선에 대한 믿음과 살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공포를 이겨냈다. 어차피 이곳에 남아있어도 죽은 목숨이었다. 살아남아 가족과 동료를 지켜야 했다.

“하나, 둘, 셋!”

허공에 발을 내딛는 순간, 은은한 미풍이 몸을 감싸 안았다. 마치 구름을 타고 둥실둥실 떠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바닥에 한 장 가까이 근접했을 때부터는 급격하게 속도가 올라갔다. 그러나 그 정도 충격쯤이야 웬만큼 무공을 익힌 그들에게는 낭중취물(囊中取物)이었다.

한편 진건은 새로운 적을 맞아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백형진의 무공은 그동안 일취월장하여 누구와 겨루어도 크게 뒤지지 않았다. 다만 무공이라고 보기 어려운 적의 살기등등한 공격에 당황하여 좀처럼 승기를 잡지 못했다. 그의 자랑인 활인검법의 묵직한 초식도 매번 창날에 막혀 힘을 쓸 수 없었다.

‘강운선을 막아야 한다.’

그 와중에도 그의 눈에는 오직 운선만이 보였다. 두 사람의 단단한 방어벽에 막혀 고전하는 동안 이미 반이 넘는 교도들이 절벽에서 뛰어내린 뒤였다. 이러다 모든 계획이 수포가 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고 초조했다.

“활인치심(治心)”

시묵공의 내력을 팔 할이나 담은 검은 오직 진건의 등 뒤를 겨냥했다. 내내 빨랫감처럼 업혀있는 적우를 향한 일검이었다. 이왕 이리된 김에 적우의 목숨이라도 앗아가겠다는 의도였지만, 혹 실패하더라도 진건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휘익!

아니나 다를까 검의 방향을 확인한 진건의 눈이 곱절로 커졌다. 아우를 보호하기 위해 그는 뻗었던 창을 무리하게 잡아당겨 등 뒤로 돌려세웠다. 그 때문에 옆에서 달려드는 도사의 검을 왼쪽 팔에 그대로 맞고 말았다.

퍽!

재빨리 몸을 틀어 검이 박힌 팔을 휘둘렀다. 차마 검을 놓지 못한 도사는 팔의 궤적을 따라 빙글빙글 돌다가 바위벽에 머리를 세게 부딪히며 떨어졌다. 보나 마나 절명이었다.

그 잠깐의 기회를 형진이 놓칠 리가 없었다. 신속하게 진건의 뒤를 돌아가 다시 한번 등을 노렸다. 덩치가 큰 그가 몸을 회전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으리라는 계산속이었다.

“치심(治心)”

같은 초식이었지만 또한 완전히 다른 위력이었다. 내력을 빼는 대신 속도를 더하니 목표물을 찌르는 데에 최적이었다. 진건이 몸을 반도 못 돌렸건만, 형진의 검은 이미 적우의 가슴 끝에 닿아 있었다.

“형님!”

형진의 칼에 맞은 이는 이서문이었다. 용조현의 화극을 반으로 부러뜨린 순간, 그의 시야에 진건의 위급한 상황이 들어왔다. 다른 방법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지체하지 않고 몸을 날려 두 아우를 감싸 안았다.

퍽!

서문의 왼쪽 어깨에 검이 반 치 정도 박혔으나 아픈 줄도 몰랐다. 몸을 돌리는 동시에 크게 일갈하며 상대의 가슴팍에 일 장을 날렸다. 너무 가까이 붙어있던 형진은 장력을 차마 피하지 못했다. 종잇장처럼 몸이 접히더니 한 장 밖으로 날아가다시피 튕겨 나갔다.

“형님!”

그의 어깨에는 여전히 검이 꽂혀 있었다. 진건은 출혈이 클까 봐 차마 검을 빼지도 못했다. 새파래진 얼굴에는 당혹감이 가득했다.

“진건아, 부탁한다.”

그들은 서로의 눈만 보아도 마음을 헤아리는 사이였다. 하여, 이름만 불렀는데도 그의 의중을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결정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들의 오랜 약속이었다.

“갑니다.”

진건은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존경하는 형님을 향한 마지막 인사였다. 반평생을 함께한 형제였다. 헤어짐을 예측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막상 닥친 이별은 황망하고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어깨 가득 짊어진 대의가 있었다.

“운선아!”

진건은 크게 일갈하며 육중한 몸을 날렸다. 마침내 운선이 절벽 아래로 내려보낼 마지막 두 사람이었다. 지칠 대로 지쳤으나 이번만큼은 어느 때보다도 더 집중하여 장력을 출수했다.

챙!

진건과 적우가 떠나는 모습도 다 보지 못하고 서문은 다시 검을 들었다. 그의 주변에는 시체가 즐비했다. 숨이 붙어있는 이는 용조현과 백형진, 그리고 선자 둘, 도사 하나. 용조현을 제외한 나머지는 치명상을 입어 움직일 수 없었다. 서문은 두 동강이 난 화극을 양손에 들고 주춤주춤 다가서는 용조현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그의 마지막 과업이 될 것 같았다.

“태일천하(太一天下)”

남은 내력을 모두 쏟아부은 일 장은 조현의 가슴팍에 정확하게 명중했다. 비록 화극의 창날에 자신의 아랫배를 내어준 일격이었으나, 덕분에 저승길 동무가 생겼으니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대사형!”

울부짖는 운선의 외침을 들으며 서문은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벌어진 상처에서 쏟아진 피와 내리는 빗물이 섞여 그의 주변이 온통 붉었다.

문득 바라본 하늘은 잔뜩 화가 났는지 짙은 회색이었다. 부러 큰 대자로 뻗으니 모처럼 마음이 편해졌다. 이리 여유 있게 누워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퍽 피곤한 삶이었다.’

먼저 간 동료들을 떠올리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누구보다 자신의 아픔을 이해해주었던 묵안, 인생의 나침반 같았던 인범, 열 살이 어리면서도 형님 같던 이정. 그리고 사랑하는 현진.

그래도 그녀를 홀로 보내지 않아 다행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평생 지켜주리라 다짐했건만, 매번 의지한 쪽은 오히려 자신이었다. 이번에도 한발 늦게 따라가게 된 것이 여간 미안하지 않았다. 대신 앞으로는 절대로 헤어지지 않으리라.

하염없이 떨어지는 빗방울이 서문의 눈 속으로 뚝뚝 떨어졌다. 깜빡깜빡 움직이던 그의 눈꺼풀이 점차 느려지더니 어느 순간 다시 떠질 줄을 몰랐다. 몸이 찢기고 엄청난 피를 흘렸으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한 얼굴이었다.

이제 호랑이 바위 위에 남은 사람은 운선이 유일했다. 죽거나, 혼절하거나, 아예 싸울 의지도 없는 이들만이 남아 전장은 소강상태가 되었다. 울음을 멈추고 묵묵히 서문의 시신을 바라보던 운선은 결심한 듯, 그를 품에 안았다. 언젠가 되찾을 려국의 땅에 누이와 함께 묻어줄 생각이었다.

어느덧 빗줄기가 약해지고 구름에 가렸던 해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토사 더미 뒤에서 검은 머리통이 들쑥날쑥 보이는 걸 보니,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 된 모양이었다. 운선은 터벅터벅 호랑이 바위 위로 올라섰다. 언제나 이곳은 그에게 끔찍한 기억만을 남겨주었다. 그런데도 그는 반드시 다시 돌아오리라 다짐했다. 그때는 웅크린 호랑이가 세차게 기지개를 켤 수 있기를 바라며,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 마정방종(摩頂放踵):

정수리부터 발꿈치까지 모두 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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