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前虎後狼(전호후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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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이 용문산에 도착한 것은 지난밤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수척해 보이기는 했으나 여전히 나이답지 않게 기골이 장대하고 근육이 탄탄했다. 역시 무림 맹주의 위치는 아무나 오르는 자리가 아닌 모양이었다.
“왜 이리 늦었느냐?”
그가 기다린 이는 다름 아닌 제자 백형진이었다. 아무도 몰래 일을 꾸며야 했으므로 한밤중에 은밀히 용이봉으로 부른 참이었다. 지금까지 돌아가는 정황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자의 세밀한 보고가 필요했다.
“사부님, 일은 잘 마치셨습니까?”
“흥! 네가 그걸 알아서 무얼 하려고? 판단한 바를 말해보아라.”
형진은 혹여 듣는 귀가 있을까 염려되어, 스승의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장은의 계략이 분명합니다. 그는 용문파를 미끼로 삼아 태을신교를 끌어들였습니다. 일련의 상황에서 의심할 만한 정황이 있습니다.”
조양의 명을 받은 형진은 해금 객잔에서의 일을 은밀히 조사하였다. 그러다 보니 당연하게도 소소정에게 증언을 한 도사를 찾아낼 수 있었다. 찾아내기까지가 어려웠지 그 내막을 털어놓게 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와 다름없었다.
자신은 그저 객잔에서 일하는 일개 점소이라는 것, 누군가의 사주로 음식에 독을 풀고 거짓을 증언한 것. 그리고 그를 사주한 이가 검지가 없는 젊은 검객이라는 사실까지도 낱낱이 듣게 되었다. 결국, 이 모든 음모의 배후에 장은이 있음이 확실해진 셈이었다.
“또한, 선운검파 소소정이 암묵적으로 협력하는 듯합니다.”
“그 딱한 야호(野狐)라면 그럴 만도 하지.”
소소정에 대한 일은 나중이었다. 우선 벌여놓은 판을 잘 수습해야 할 터였다. 조양은 허연 수염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상대의 수는 훤히 보였으나 자신의 다음 수가 고민이었다. 이왕이면 싹을 짓밟아 다시는 숨도 쉬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
“오대산검의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잡혀 있어 다들 걱정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다들 적우와 현진을 내어주더라도 잡힌 문도들을 구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그럴 필요 없다.”
“네?”
형진은 단호한 조양의 태도에 사뭇 당황했다. 토벌대에 두타공파의 제자들이 없으니 아무래도 걱정이 덜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형제의 의로 맺어진 관계를 업신여길 수는 없었다. 게다가 조양은 무림 맹주가 아닌가? 이번 일로 그의 위명에 흠이 갈까 걱정이었다.
“사부님, 허나…….”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이서문은 가지고 있는 패가 없다.”
“네?”
자신의 말을 반도 이해하지 못한 듯한 제자의 표정을 보며 조양은 혀를 끌끌 찼다. 저리 어리숙한 이가 장차 두타공파를 어떻게 이끌어 갈까 생각하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어릴 때는 꽤 영민했건만, 어쩐지 나이를 먹을수록 식견이 좁아지는 양이 퍽 안타까웠다.
“이서문은 인질을 데리고 있지 않단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협상 장소를 굳이 절벽 앞으로 할 이유가 없었다. 그것도 하필 그 바위 위에서. 이서문의 의도는 분명 교환이 아니라 구출이었다. 어리숙한 오대산검이 그가 인질을 데리고 있다 철석같이 믿고 있으니 일이 이 지경까지 온 것이었다.
“하지만 앞은 우리가 포위할 테고, 뒤는 절벽입니다. 인질을 데리고 있다면 협박이라도 해서 어찌 길을 열겠지만, 패가 없다면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교도들을 구한단 말입니까?”
“그 바위가 무슨 바위인지 기억하느냐? 강운선이 뛰어내린 그곳이다. 그 아이도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면 반드시 방법이 있다는 뜻.”
형진의 눈이 번쩍 뜨였다. 내내 마음에 걸리던 의문점들이 일시에 해소되니, 오랜 체증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럼 이제 어쩌실 작정입니까?”
“일망타진(一網打盡)”
조양은 가지런한 치아를 씨익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수십 년간, 끊임없이 괴롭히던 일들이 비로소 해결되려는 조짐이 보였다. 태을신교 섬멸도, 려국의 보물찾기도 이제 단 몇 걸음 앞이었다.
비가 오려는지 달이 구름 속에 꼭꼭 숨어 버렸다. 하얀 달빛 대신 조양의 얼굴에는 검은 그림자만 짙게 드리워졌다. 그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유난히 그의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
이서문의 움직임은 마치 나비와 같았다. 묵직한 검을 요리조리 나풀나풀 피하면서도 빠르고 정확하게 부채를 움직였다. 모든 공격은 상대의 요혈을 노렸기에 그야말로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이었다. 반면 조양은 어쩐지 동작이 무겁고 공격이 뭉툭했다. 그의 보검인 활인검이 워낙에 무겁기도 하였지만, 평소의 그라면 어림도 없을 실수까지 연발하였다. 조맹주의 등장에 손뼉을 치며 좋아했던 정파의 문도들은 점차 고개를 갸우뚱했다.
“백대협, 맹주님이 위험한 게 아닌가?”
용조현은 쏟아지는 화살 때문에 도우러 가지 못하는 것이 퍽 답답했다. 그쪽으로 방향을 틀려고만 하면 어김없이 화살이 길을 막으니 도대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일단 방어에 집중하다 화살이 떨어지면 움직여도 충분합니다.”
반면 형진은 여유만만이었다. 스승을 너무 믿는 것인지, 두타공파의 자부심인지 참으로 대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현의 눈에도 조양이 불안해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일설에 그간 두문불출한 이유가 부상 때문이라더니 과연 낭설이 아닌 듯했다.
‘이상하다. 아무리 내상이 완쾌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상해.’
조양은 상대의 날카로운 공격을 모조리 막아내었으나 방어에 급급하여 공격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더니 점차 절벽 쪽에 가까워졌다. 서문은 어쩐지 꺼림칙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으나 그렇다고 공격을 멈추기도 어려웠다. 잠깐의 틈만 보여도 역전을 노릴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무리를 해서라도 공력을 계속 끌어올려야 했다.
절벽에서 딱 세 걸음을 남겨 두었을 때, 조양은 고개를 뒤로 휙 젖혔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서문의 부채가 청령, 소해, 영도의 혈 자리를 차례로 찔렀다. 팔에 극심한 통증을 느낄 텐데도 조양은 피하기는커녕 뭔가를 집중해서 볼 뿐이었다.
“오오, 이런 방법이었군.”
한참을 내려다보던 조양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승리가 확정 지어지는 순간에 느끼는 희열이었다.
“어? 조맹주!”
이쪽을 계속 응시하고 있던 용조현이 깜짝 놀라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의 편에서 보았을 때는 조양이 이서문에게 밀려 절벽으로 떨어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명백히 그는 스스로 떨어진 것이었다.
‘아뿔싸!’
뒤늦게 눈치챘으나 이미 조양은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 뒤였다. 그제야 이서문은 이번 계획이 완전히 어그러졌음을 깨달았다. 절벽 아래에는 제자들이 뛰어내리기를 기다리는 성곤이 있었다. 이제 조양이 내려갔으니 성곤의 손발이 모두 묶인 셈이었다. 그가 밑에서 받아주지 못한다면 교도들의 목숨은 끝이었다. 방어벽으로 쌓아둔 흙더미는 길어야 한나절이었다. 그사이 빠져나가지 못한다면 다음은 없었다.
‘이제 각자도생이다. 운에 맡길 수밖에.’
서문은 형제들을 꽁꽁 묶어둔 포승줄을 풀고 머리에 쓴 두건도 벗겨냈다. 다들 지쳐 보이기는 했으나 크게 다친 이는 없었다. 이제 곧 화살이 바닥날 참이었다. 모두 함께 맞붙어 싸우는 길이 그나마 방법이라면 방법이었다.
“살아서 나가자.”
“네!”
모두의 얼굴에 결연한 다짐이 들어섰다. 이 중에 반이나 살아남을까? 아니 전멸일지도 몰랐다. 막상 마지막 순간이 오니, 의외로 담담해졌다. 죄책감도 후회도 만회할 가능성이 있을 때나 유효한 감정이었다.
“이서문!”
한차례 화살 비를 막아낸 용조현이 화극을 휘두르며 거칠게 달려들었다. 그의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오직 형님들의 복수만이 목적이었다. 적어도 저 반질거리는 서생 놈이라도 죽여야 둘째 형님을 볼 낯이 있을 것 같았다.
“소요낙접(落蝶)”
화극에 소요공(逍遙功)의 기운이 담기자 창날에는 푸른 검광이 번쩍였다. 그 무거운 병기를 한 손으로 돌리면서도 마치 채찍처럼 자유자재로 검기를 쏟아냈다.
“활인양생(活人養生)!”
또 하나의 검기가 이서문의 왼쪽 옆구리를 겨냥하여 찔러 들어왔다. 백형진이었다. 그는 조양이 방법을 찾을 때까지 은밀히 그의 주변을 엄호했다. 오직 두 사람만의 대결이 벌어져야 틈을 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싸움이 깊어질수록 이서문의 시선이 자꾸 절벽 쪽으로 향했다. 조양의 예측이 맞아떨어졌다는 증거였다.
‘용조현을 도와 먼저 이서문을 제압한 후에 마진건을 사로잡는다.’
이제 그의 목표는 이서문의 목숨이었다. 사실상 태을신교의 수장과도 다름없는 그가 죽는다면 나머지 조무래기들을 치우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드디어 그들을 경국에서 쓸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니 속이 다 후련했다.
챙!
아무리 이서문이었지만 두 사람을 동시에 상대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었다. 방금까지 조양과 싸우면서 지나치게 내력을 소모한 탓도 있었다. 흘끗 진건을 돌아보았지만, 그쪽은 더 암담했다. 주 상대는 소소정이었으나 대여섯 명의 고수가 포위하고 있어 진퇴양난이 따로 없었다. 게다가 어깨에는 적우까지 둘러메고 있으니 자기 한 몸 지키기도 버거워 보였다.
‘우리 쪽 인원이 월등하게 많지만, 저쪽은 모두 고수들이다. 이대로 나와 진건이 묶여 있으면 필패다. 조만간 방어벽까지 무너지면 아예 기회가 없다.’
서문은 이 두 사람을 최대한 빨리 떼어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 수법이 뭐가 됐든 이제 그의 행보에 태을신교의 운명이 달려 있었다.
휘익!
서문이 대각선으로 부채를 휘두르자 살에서 무려 열두 개의 세침이 튀어 나갔다. 여섯 개는 용조현의 방향인 오른쪽으로 나머지 여섯 개는 백형진이 달려드는 왼쪽이었다. 물론 고작 암기로 두 사람을 제압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팅! 팅! 팅!
팅! 팅! 팅!
두 사람이 바늘을 피하느라 뒤로 물러서는 순간, 서문은 경공을 사용하여 재빨리 포위를 빠져나갔다. 그는 판관필을 휘둘러 교도들을 무차별로 학살하는 황석파 장로의 천돌(天突)을 정확히 찔렀다. 이서문이 여기까지 뛰쳐나오리라고 생각하지 못한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쉴 틈도 없이 바로 다음 동작으로 왼발을 쭉 내밀었다. 미끄러지듯 바닥을 굴러 왼편으로 돌아드니 이번에는 선운검파의 선자와 마주했다. 그녀가 차마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종아리에 있는 위중, 승근, 승산, 곤륜혈을 차례로 찍어눌렀다. 상대의 중심을 무너뜨리기 위함이었다.
“어림없다.”
서문이 순식간에 서너 명의 고수를 쓰러뜨리는 동안 형진은 그의 뒤통수까지 따라왔다. 비등한 상대에게 묶여 있는 대신 형제들을 한 명이라도 더 구하려는 마음은 가상했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형진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서문의 등을 찔러 들어갔다. 그가 가장 자신 있는 활인양생(養生)의 초식이었다. 상대가 완전히 등을 내어주고 있어 공격 한 번이면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다. 살짝 비겁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상대가 다름 아닌 이서문이니 어쩔 수 없었다.
챙!
“누구냐?”
당연히 등을 베어냈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형진의 착각이었다. 난데없는 금속성에 놀라 신속히 뒤로 물러섰다. 방금까지도 앞에는 적의 등이 보였건만, 지금 그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낯익은 이의 얼굴이었다.
“네 상대는 나다.”
형진의 검을 받은 이는 다름 아닌 운선이었다. 등에는 이미 싸늘하게 식은 누이를 업고 손에는 번쩍이는 수월을 들고 있었다. 아무것도 비쳐 보이지 않는 그의 까만 눈동자는 유난히 서늘하고 냉정했다.
“운선아!”
등 뒤에서 오싹한 살기를 느끼면서도 차마 피하지 못했던 서문은 운선의 등장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앞쪽에서 달려드는 용문파 장로를 태일장으로 밀어낸 뒤에 드디어 몸을 획 돌렸다. 그러나 그 기쁨을 표현하기도 전이었다. 그의 눈에 축 늘어진 현진의 모습이 들어왔다. 샛노래진 피부, 움직일 때마다 목각 인형처럼 달그락거리는 사지. 이미 숨이 끊어진 지 한참이 지난 것 같았다.
“아니야! 아니야!”
그는 지난 사십여 년 동안, 온갖 추악한 현실과 싸우며 살아왔다. 이제는 밑바닥까지 박박 긁어내어 더 표출할 감정도 없다고 생각했다. 눈물을 언제 흘렸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순간, 그 또한 오만이었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어느새 굵어진 빗소리를 뚫고 서문의 절규가 온 산에 울려 퍼졌다.
“으아아아악!”
*** 전호후랑(前虎後狼):
앞문에서 호랑이를 막고 있으려니까 뒷문으로 이리가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