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累卵之危(누란지위)
혜윤당 마당에는 인질 이십여 명이 꿇어앉아 있었다. 모두의 머리에는 검은 천이 씌어 있어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적우를 숨기려는 의도였으나 어쩐지 기괴하고도 불편한 장면이었다.
모두가 그러했지만, 특히 용조현은 내내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혹여 일이 잘못된다면 형님의 목숨이 날아갈 판이니 그럴 만도 하였다. 게다가 진작에 나타났어야 할 장은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문도들을 구하기로 한 결정에 영 마뜩잖아하더니만 기어이 방해할 모양이었다.
“장문주는 도대체 어딨는 겁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지난밤부터 감감무소식입니다. 소백화는 그가 책임진다고 하였으니 직접 데리고 오지 않겠습니까? 믿고 기다려 보지요.”
황석파 장로들의 얼굴에도 당혹스러움이 역력했다. 그 마음은 소소정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장은은 사형제들을 포기할지언정, 다 잡은 태을신교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음이 분명한데, 도통 속내를 알 수 없으니 초조하기만 했다.
“일단 우리끼리라도 움직여야 합니다. 이제 곧 날이 밝겠습니다.”
결국, 용조현을 위시한 정파의 수장들은 장은이 없이 일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약속한 장소까지 움직이는 데만 해도 일각은 족히 걸렸다. 서두르지 않으면 협상이 결렬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갑시다.”
토끼 바위가 서 있는 절벽은 길이 좁고 험했다. 인질들까지 움직이려면 인원을 축소해야 했다. 하여, 각 문파의 수장 열이 앞에 서고 선발된 고수 열 명이 뒤쪽을 포위하기로 했다.
“용문산에는 샛길이 없으니 절벽 앞만 지킨다면 놈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습니다. 장소를 잘못 고른 덕에 우리에게 유리해졌습니다.”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으나 용조현만은 여전히 불안했다. 바위 뒤쪽은 험악한 절벽이 버티고 있었으므로 성공적으로 인질을 교환하더라도 그들에게는 퇴로가 없었다. 동귀어진할 생각이 아니라면 그야말로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그러니 더 이상하다. 이서문이 누구인가? 어째서 이런 멍청한 짓을 한단 말인가? 분명 다른 이유가 있다.’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다 보니, 또 다른 꺼림칙한 기억이 떠올랐다. 수년 전, 그는 분명 강운선이 저 바위 위에서 투신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갈가리 찢겨 시신을 찾을 엄두조차 못 냈거늘, 반년 후 멀쩡하게 살아 돌아오지 않았던가? 어딘가 탈출구가 있지 않을까?? 하여 지난밤 잠도 자지 않고 주변을 샅샅이 탐색하였다.
‘허나 바위 아래는 절벽일 뿐이었다. 그저 내 기우일까? 아무튼, 지금은 형님을 구하는 데에 집중하자.’
뎅, 뎅, 뎅, 뎅, 뎅, 뎅, 뎅!
드디어 진시를 울리는 종소리가 용문산에 울려 퍼졌다. 기나긴 행렬이 막 토끼 바위로 가는 길목에 도착했을 때였다.
“아직 기별이 없느냐?”
“네.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내내 길목을 지키고 있던 오대산검의 제자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형제들의 목숨이 걸린 일이었기에 밤새 뜬눈으로 지새웠건만, 말 그대로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대지 않았다.
‘혹, 덫을 놓았는가?’
소소정의 매끈한 이마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약이 바짝 오른 이서문이라면 무슨 교활한 수를 쓸지 모를 일이었다. 그럼 그 서신은 왜 보낸 것인가? 어째서 굳이 이곳이란 말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슬슬 불길한 예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예감이 좋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함정인 것 같아요. 돌아가지요.”
소소정은 낯빛이 새파래져 용조현의 소매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형님을 구하는 데에만 골몰하고 있던 그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근거도 없이 무작정 예감이 좋지 않다고? 안 그래도 꺼림칙한 생각이 들어 걱정인데 먼저 나서서 초를 치니 짜증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히려 장은과 짜고 방해하려는 속셈은 아닌지 의심부터 드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저는 형제들을 구해야 합니다.”
“용대협!”
마음은 급한데 용조현이 말귀를 알아먹지 않으니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소소정은 아예 검을 빼 들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함정입니다. 모르시겠습니까?”
“저는 평생을 여기서 살았습니다. 심지어 다시금 살펴보기까지 했습니다. 이곳은 절대적으로 그들에게 불리합니다. 함정이라니요?”
“그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소소정은 점점 더 조급해졌다. 눈앞에 보이는 증거보다 언뜻 스치는 예감이 무서우리만치 정확할 때가 있는 법이었다.
“선운검파는 철수합니다. 갑시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선운검파 제자들 셋이 주춤주춤 소소정의 뒤를 따랐다. 용조현은 차마 말리지도 못하고 그들의 돌아서는 뒷모습만 멍하니 볼 뿐이었다. 그때,
쿵!
산이 무너질 것 같은 굉음과 함께 거대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이른 아침이었건만 밤이 된 것처럼 눈앞이 캄캄해졌다.
우르르, 쾅! 우르르
토끼 바위를 감싸고 둘러싼 양쪽 산줄기에서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양의 토사가 쓸려 내려왔다. 그것들이 절벽으로 향하는 유일한 진입로를 막아버리니, 결국 스무 명 남짓한 오대산검의 고수들은 토사 장벽 안에 고립되고 말았다.
“제길, 당했다.”
자기 키만큼 쌓인 흙더미 앞에서 용조현은 망연자실했다. 고작 며칠 비가 내렸다고 해서 산사태가 일어날 리가 없었다. 그들은 태을신교의 간악한 속임수에 걸려든 것이었다.
“이제야 공평해졌군요.”
낭랑한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이서문이었다. 평소와 달리 말투에도 태도에도 친절함이라고는 없었다. 한쪽으로 삐쭉 올라간 입 모양에서 상대에 대한 경멸의 감정이 느껴졌다.
“참으로 더럽고, 유치하구나. 형제들의 생사를 가지고 속임수를 쓰다니 정녕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구나.”
“흥! 언제는 우리를 사람으로 대하셨소?”
용조현의 일갈에도 이서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입가에 잔뜩 조소를 띄고는 거만하게 부채를 흔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일시에 기괴한 가면을 쓴 궁수들이 그들을 향해 활시위를 겨눴다.
“감정 소모뿐인 말싸움은 그만합시다. 원래의 목적대로 인질을 교환하지요.”
여태 조용하던 백형진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이 상황을 예견이라도 한 듯이 조금도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그 당당한 태도에 용조현도 점차 흥분을 가라앉혔다.
“먼저 우리 가족들을 호랑이 바위 쪽으로 넘겨주시지요. 그다음에 그쪽 형제들이 있는 곳을 알려드리지요.”
“그걸 어찌 믿습니까?”
형진의 물음에 오대산검의 고수들은 모두 고개를 주억거렸다. 기실 인질을 넘겨주고 나면 그들에게는 협상의 수단이 전혀 없었다. 뿐인가? 당장 흙더미 속에 갇혀버렸으니 이곳에서 나가는 것만도 하루가 꼬박 걸릴 터였다. 형제들 이전에 자신들의 안위가 더 걱정이었다.
“그럼 다른 방법이 있소?”
굵고 거친 목소리는 서문의 것이 아니었다. 흙더미 위에 우뚝 솟은 남자의 인영은 거대한 덩치만으로도 공포심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늘을 찌를 것처럼 길고 날카로운 창을 든 모습은 흡사 부동명왕의 모습과 같았다. 그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소소정의 입술 사이에서 옅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인질들을 벼랑 끝으로 옮깁시다.”
고립된 그들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장문들과 눈짓을 주고받은 용조현은 못마땅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십여 명의 문도들이 분주하게 태을신교의 포로들을 데리고 이동했다. 머리에 천을 쓴 이들이 끈에 묶여 질질 끌려가는 모습은 지켜보기 힘들 만큼 처참했다.
내려다보는 마진건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저놈들 모두를 찢어발기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럴 수 있는 인원도, 시간도 없었다.
“저 중에 적우를 찾아라. 그 아이를 확인하는 즉시 교도들을 절벽 아래로 밀 테니 너 또한 적우를 안고 뛰어내려라.”
서문의 신호에 마진건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절벽 아래에는 교도들을 구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충분히 안전장치를 해놓았으니 태을신공으로 추락 속도만 낮춰주면 가능한 일이었다. 삼십여 명의 사람을 받을 정도의 공력은 교주 성곤 한 명이면 충분했다.
“간다.”
마지막 사람까지 바위 위로 올랐을 때, 서문은 흙더미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비에 젖은 푸른 옷깃을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모습이 흡사, 한 마리 나비와 같았다.
용조현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사방을 감싸고 있는 궁수들 때문에 감히 덤비지는 못한 채, 이서문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작은 틈이라도 보인다면 목숨을 내놓더라도 동귀어진할 작정이었다.
‘적우가 없다.’
한편, 마진건의 얼굴은 점점 심각해졌다. 눈을 비비고 찾아봐도 삼십 명 남짓한 포로 중 적우는 없었다. 설마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따로 빼돌렸을까? 현진 하나만으로도 충분했을 테니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휘익!
어느덧 준비가 끝난 이서문이 사제를 향해 휘파람을 불었다. 적우가 누구인지만 알려주면 계획의 반은 성공이었다. 그러나 진건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쾅!
다시 한번 어마어마한 진동이 산을 뒤흔들어 놓았다. 자욱한 먼지 속에서 보이는 것은 번쩍번쩍하는 섬광이었다. 이윽고 분진이 가라앉자 비 사이를 뚫고 거대한 덩치의 사내를 어깨에 둘러멘 노인이 유유자적 걸어 나왔다. 그의 뒤로는 성인이 충분히 드나들 만한 크기의 구멍이 휑하니 뚫려 있었다.
“조양…….”
이서문의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탄식이 흘러나왔다. 여태 그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았던 그가 가장 절체절명의 순간에 신처럼 나타난 것이었다.
“이 망나니를 찾는 거라면 돌려주지요.”
조양은 하찮은 짐짝 던지듯 사내를 집어던졌다. 그야말로 피떡이 된 적우는 아예 의식이 없는지 바닥에 축 늘어져 움직이지 않았다. 정파의 문도들조차도 그 모습이 너무 처참하여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조양!”
찢어질 듯한 괴성을 지르며 이서문이 조양을 향해 돌진했다. 사랑하는 아우의 끔찍한 몰골을 확인하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던 이성의 끈이 ‘뚝’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자신을 살리겠다고 온몸으로 장은을 막아내던 아우의 절규가 귓속에서 윙윙거렸다.
휘익!
마진건은 사형을 말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즉시 몸을 날렸다. 날렵하게 바닥으로 내려온 그는 그대로 커다란 바위를 들더니 조양이 뚫어놓은 구멍을 향해 던졌다. 거의 동시에 교도들에게는 짧고 단호한 명령이 떨어졌다.
“쏴라!”
곧이어 수십 개의 화살이 빗물처럼 세차게 쏟아졌다. 조양 덕분에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오대산검의 고수들은 다시금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주춤하는 사이 진건은 한달음에 적우에게 달려가 그를 등에 업었다.
“조금만 견뎌라.”
아우를 구한 진건은 다음 목적지인 호랑이 바위로 내달렸다. 서문이 조양을 상대하는 동안 본래의 계획을 실행할 작정이었다. 화살이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끝내야 했다.
핑!
스산한 기운을 느끼고 몸을 돌렸을 때는 이미 누군가의 암기가 진건의 어깻죽지 사이에 깊이 박힌 뒤였다. 그것이 손톱만 한 크기의 구슬임을 확인하는 순간, 그의 무표정한 얼굴이 맹수처럼 험악하게 변했다.
“소소정!”
“그래요, 나예요.”
진건과 마주 선 소정의 얼굴에는 증오가 가득했다. 한때는 모든 것을 바쳐 사랑했던 사내. 그러나 고작 대의 때문에 뱁 속에 아이를 품은 정인을 버린 그 사내를 드디어 대면한 것이었다.
십여 년 만에 서로를 마주한 두 사람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드디어 이 질기고 추악한 인연을 끊을 때가 되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