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98화 (98/209)

#98화. 連枝(연지)

***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는 궁궐의 하루는 분주했다. 장차 려국을 이을 귀한 세자의 백일이니 그럴 만도 하였다. 줄을 이어 축전을 보내는 대신들 사이에는 현진과 그의 어머니도 있었다. 비록 그 이면에는 다른 목적이 있었으나 축하의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 세자가 태어났으니 아버지는 사면되실 수 있을까요?”

“글쎄다. 그랬으면 좋겠구나.”

나이보다 일찍 철이 든 딸을 바라보며, 어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그들의 바람은 꺾일 것이 분명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얻은 세자에게 창의의 존재는 더욱 위협적일 터였다. 그런데도 마지막 희망은 아우 창현의 너그러운 성품이었다.

“후에 아우를 만나거든, 누구 보다 아껴 주어야 한다.”

“그럼요, 어머니.”

현진은 마냥 신이 났다. 아버지는 곧 돌아오실 테고, 아이는 쑥쑥 자라 더없이 사랑스러운 아우가 될 것이었다. 자신의 검지를 소중하게 쥐고 있는 아기를 내려다보며 다시 없을 행운이자 축복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딸의 바람과 어미의 작은 기대는 바로 그날, 산산이 부서졌다.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아버지 앞에서 현진은 목이 쉬도록 울부짖었다.

“내게는 아우를 지키는 것이 려국을 지키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단다.”

역모를 꾀했다는 기막힌 누명을 쓰고서도 왕을 원망하지 않았던 아버지였다. 처자식을 버리면서까지도 아우를 지키던 형이었다. 하여, 현진은 마지막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을 아버지가 미치도록 원망스러웠다.

“이따위 지랄 같은 나라, 망해버리라지. 아버지가 지키고자 한 것이 얼마나 부질없었는지 똑똑히 보란 말입니다. 나는 결코 당신처럼 살지 않을 겁니다. 고작 하찮은 핏줄 때문에 내 삶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마지막 울음을 뱉어내며 현진은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얄궂게도 그 이듬해 겨울, 려국은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현진의 바람이 진짜로 이루어진 셈이었다.

***

“운선아, 정신 차려라. 운선아!”

현진은 목에서 피가 나도록 외쳤다. 지금은 넋이 나가 있을 때가 아니었다. 교활한 적의 칼날이 바로 앞에서 번뜩이고 있었다.

“제발…….”

그러나 운선의 시간은 완전히 멈춰버렸다. 이제 와 생각하니 그동안 눈치채지 못한 것이 더 어이가 없었다. 늘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던 이가 누구였던가? 몇 번이고 위험을 무릅쓰며 구하러 온 이가 누구였던가? 다 포기해도 좋다고, 망설이는 자신의 등을 토닥여준 이는 언제나 그의 누이였다.

“창현의 아들답구나.”

장은은 너무나 뻔한 상대의 반응에 코웃음을 쳤다. 실력이 대단하다고 한들, 저리 약한 정신 상태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려국의 새로운 미래는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영명곡우(穀雨)”

따뜻한 기운이 일시에 오른손에 모였다. 비좁은 공간이기에 공력의 삼 할만 사용하였으나 상대를 제압하기에는 충분했다. 질문은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을 터였다. 우선은 저 꼴 보기 싫은 녀석을 실컷 때려주고 싶었다.

퍽!

“운선아!”

상대의 명치를 겨냥한 공격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적중했다. 힘 조절을 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절명했을 만큼 정확한 타격이었다. 자지러지는 현진의 비명만으로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라?”

맞은 쪽은 운선인데 어쩐지 자신의 가슴팍이 시큰해지는 느낌이었다. 천천히 시선을 내려보니 명치 부위에 상대의 주먹이 꽂혀 있었다.

“네 이놈!”

장은은 재빨리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쓰라리긴 했지만 그리 통증이 심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내력을 거의 싣지 않은 공격인 듯했다. 단전에 기운을 모아보아도 딱히 울혈을 느끼지는 못했다.

‘내 공격은 제대로 먹혔으니 분명 타격이 있을 것이다.’

여전히 운선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한차례 비명을 지른 현진이 울컥 선혈을 뿜어내는 양을 보면서도 선뜻 다가가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본능적으로 막은 것일 뿐, 나를 따라오려면 아직도 한참 멀었다. 영명소한(小寒)!’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기운이 다시금 그의 오른손으로 모였다. 계절에 맞지 않는 서늘함이 마치 칼날처럼 공기를 가르고 날카롭게 뻗어 나갔다. 역시 공력의 삼 할을 담았으나 아까의 초식보다 훨씬 공격적이고 반경이 컸다. 이번에도 제대로 맞는다면 한동안은 움직이기도 힘들 것이었다.

퍽!

주먹이 운선의 아랫배에 정확히 강타했다. 그 충격으로 그의 등이 활시위처럼 둥글게 휘어졌다. 기가 역류하고 내장에 충격을 받았으므로 혼절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어?”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번에도 통증을 느낀 쪽은 장은이었다. 굽었던 운선의 몸이 다시 뻣뻣하게 돌아왔을 때, 장은은 참지 못하고 검붉은 선혈을 울컥 토해냈다.

“이……, 이……이게 무슨……?”

우연이 아니었다. 아까도 일부러 받아주는 척하였을 뿐, 공격의 일환이었다. 얼핏 보면 급소를 두 번이나 맞은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경전을 읽어보았다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알아보지 못했다니 참으로 한심하구나. 이것이 바로 경전에 적힌 무공 태을신공이니라.”

장은은 극심한 가슴 통증으로 허리도 펴지 못했다. 아까 맞은 권풍에 늑골이 부러졌는지 숨을 쉴 때마다 송곳같이 뾰족한 무언가가 폐부를 찔러대는 것 같았다. 운선은 천천히 다가가 그의 오른 손목을 지그시 밟았다. 고통에 찬 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완골(腕骨)이 부러지도록 힘을 주었다.

“으아아아악!”

“네놈은 영명권을 쓸 자격이 없다. 너 따위가 감히 넘볼 수 없는 고귀한 무공이다.”

좀처럼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운선이었으나, 이놈만은 달랐다. 뱀 같은 혀를 놀려 사람들을 이간질하고 무고한 백성을 학살했다. 스승을 음해했으며 자신의 누이를 욕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살려 둘 가치가 없는 개망나니였다.

“운선아, 그만두어라. 지금은 때가 아니다.”

“…….”

“네가 든 검의 이름이 무엇이더냐?”

이번에도 그를 말린 것은 현진이었다. 운선은 문득 자신의 왼손에 들린 수월을 내려다보았다. ‘수월심’ 물에 비친 달이 일그러지지 않으려면 그 물은 언제나 잔잔해야 했다. 그제야 분노로 가득 찼던 마음이 고요해졌다.

장은은 이미 혼절한 뒤였다. 죽일 생각이 없다면 괴롭혀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운선은 비로소 현진에게로 주춤주춤 다가갔다. 감정이 소용돌이처럼 몰아쳐 차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나는 괜찮다. 그러니 얼굴을 보여다오.”

누이를 바라다보는 아우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과연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현진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그러나 운선에게는 여전히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누이였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저 혼자 살겠다고 떠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네 잘못이 아니다.”

현진은 덜덜 떨리는 손을 내밀어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앳된 운선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아무리 부정해도 외면할 수 없는 존재가 있는 법이었다. 현진에게는 운선이 바로 그러했다.

“나는 틀렸다. 이곳에서 나간다고 하더라도 얼마 버티지 못할 거야. 그러니 엄한 목숨 구하지 말고 적우를 찾아라. 또한, 우리 교도들 수십이 아직 살아있다. 그들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면 아니 된다.”

“저는 사저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목이 메어 쉰 소리를 내면서도 운선은 단호하게 다짐했다. 가족을, 동족을 외면하는 것은 지난 반년으로 충분했다. 이제 그 누구의 죽음도 겪고 싶지 않았다. 그 누구가 현진이라면 더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수월을 들어 현진을 묶어두었던 포승줄을 끊어냈다. 어찌나 세게 압박했던지 그녀의 하얀 손목이 시꺼멓게 변색 되어 있었다. 부러질 것처럼 가느다란 손목을 부여잡으며 운선은 애써 울음을 삼켰다.

“아아, 큰일이 났구나.”

무심코 고개를 돌린 현진은 그사이 장은이 도망친 사실을 깨달았다. 금세 적들이 우르르 몰려올 텐데, 아무리 운선이 대단하다 하더라도 혼자서는 무리였다.

“나를 두고 가라. 그를 잡아두어야 한다.”

“제게 다 생각이 있으니 믿으세요. 일단 이곳을 나갑시다.”

운선은 서둘러 현진을 등에 둘러업었다. 장은을 따라가기에는 이미 늦은 듯했다. 처음 계획은 어그러졌지만 그렇다고 실패는 아니었다. 호랑이 바위까지만 빠져나간다면 아직 승산이 있었다.

***

“운선아,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는 다음 수가 있다.”

서문의 계획은 온전히 장은의 성향에 맞춰진 것이었다. 그의 약점은 오직 자기 자신 외에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토벌대가 위험에 빠질지 모른다는 예측을 하고 있었으면서도 그의 오른팔 정은률을 보낸 것만 보아도 알 만했다.

“우리의 제안에 순순히 응한다고 할지라도 막상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인질 전부를 죽여버릴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는 태을신교를, 려국인을 증오한다. 하여, 장은의 발을 묶어둔 상황에서 협상을 진행해야 한다.”

“그럼 어떻게 장은을 잡아둘 생각입니까?”

서문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어쩌면 자충수가 될지도 모를 작전이었다. 또한, 운선에게 너무 큰 짐을 지우는 일이기도 했다.

“장은은 현진을 쉬이 죽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점을 이용할 생각이다.”

서문이 진시에 인질극을 벌이는 동안, 운선은 현진을 사이에 두고 장은을 잡아둘 생각이었다. 운선이 비록 실전 경험이 적지만 무공 실력만으로 본다면 결코 장은에게 뒤지지 않았다. 게다가 같은 스승에게 필살기를 배웠으니 시간을 끌기에 쉬울 터였다.

“그런데 과연 장은이 그 새벽에 사저를 만나러 올까요?”

다른 건 다 차치하더라도 그 예측이 어긋나면 이 계획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철두철미한 성격의 운선은 내내 그 점이 걱정되었다.

“반드시 만나러 온다. 장은에게 현진은 아주 특별한 사람이니까.”

서문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사랑하는 사매를 미끼로 쓰는 자신이 참을 수 없이 혐오스러웠다. 그러나 교도 수십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는 더한 미친 짓도 해야 했다. 그것이 지난 이십여 년간 그가 살아온 삶의 방식이었다.

“운선아, 진시까지만 잡아두어라. 그리고 현진을 꼭 구해야 한다.”

***

진시까지는 아직도 한 식경이나 남았다. 벌써 일이 꼬였으니 다음이 걱정이었다. 그러나 이미 놓친 장은을 뒤쫓는 것 또한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당장 현진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었다.

‘일단 호랑이 바위까지 간다. 진건 사형까지 왔으니 수가 생길 것이다. 정 안되면 내가 인질이 되어 형님들을 구하면 된다.’

운선은 마른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갈라진 틈 사이로 금세 피가 배어 나왔다. 내내 목구멍으로 비린 맛이 넘어가는데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오직 등 뒤에 전해지는 누이의 끊어질 듯 이어지는 숨소리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동굴을 빠져나올 때까지 다행히 추적자는 없었다. 이제 호랑이 바위까지는 금방이었다. 그때까지 현진이 잘 버텨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장은이 벌써 나가서 방해하고 있을까?’

만약 순순히 인질을 보내주지 않는다면 이쪽에서도 다른 수가 필요했다. 치사한 방법이긴 해도, 누구 하나를 들이밀고 협박이라도 해야 할지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득 곽도평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금세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예전처럼 인정에 이끌려 일을 그르친다면 내 가족이 죽게 된다. 지키기 위해서는 더 모질고 독해져야 했다.

이윽고 바위의 끝자락이 보이기 시작했다. 호랑이는 잔뜩 웅크린 모양이었으나 언제라도 뛰어오를 듯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운선은 자신도 모르게 그 시선의 끝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당장이라도 비를 뿌릴 것처럼 구름이 가득했다.

뎅, 뎅, 뎅, 뎅, 뎅, 뎅, 뎅!

때마침 진시를 알리는 타종이 용문산 자락을 감싸 안았다. 웅장하지만 단정한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새삼 마음이 울렁거렸다. 지난 반년간의 죄업을 어찌 씻을 수 있을까? 자신의 사촌 누이도 알아보지 못하면서, 려국인을 어찌 지킬 수 있을까?

“운선아…….”

마른 나뭇가지처럼 바짝 마른 현진의 손이 운선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 정도의 움직임이 그녀가 지금 아우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네 탓이 아니다. 네 잘못이 아니야. 너 혼자 다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사저…….”

현진은 부디 자기의 죽음이 아우에게 상처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온 힘을 다해 한 마디씩 뱉어냈다. 끝내, 려국인의 피를 외면하지 못했던 자신처럼 이 아이도 평생을 죄책감으로 살아갈 테지. 그 생각을 하니 미안하고 또 안쓰러웠다. 문득 아버지의 쓸쓸한 웃음이 떠올랐다. 아우를 지킬 수 있어서 다행이라던 그의 마지막을 지금에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운선아…….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현진의 손이 어느새 운선의 허리 아래로 늘어졌다. 약하게 느껴지던 맥박이, 미세하게 들리던 숨소리가 완전히 멎어버렸다.

“누이……?”

운선은 더는 걸어갈 힘이 없었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도 없었다. 그에게는 아직도 지켜야 할 사람들이 너무 많았으므로.

후두둑!

머리 위로, 한 방울, 두 방울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울지도 못하는 누군가를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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