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自欺欺人(자기기인)
동이 튼 지가 한참 지났건만, 가은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지난밤을 꼴딱 새우고도 소정은 피곤한 줄을 몰랐다. 그녀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였다.
‘과연 현진이 거래를 받아들였을까? 가은이 뒤처리를 제대로 했을까?’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손톱을 물어뜯는 양이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그만큼 소정에게는 이 결단이 전심을 다 한 승부수였다. 그때,
“사부님, 가은입니다.”
부름이 끝나기도 전에 달려 나가 문을 열었다. 새벽에 내린 비를 홀로 다 맞았는지 가은의 온몸이 홀딱 젖어 있었다. 표정이 어두운 걸 보니, 결과가 좋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어찌 되었느냐?”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잔뜩 묻어나왔다. 수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하느라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대답은 받아왔습니다. 다만 상대가 조건을 거는 바람에 물을 건네지는 못했습니다.”
가은은 무심하게, 그러나 소정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대답했다. 어쩐지 평소의 모습과 다른 느낌이었으나 그렇다고 크게 이상한 점은 없었다. 어린 나이에 너무 큰 임무를 맡은 터라 진이 빠졌으리라 생각했다.
“그만하면 되었다. 잘하였다.”
동굴에서 있었던 일을 듣는 내내 소정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고작 네 글자를 알아냈을 뿐이지만 추후 상황에 따라 나머지도 알 수 있을 테니 안심이 되었다. 역시 가은을 보낸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어쩐지 어깨가 으쓱해졌다.
‘예상대로 장은은 현진을 죽이지 않을 생각이구나. 그렇다면 일이 더 쉽다. 구해주는 척 글자만 알아낸 후에 처리하면 될 일이지.’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오리라는 믿음으로 버텨낸 십여 년이었다. 연인을 배신하고 친언니를 해하면서 지켜낸 그것. 기쁘다 못해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그럼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러려무나.”
그런데 가은을 물리고 나니, 문득 가슴 한편이 서늘해졌다. 저 호기심 많은 아이가 어째서 아무 질문도 없는 것일까? 혹시 자신이 왜 선택되었는지 이유를 눈치챈 것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곧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만약 이유를 알았다면 문파에서 도망갈지언정 목숨을 걸고 동굴을 다녀올 리가 없었다.
‘수완만 좋은 줄 알았더니 운도 좋은 편이군.’
한편, 소정을 만나고 나온 가은은 구역감이 올라와 참을 수가 없었다. 여태 저런 인간을 필생의 인연이라 여기고 존경했다니, 멍청한 자신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현진의 말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확신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소정의 검은 속내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은아, 내 얘기를 잘 들으렴. 소소정이 너에게 이 일을 맡긴 이유는 뻔하다. 네가 죽어도 상관없기 때문이지. 아마도 대답을 들은 후에는 나를 죽이라고 했겠지. 맞지 않니?”
“…….”
침묵은 긍정의 대답과 같았다. 현진은 새빨개진 가은의 낯빛을 확인하더니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장은은 나를 죽일 생각이 없다. 하여 네가 나를 죽이게 된다면 장은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소소정은 너를 쓰고 버리려는 생각이다.”
가은은 충격으로 손이 발발 떨리고 속이 메스꺼웠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붉어지는 눈시울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이 서찰에는 장소가 적혀있다. 십여 년 전, 소소정이 훔쳐 간 열쇠가 있는 곳이지. 그리고 나에게 요구한 것은 그 열쇠로 열 수 있는 보물 창고의 위치란다.”
“보물 창고요?”
“이 땅의 어딘가에는 려국이 숨겨둔 보물 창고가 있단다. 그곳에 가면 세상의 모든 권력과 부(富)를 손에 넣을 수 있다지. 하여 경국의 황제도, 천서국의 오랑캐들도 그곳을 찾기 위해 오랫동안 려국인들을 괴롭혔단다. 그러나 그 장소는 려국 왕실의 핏줄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다만 만약을 위해 ‘해심밀경소’에 암호를 남겨놓았지. 그래, ‘해심밀경소를 얻는 자, 세상 전부를 얻게 된다.’라는 소문의 진실이 바로 이것이란다.”
설명은 간략했지만 영특한 가은은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간 들어왔던 소문, 스스로 유추해냈던 생각들과 조합해 보니 어지간한 의문점들이 모두 풀렸다.
“이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그곳으로 들어가기 위한 열쇠를 숨겨두었단다. 각각의 글자가 적힌 일곱 개의 열쇠. 맞다. 지금 너와 내가 각각 하나씩 가지고 있는 이 구슬이 바로 그 열쇠의 일부란다.”
고작 한 줌의 빛 속에서도 구슬은 특유의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가은의 눈에서도 형형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가슴이 설레다 못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마치 이 세상을 목에 걸고 있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소소정에게는 내가 말해준 여덟 글자를 전하렴. 려국인이 아니면 절대로 그 뜻을 풀어낼 수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너에게는 수수께끼의 답을 알려주마. 내가 죽거든, 반드시 강운선을 찾아 열쇠를 전해주렴. 은아, 절대로 잊지 말아라. 너에게는 려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단다.”
가은은 자신도 모르게 현진의 거친 손을 꼭 그러쥐었다. 온갖 고문으로 피고름이 가득했지만 따뜻하고 포근했다. 난생처음 느낀 혈육의 체온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하얀 내를 건너는 소, 그 소의 뿔이 가리키는 아홉 개의 우물.”
가은은 잊지 않기 위해 다시금 천천히 되뇌어 보았다. 그녀의 목에 걸린 두 개의 구슬이 서로 부딪쳐 맑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회의는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다른 안건은 대강 마무리가 되었으나, 태을신교의 포로들을 어찌 처리할지는 좀처럼 중지가 모이지 않았다.
“태봉으로 떠난 토벌대는 분명 살아있을 겁니다. 그들을 참수한다면 사형제들의 목숨도 끝이라는 말입니다. 살릴 길이 있다면 마땅히 노력해보아야 하는 게 아닙니까?”
누구도 쉬이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용조현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어렵게 잡은 적우와 현진을 살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반면 장은은 조금도 갈등하지 않았다. 애초에 고유생과 정은률을 보낼 때, 결과를 충분히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문파의 핵심 전력인 그들을 보냄으로써 이서문을 속일 수 있었으니 이용 가치는 충분히 다한 셈이었다. 기실, 두 사람은 장은에게 버리는 패와 다름없었다. 사사건건 방해가 되는 고유생은 이참에 떼어낼 생각이었으니 오히려 다행이었다. 은률이 좀 아쉽긴 하지만 대의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 생각했다. 하여, 전력을 다해 그들을 구해낼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던 것이다.
“저 또한 사형제들을 버리려는 마음은 전연 없습니다. 허나 그들이 위험에 빠졌는지, 지금 돌아오는 길인지 어찌 압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망설인다면 이번에도 마교 섬멸은 꿈에 그칠 것입니다.”
장은이 검은 속내를 감추면서 열렬히 성토하니, 어느덧 수긍하는 분위기로 이어졌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다 잡은 태을신교의 마두들을 놓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휘익!
그때, 장은의 얼굴을 향해 화살 하나가 날아왔다. 그가 번개같이 피하지 않았더라면 이마 한가운데가 뚫릴 뻔한 정확한 조준이었다.
“이게 무슨?”
“문주님! 괜찮으십니까?”
장내는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날아온 화살은 둘둘 감긴 서찰을 품고서 대청 기둥에 깊숙하게 박혔다. 몇몇 제자들이 혹시나 살수를 잡을 수 있을까 싶어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아무도 성과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서찰이 있군요.”
용조현은 침착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화살에 묶인 서찰을 펼쳐 들었다. 단정한 글씨를 읽어내려가는 그의 얼굴에 점차 희망의 빛이 비쳤다.
“내일 진시에 호랑이 바위 위에서 인질을 교환하자 합니다.”
“호랑이 바위?”
장은을 바라보는 조현의 얼굴에는 결연함이 가득했다. 이렇게 된 이상 결코 반대할 수 없겠지. 여러 중소 문파가 모두 모인 이 자리에서 공론화되었으니 이보다 더 확실한 물증은 없었다.
“거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태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백형진의 한 마디였다. 두타공파까지 나서자 모두의 의견이 하나로 모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장은은 몹시 흥분한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목구멍으로는 쓴 물이 꿀꺽 넘어갔다. 이것이야말로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격이었다.
‘그 전에 반드시 알아내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회의를 끝내고 싶었으나, 협상의 방법을 논의하는 일로 하루를 다 보내고 말았다. 이제 그에게 주어진 여유는 몇 시진도 채 되지 않았다.
장은은 일부러 인시가 넘기를 기다려 동굴로 들어갔다. 수하들에게는 현진을 심문하고 직접 절벽으로 데리고 가겠다 얘기해 두었다. 그러나 그럴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현진을 족쳐서 답을 들은 후에 적우와 함께 죽여버릴 테다. 흥! 인질 교환? 어디 가능한가 보자.’
동굴로 들어가자마자 습하고 역한 공기가 훅 끼쳐 들었다. 지난 보름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이곳을 드나들었지만 조금도 익숙해지지 않는 악취였다. 용문파의 시조가 려국인이라더니, 과연 려국인의 마을에서 나던 지린내 같기도 했다.
팔뚝으로 코와 입을 막은 채, 현진이 묶인 위치까지 한달음에 내달았다. 입구와 가장 가까운 이곳은 천장 틈으로 볕도 들었다. 그녀의 신분을 고려한 나름의 배려였다.
“잘 생각해 보셨습니까? 저번에 말했듯, 경전의 비밀만 말해준다면 당신을 살려드리겠습니다.”
“…….”
바닥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는 현진은 의식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은커녕 미동조차 없으니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보시오, 소백화?”
장은은 저 더러운 몰골을 차마 만질 수는 없어 손가락 끝으로 쿡쿡 찔러보았다. 기운이 없어서인지 작은 힘을 가했는데도 현진의 몸이 말라비틀어진 가지처럼 앞뒤로 흔들거렸다.
“소백화?”
그때, 장은의 얼굴 옆으로 강한 회오리바람이 불어닥쳤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꺾어 피해내니 이번에는 시퍼런 검날이 명치 쪽을 향해 날아왔다. 중심을 잡지 못한 상태에서 허리를 비트는 순간 머리 위쪽으로 서늘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후두둑!
머리 장신구와 함께 손 한 뼘 길이의 머리카락이 뭉텅 잘려 나갔다. 그나마도 장은이 눈치가 빨랐기에 큰 부상은 면한 것이었다.
“어째서 네가?”
그제야 장은은 흐늘흐늘 움직이는 불빛에 서 있는 사내의 얼굴을 확인했다. 분명 반년 전에 만난 그치가 맞건만, 어쩐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듯싶었다.
“강운선, 이렇게 금세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마치 친한 지기를 만난 듯,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이 역겹기 그지없었다. 현진을 이리 처참하게 고문해 놓고 저런 선량한 웃음을 짓는 양이 사뭇 소름 끼쳤다.
“네놈이 사저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사저? 하하하하하.”
당장이라도 모가지를 꿰뚫어버릴 것 같은 상대를 앞에 두고 장은은 파안대소를 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온갖 죄책감을 지고 사는 운선이 불쌍할 지경이었다.
“강대협, 무릇 무인이라면 호적수를 알아보는 법이지요. 같은 스승에게 배웠으나 사형제는 될 수 없는 우리 역시 인연은 인연이지 않습니까? 쉬이 승부가 나지 않을 일에 열 내지 마시고 허심탄회하게 대화나 해봅시다.”
장은은 주절주절 말을 걸면서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하나로 묶었다. 오히려 강운선이 나타났으니 일이 훨씬 쉬워질 것 같았다.
“인질 교환은 덫이었나요?”
“…….”
운선은 대꾸할 생각이 없었다. 대화는 사람끼리 나눌 일이지 짐승과는 불가능했다.
“해심밀경소는 왜 주었습니까? 샅샅이 읽어보아도 그저 경전 해석본일 뿐, 별다를 게 없더란 말입니다. 혹 진짜 비밀은 따로 있는 게 아닙니까?”
“…….”
이번에도 침묵을 지켰으나 예리한 장은의 시선은 유난히 흔들리는 적의 눈동자를 놓치지 않았다.
“대화를 안 하시겠다? 나 하나쯤은 죽일 수 있다? 뭐 이런 의중인 겁니까?”
일순 장은의 얼굴에 비열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이제 당사자인 운선에게 직접 확인할 생각이었다. 아마도 현진보다는 훨씬 쉬울 터였다. 삶을 포기한 자와 달리 그에게는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았으므로.
“그럼 제가 당신의 소중한 가족을 죽여도 말입니까?”
“뭐?”
운선은 장은의 도발을 참지 못하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무슨 꿍꿍이인지 팔짱을 끼고 빈정거리는 양이 퍽 가증스러웠다.
“저런, 화가 많이 난 게로군요. 그럼 협박은 그만두고 대신 협상을 하지요. 각자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는 겁니다. 만족할 만한 답을 얻는다면 다른 이들은 몰라도 여기 소백화는 풀어주지요.”
“나는 너와 협상을 할 마음이 없다. 문답은 더더욱.”
운선은 왼손에 든 수월에 내력을 집중했다. 저놈이 허튼수작을 보이는 즉시 검을 휘두를 생각이었다.
“궁금한 것이 없다면 제가 알려드리지요.”
“뭐?”
빈정거리는 장은의 얼굴에는 여유가 넘쳤다. 단지 검을 든 운선이 두렵지 않아서가 아닌, 완전히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강한 확신이었다.
“운선아……. 들을 필요 없다. 난 상관 말고 저놈을 죽이렴. 적우를 구해야 한다.”
세차게 흔들리는 운선의 마음을 잡아준 것은 다름 아닌 현진이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는 장은의 교활한 수가 무엇인지 대번에 알아챘다. 이 자리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자신이 걸림돌이 될 수는 없었다.
“아아. 눈물겨워 차마 보지 못하겠습니다. 누이 없는 저 같은 사람은 어디 서러워서 살겠습니까?”
“장은! 하지 마라!”
“지금 뭐라고 한 것이냐?”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운선을 바라보며 장은의 입꼬리가 주욱 올라갔다.
“소백화가 당신의 누이라고 말했습니다. 네, 그녀는 려국의 마지막 왕 창현의 조카이자 그의 형 창의의 여식이지요, 당신의 유일무이한 혈육이란 말입니다.”
“장은!”
당장이라도 장은의 목을 벨 것처럼 수월을 겨누던 운선의 팔이 스르륵 아래로 떨궈졌다. 분명 아무도 던진 사람이 없었는데 정수리에 돌을 맞은 것 같았다. 절규하는 현진과 비열하게 웃는 장은 사이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얼음처럼 서 있는 것뿐이었다.
*** 자기기인(自欺欺人):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