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養虎遺患(양호유환)
입춘(立春)이 지나고 날이 제법 포근해졌건만, 지하 동굴에는 빛 한점 들지 않아 습하고 어두웠다. 내상까지 입은 현진은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나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한때는 고귀한 신분이었던 당신이 이게 무슨 꼴입니까? 이쯤 해서 모든 책임을 내려놓고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다른 이들은 몰라도 당신만은 내버려 둘 수 없으니, 제발 마음을 돌려주십시오.”
현진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장은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대부분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으나 목숨은 살리고 싶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퉷! 너 따위에게 목숨을 구걸할 생각은 없다.”
코뼈가 부러지고 온 얼굴이 멍투성이였으나 형형한 눈빛만은 조금도 스러지지 않았다. 기실, 현진은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 다만 이 치욕을 견디는 것이 끔찍할 뿐이었다. 차라리 이놈의 화를 돋우어 죽음을 재촉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아니 될 일이지요. 당신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살릴 테니 두고 보십시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가 기억이 납니다. 우연히 눈이라도 마주친 날에는 황송하여 밤새 잠도 못 이루었지요. 당신은 저에게 그런 존재였습니다.”
장은은 옛 생각에라도 잠긴 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태봉 궁궐의 아름다운 정원이 다시금 눈앞에 펼쳐졌다. 사람이란 바로 다음 순간의 일도 미리 알지 못하는 미물이거늘, 그 어린 나이에 무슨 번민이 그리 많았던가?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시절이었다.
“어차피 죽고 싶은 당신의 소망은 이뤄지지 않을 테니 질문에 답을 하십시오. 그리하면 더는 괴롭히지 않겠습니다.”
추억에서 빠져나온 장은은 현진의 얼굴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마주한 그의 눈은 마치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교활하고 섬뜩했다.
“경전에 있는 비밀이 무엇입니까? 어째서 강율천이 그리 소중히 지키려 하였습니까? 조양, 아니 그 뒤에 있는 황제까지도 왜 그 경전을 노리는 겁니까?”
“…….”
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온 힘을 눈에 모아 그를 경멸하고 비웃었다.
“하아, 대단하십니다. 그간 어떤 삶을 살아오셨길래 이런 지독한 고문도 견디는 겁니까? 그럼, 딱 질문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장은은 꿇었던 무릎을 펼치더니 아예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오늘은 기필코 한마디의 대답이라도 들을 작정이었다. 이 여인의 역린만 찾아낸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강운선!”
“…….”
여태 분노와 조롱만 담겨 있던 그녀의 눈빛이 일순 흔들렸다. 놀라움? 걱정? 그 감정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으나 드디어 약점을 찾은 것만은 분명했다.
“강운선이 혹 왕실의 핏줄입니까? 아니, 아니, 다시 묻겠습니다. 그가 창현의 아들이 맞습니까?”
“감히 려국의 왕을 함부로 부르지 말아라!”
현진의 처절한 외침에 동굴 안에 있던 온갖 벌레들이 우르르 몸을 숨겼다. 울컥 피를 토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장은은 드디어 길고 지리한 대결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강운선을 잡아 데려오겠습니다. 그때 다시 이야기 나누도록 하죠.”
돌아서 나오는 등 뒤로 현진의 서글픈 울음이 들려왔다. 울음의 이유는 분노가 아니었다. 나라가 망하고 모두에게 부정당했으면서도 여전히 핏줄을 끊어내지 못하는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이었다.
‘왠지 때를 잘못 고른 것 같은데?’
장은이 동굴을 빠져나간 다음에도, 가은은 한참 동안 망설였다. 발밑에 지나다니는 강구들 때문에 소름이 다 끼쳤으나 함부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자칫 실수로 소리를 냈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임무는 물론이거니와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가은이 동굴로 잠입한 때는 이미 한참 전이었다. 적우와 현진이 갇힌 동굴의 입구는 오대산검의 제자들이 돌아가면서 보초를 섰다. 하여 선운검파의 차례까지 기다려 몰래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원래는 새벽이 되기 전에 빠져나갈 생각이었건만, 갑자기 장은이 나타나는 바람에 계획이 꼬여버린 참이었다. 그 덕분에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무언가를 찾고 있는 건가?’
당장이라도 마교 놈들을 효수하자던 장은은 정작 현진을 만나서는 세상 다정했다. 어르고 달래는 양이 무언가를 알아내기 위한 포석 같았다. 문득 장은이 주었던 책의 표지가 생각났다. ‘해심밀경소’라고 했던가? 그것을 보자마자 낯빛이 변하던 소소정과 이서문도 생각났다. 정보가 전혀 없었음에도 그 책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자신이 할 일이야말로 엄청난 변수가 될 것이었다. 새삼 두려움이 밀려와 심장이 덜컹거렸다.
“저……, 저기……?”
한참의 시간이 또 흐른 뒤에야 용기를 냈다. 가은은 선뜻 다가가지는 못하고 한구석에서 여인의 동태만 살폈다. 그녀는 기운이 다 빠져나갔는지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는데 인기척이 들리자 몸을 조금 움찔거렸다.
“괜찮으신가요?”
조심스럽게 손수건을 꺼내 여인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얼굴에 가져갔다. 가까이서 보니 상처는 훨씬 더 끔찍했다. 혹여 이곳에서 살아나간다고 하더라도 예전의 고운 얼굴은 영영 찾지 못할 듯싶었다.
“누구냐?”
“저……, 저는……선운검파의 제자입니다. 소문주님의 심부름을 왔어요.”
소녀의 목소리가 들리자 현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소소정이 보냈다면 필시 좋은 의도는 아닐 테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끊어내지 못하는 연결 고리가 있었다.
“너는……?”
드디어 가은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 현진은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왜 하필 이 아이를 보냈단 말인가?
“여기 서찰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이 어색하여 가은은 재빨리 품속에서 서찰을 꺼냈다. 이미 몰래 내용을 확인해보았지만,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수한 표정을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 기가 막히는구나.”
흐릿한 눈으로 읽어내려가는 내내 현진은 연신 코웃음을 쳤다. 고작 이 정도의 인간 때문에 마음고생을 했을 마진건을 생각하니 가여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뭘 알아 오라고 하더냐?”
“장소를 알아 오라 하셨습니다.”
가은은 긴장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답을 해주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도 되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를 지배하는 주된 감정은 어이없게도 기대와 설렘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두려움이 앞섰다. 굳이 자신을 시킨 이유가 무엇일까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못하겠다고 나자빠지고 싶기도 했다.
“서찰을 전해주면 거래 조건을 물을 것이다. 그럼 장소를 알아 오렴.”
“네? 장소요?”
소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의 손에 팔각으로 접은 약봉지를 쥐여주었다.
“뭐라도 알아내거든 이걸 물에 타서 주어라. 실수가 없어야 할 것이다.”
약봉지의 내용물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효능에 차이는 있겠지만 독약이 틀림없었다. 당연히 일이 잘못된다면 모든 죄는 혼자 감당해야 할 터였다. 하여 가은은 서찰을 열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唐津草屋木下(당진초옥목하)? 이게 뭐람?”
마치 수수께끼 같은 여섯 글자. 그것을 본 순간부터 머릿속을 온통 지배하던 두려움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도대체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호기심이 두려움을 이긴 셈이었다.
“素那佛阿尉九樽物(소나불아위구존물)”
현진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술술 여덟 글자를 뱉어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두 사람이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 같았다. 하여, 당연히 의심부터 들었다. 무릇 협상이란 오고 가는 이득을 따져야 하는 게 아닌가? 고작 몇 글자만 읽고 원하는 답을 주다니, 도통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혹시 거짓으로 알려준 게 아닐까?
“거짓이 아니다. 다만 네 스승이 묻거든 앞에 네 글자만 알려주고, 내가 죽고 나서 다시 네 글자를 알려주어라.”
“네? 어째서?”
가은의 의심은 더욱더 깊어졌다. 이런 부탁은 보통 상대가 자기편일 때나 할 법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엄연히 선운검파의 제자였다. 마교 놈들은 다 교활하다더니 이 여인도 자신을 얕잡아 보고 속임수를 쓰는 게 틀림없었다.
“너에게 답을 주었으니 나도 부탁이 있다. 이리 와서 내 목에 매달린 수파(首帕) 좀 봐주련? 손이 묶여 스스로 꺼낼 수가 없구나.”
당황하여 머뭇거리는 가은을 향해 현진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부탁이라기엔 사뭇 딱딱한 말투였으나 눈빛에는 간절함이 있었다.
‘곧 죽을 사람인데 야박하게 굴 필요는 없지.’
안 그래도 독을 탄 물을 줄 생각에 꺼림칙 했는데, 이 정도 소원은 들어줘야 죄책감을 덜 느낄 것 같았다. 가은은 쭈뼛쭈뼛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목에 걸린 작은 수파를 꺼내 들었다.
“앗!”
그 동그랗고 작은 장신구를 보는 순간, 가은은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영롱한 옥색 구슬이 달린 은목걸이. 구슬은 자신의 목에 걸린 그것과 완전히 같은 모양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그 안에 적힌 글자가 ‘雲(운)’이 아니라 ‘露(로)’라는 것뿐.
“어째서 이게 당신에게?”
가은은 혼란스러웠다. 이 구슬이 무엇이던가? 필시 출생의 비밀을 밝혀줄 유일한 증거가 아니던가? 너무나 당연하게도 새로운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여인의 이목구비가 낯설지 않았다. 기억 속에 파묻혀 있던 어떤 장면이 자꾸 떠올라 가슴이 쿵쾅거렸다. 나무 뒤에서 몰래 지켜보던 여인, 어린 나이에도 퍽 아름답다 느꼈던 그 여인이 틀림없었다.
“그……, 그럼……?”
“그래, 은아. 나다.”
현진의 퉁퉁 부은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쏟아져 내렸다. 지금부터 할 말은 대부분 거짓이겠으나, 이 눈물만큼은 진심이었다. 그녀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만큼은 줄곧 변한 적이 없었으니까.
“가씨 부부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던 고충을 이해해달라 할 순 없겠지. 이제 와 이 못난 어미를 구해달라 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꼭 기억해주렴. 나는 한순간도 너를 버린 적이 없단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거짓말을 줄줄 읊어대면서도 죄책감 따위는 없었다. 고작 이 정도가 소소정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이기 때문이었다.
용문산 어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인시(寅時)가 넘은 시각이었다. 계정에서부터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온 길이었다. 제법 한기가 가신 새벽이었는데도 운선의 옷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아직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곳이 용문파라는 점이었다. 운선은 그날의 그 끔찍한 고통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하여 고문을 당했던 지하 동굴과 그 비밀 통로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사형제들이 잡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운선은 심장이 찢겨나가는 것 같았다. 그 순간에는 객잔에서 기다리고 있을 주운조차도 까맣게 잊고 말았다. 오직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선택한 반년의 삶이었다. 그것이 사형제들을 죽이고, 려국인들의 희망을 짓밟았다고 생각하니 스스로가 참을 수 없이 혐오스러웠다.
문득 자신의 행복을 빌어주며 따뜻하게 잡아주던 현진의 손이 떠올랐다. 굳은살이 단단히 박인 그녀의 손을 바라보면서도 애써 무시했다. 그 옹이가 무슨 의미인 줄 뻔히 알면서도.
‘이 한 몸이 찢기고 부서질지언정, 무조건 구해낸다.’
호랑이 바위까지 뛰쳐 올라가니 동쪽 하늘이 서서히 밝아오기 시작했다. 평소 같았다면 미리 계획을 구상했겠지만, 지금은 시간이 부족했다. 일단 그 개구멍을 찾아 내부로 잠입할 생각이었다. 요행히 들키지 않으면 좋겠으나 아니더라도 상관없었다. 목숨을 버릴 각오라면 두려울 것이 없었다.
‘이쯤 어디일 텐데.’
손으로 더듬더듬 땅을 뒤졌지만 쉽지 않았다. 새벽부터 내린 비가 여전히 부슬부슬 땅을 적시고 있었다. 이미 진흙이 된 바닥은 손가락 마디 하나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단단했다.
‘이럴 수가.’
주위가 조금씩 밝아질수록 운선의 마음은 초조해졌다. 이러다 둘 중 누구의 목숨이라도 잃게 된다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쿵쿵!
이번에는 주먹으로 땅을 찍어눌러 보았다. 공력을 싣자 조금씩 흙덩이가 들리기는 했으나 중간중간에 박힌 돌멩이 때문에 살이 찢어지고 피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던 조상원의 부탁을 어찌 그리 쉽게 잊었단 말인가? 땀인지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이 뒤섞여 움푹 파인 바닥에 떨어지니, 어느새 작은 웅덩이가 되었다.
“되었다.”
그때,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피가 철철 흐르는 운선의 주먹을 감싸 쥐었다. 곧이어 정수리로 줄곧 떨어지던 빗줄기도 뚝 그쳤다.
“운선아, 이러다 네가 다친다.”
“아아…….”
자신을 감싸 안은 이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운선은 참았던 울음을 왈칵 터뜨렸다. 이제 그가 곁에 있으니 다 괜찮을 것만 같았다.
“대사형, 죄송합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되었다.”
서문은 흐느끼는 운선의 어깨를 감싸 안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 역시 운선이 돌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로받고 있었다.
*** 양호유환(養虎遺患):
호랑이를 길러 근심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