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亡羊補牢(망양보뢰)
한밤중이 되어도 운선은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살 것이 많겠거니 했고, 날이 어둑해졌을 때는 길을 잃었겠거니 생각했다.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반드시 돌아오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묘시를 알리는 타종이 울렸을 때, 드디어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아직 동이 터오기도 전이었다. 주운은 미친 여자처럼 산발이 되어 무작정 길거리로 나왔다. 골목에는 이른 하루를 준비하는 몇몇 상인들밖에 없었다. 한참을 휘젓고 다니니 어디선가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퍽 안 되었다며 속닥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버림받지 않았다.’
속으로 수천 번 되뇌었으나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어느덧 추적추적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꼬질꼬질한 겨울옷에 비까지 맞으니 그야말로 거지꼴이 따로 없었다.
“이봐요, 괜찮은 거요?”
누군가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주운은 멀뚱히 돌아보았다. 정수리에서부터 주르륵 물줄기가 타고 내려왔다. 빗물인지 눈물인지도 구별할 수 없었다.
“에구, 젊은 처자가 어쩌면 좋아?”
마음씨 좋은 행인은 손수건을 꺼내 주운의 꾀죄죄한 얼굴을 닦아주었다. 분명 우산을 받쳐주고 있건만, 얼굴에서는 연신 굵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버려졌구나.’
드디어 인정하는 순간, 주운은 그 자리에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여러 명의 외침이 점점 멀어져 갔다.
보름이 넘도록 쓸고 닦았건만, 용문파의 마당에는 여전히 붉은 얼룩이 가득했다. 새벽 청소를 마친 서용은 이마에 송송 맺힌 땀방울을 소매로 닦아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끔찍하던 그날 밤, 장은을 위시한 오대산검의 고수들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나 생각하니 온몸이 소름이 쪽 돋았다.
“그나마 우리는 운이 좋았지. 팔대 제자 위쪽은 대부분 죽거나 크게 다쳤으니 말이야.”
매번 잔소리만 퍼부었던 사형은 그 일 이후로 부쩍 사제들에게 친절해졌다. 본인 말로는 부동명왕(不動明王)을 대면하고 나니 깨우친 바가 있다고 하였다.
“장문주께서 적 뭐시기를 한 손으로 제압했다지? 뿐인가? 난다긴다하는 이서문도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지 않았는가?”
일은 막내인 서용이 혼자 다 하고 다른 사형들은 내내 수다 삼매경이었다. 마치 겪은 일인 양 침을 튀기면서 말하는 꼴이 퍽 우스꽝스러웠다.
“소백화가 그리 아름답다 하더니만, 소문주님에 비할 바가 못 되더군. 우아한 자태로 태을신교 놈들을 제압하는 모습이 장관이었다지.”
“백의행 대협은 또 어떻고요? 옥골선풍에 뛰어난 실력까지 겸비했으니,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겠더군요.”
귀를 쫑긋 세우고 사형들의 수다를 듣던 서용은 영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오대산검의 문주들은 분명 용문파를 도우러 왔다 했고, 실제로 태을신교를 손쉽게 제압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호흡이 거칠지 않았고 처참한 전장의 모습에도 놀라지 않았다.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미리 알았던 것처럼 대비했다면 어째서 용문파의 팔 할 이상이 무너지기 전까지 나타나지 않은 겁니까?”
서용이 툭 끼어든 한 마디에 도사들은 모두 움찔하였다. 그러고 보니, 석연치 않은 구석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무렴 부러 그랬을까? 거리도 있고, 서로 연통도 하느라 늦은 것이겠지.”
“그들 모두 함께 도착하지 않았습니까?”
그랬다. 세 문파 중, 어느 곳 하나만이라도 먼저 도착했더라면 수많은 사형제의 목숨을 구했을 것이었다. 서용은 이제 확신이 들었다. 그들은 용문파를 구할 목적이 아니었다.
비슷한 의심을 하는 이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용조현은 죽은 기장로들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남몰래 눈물을 삼켰다. 이들을 직접 해한 이는 이서문이었으나, 살릴 기회를 짓밟은 이는 장은이었다. 삼형제 중에서 가장 말이 없고 소심한 그였지만, 영민함에 서는 제일이었다. 용문파는 황석파의 농간에 놀아난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용문파의 비극에 가장 이득을 본 이들은 황석파였다. 장은은 마치 오대산검의 맹주라도 된 양, 계정 근방에 있는 문파들을 모두 불러모아 몇 날 며칠 회의를 주관하였다. 그러나 태봉으로 떠난 토벌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었다. 내내 그를 의심하고 있던 용조현은 결국,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냈다.
“태봉에서는 소식이 있습니까?”
“글쎄요, 아직.”
걱정과 근심이 가득한 용조현과 달리 장은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어쩐지 그의 관심은 온통 태을신교의 포로들에게만 쏠린 것 같았다.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조현은 한층 더 흥분한 목소리로 몰아붙였다.
“달포가 넘도록 형님은 소식이 없고, 그 사이에 태을신교가 기습을 감행하였습니다. 애초에 빈집을 노리고 왔다는 건데, 결국 토벌대는 미끼였다는 뜻이 아닙니까?”
“용대협, 저라고 걱정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 토벌대에는 황석파의 부문주인 고사숙이 계십니다. 본파의 기둥이신 그분에게 혹여 큰 사고가 나지 않았을까, 요즘은 잠도 못 이룹니다. 뿐입니까? 친아우와 같은 풍림도 여태 소식이 없으니 제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장은은 처량 맞은 목소리를 내며 연신 눈을 깜빡였다. 그 모습을 보는 소소정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그의 진심을 몰랐다면 아마도 깜빡 속았겠지 싶으니, 온몸에 소름이 쪽 돋았다.
“그럼 고문을 하든, 구조대를 보내 그들의 행방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그러나 오대산검에게는 숙원이 있지요. 이제 곧 그 대의를 이루기 직전입니다. 교주 성곤을 붙잡는 일이 더 먼저인 것은 용대협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 후에 형제들을 구하는 것이 순서에 맞습니다. 혹여 최악의 상황이 오더라도 그들의 희생이 절대로 퇴색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장문주!”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던 용조현이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온화한 성격의 그로서는 오십여 년을 살면서 처음 질러본 고함이었다.
“용대협, 부디 진정하십시오. 저 또한 사문의 귀한 인재들을 보낸 터라 같은 마음입니다. 장문주께서 말은 저렇게 하셨으나 곧 구조하러 갈 계획이니 심려 마십시오. 또한, 용문주님의 실력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리 쉽게 당할 분이 아니니 믿고 기다려 봅시다.”
보다 못한 소소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당장이라도 장은의 멱살을 잡아 흔들 것 같은 용조현을 말렸다. 흥분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누차 설득한 후에야 열띤 분위기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허면, 이제 어쩌실 생각입니까?”
내들 심드렁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백형진의 물음이었다. 그는 스승의 명으로 오긴 했으나 장은이 하는 짓거리가 못마땅하여 도저히 웃는 낯으로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두 놈 다 효수하여 경국 백성의 마음속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그럼요.”
모두가 한마음으로 대답하자 장은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웃음이 가득 지어졌다. 하나부터 열까지 그의 계획대로 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가장 난감했던 두타공파까지도 선뜻 형진을 보내 뜻을 같이하니, 모든 일이 다 순조로웠다.
‘이제 경전의 비밀만 알아내면 되건만.’
무려 보름을 고문했음에도 현진은 입을 열지 않았다. 철저히 함구하는 것을 보니 분명 대단한 비밀이 있음이 확실했다. 한때는 소문처럼 경전이 그저 절세고수를 만들어주는 비급이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운선이 순순히 내어주었을 때, 문득 위화감이 들었다.
‘무공 비급이 아니다. 이면에 뭔가가 있다.’
다른 누군가가 눈치채기 전에 반드시 알아내야 했다. 그것이 금황자의 사람이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었다. 이 시험을 통과하면 그야말로 황석파는 경국을 주름잡는 최고의 문파가 될 수 있었다. 또한, 자신은 무림 맹주, 아니 그 이상의 부와 명예를 얻게 될 터였다. 장은은 그저 상상만으로도 명치 끝이 간질간질해졌다.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용조현의 눈가에는 잔주름이 가득했다. 고작 한 달 사이에 두 형님을 다 잃고, 문파도 요절이 났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심지어 대책을 논의할 기숙부님들도 곁에 없어 외롭고 막막하기만 했다.
“용숙부님.”
“무슨 일인가?”
며칠째, 거리를 두는 것 같던 백형진이 웬일인지 은밀히 말을 붙여왔다. 용조현은 더럭 의심부터 들었다. 오대산검 중 가장 친밀히 지냈던 두타공파였건만, 여태 모른 체하고 도와주지 않았기에 화가 나기도 했다.
“저를 비롯하여 본파에 서운하신 마음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디 내치지 마시고 그간의 정을 생각하여 말씀 좀 들어주십시오.”
예의를 다하는 형진의 태도에는 어딘지 모르게 진심이 느껴졌다. 서운한 감정만으로 무시하기에는 아쉬운 쪽은 자신이었다. 조현은 괜히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형진을 마주했다.
“말해보게.”
“스승님께서는 절대로 귀파의 일에 무심한 것이 아닙니다. 용문주님께서 직접 찾아오셨을 때, 차마 확신이 없어 말씀하지 못하신 게 있었습니다. 차차 증거를 확보하여 보여드릴 예정이었는데 그 사이 장문주의 서찰이 도착한 것입니다.”
형진은 누가 들을까 저어하여 최대한 속삭이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애초에 용송현의 죽음에 의문이 많았다는 것, 이서문을 옹호할 생각은 없으나 범인으로 볼 수 없는 근거, 그리고 토벌대가 사실은 미끼에 불과하다는 것까지.
“이게 다 사실이라면 심각한 상황이 아니오? 어서 조맹주님을 만나 뵙고 의논해야겠소.”
조현은 드디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장은이라면, 큰형님의 목숨은 풍전등화와 다름없었다. 문파를 재건하고 장문을 구하려면, 우선 장은에게 죄를 물어야 했다.
“곧 계정으로 사부님이 오실 예정입니다. 두타공파는 언제나 용문파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드릴 겁니다.”
두 사람은 굳건히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러나 그들 각자의 머릿속에는 다른 욕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편, 뒤뜰에서 서성이는 소소정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 장은의 음모를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기에 그의 다음 행보 역시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
‘태을신교를 멸하기 위해서라면 토벌대쯤은 쉬이 포기할 것이다.’
물론 장은은 제자들의 목숨만큼은 절대로 담보로 잡지 않겠다고 단단히 약속했다. 무리에 정은률이 있으니 영 거짓은 아니라는 확신도 들었다. 그러나 용문파가 멸문 직전까지 갔던 그 날, 그에 대한 모든 신뢰는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오대산검의 지원대는 이서문이 나타나기도 전에 이미 용문산에 도착했다. 길목을 막던 현진은 그보다도 한 시진 전에 제압한 터였다. 그런데도 장은은 용문파가 무너지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용문산의 수호신이라고 불리던 기장로들이 절명하는 순간에는 살짝 웃는 것도 같았다.
‘언젠가는 선운검파까지 잡아먹으려 하겠지.’
그렇다면 이리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다른 활로를 뚫어놓아야 선운검파에도 미래가 있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소소정은 드디어 결심을 굳혔다. 이 되바라진 계획을 은밀히 성공시킬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사부님, 부르셨습니까?”
가은을 바라보는 소소정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저 순진무구한 얼굴이라면 세상에 설득하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뿐인가? 거짓말에 능수능란하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가리는 것이 없으니 그 어떤 이보다도 이 일에 적역이었다.
“가은아, 네게 긴히 부탁할 일이 있단다.”
“네. 말씀만 하십시오.”
어떻게든 스승의 눈에 들기 위해 애를 쓰던 가은에게는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였다. 게다가 평소와 달리 다정함이 뚝뚝 묻어나는 소정의 태도에 충성심이 절로 솟아났다.
“나 대신 소백화 현진을 만나고 와야겠다.”
“네?”
가은은 자신이 너무 긴장하여 헛소리를 들었나 싶었다. 하여, 순진한 두 눈을 끔뻑끔뻑하며 스승의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이 서신을 전해주고 대답을 들어오면 된다.”
“네, 네.”
일단 대답은 하고 보았지만 의아할 뿐이었다. 분명 중요한 일인 듯한데 일개 말단 제자에게 맡기니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게다가 무공이라고는 구결 조금 외운 게 전부인데, 흉악한 마두들을 만나야 한다니 겁이 덜컥 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소정은 허리를 굽혀 상대의 작은 키에 몸을 맞췄다. 귀엣말로 한참을 뭐라 속삭였는데, 듣고 있는 가은의 낯빛이 점차 새파래졌다.
“알아들었느냐?”
“네? 아, 네.”
수차례 다짐을 받은 후에야 스승은 가은을 돌려보냈다. 무릇 걱정이 되기는 했으나 이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으니 부디 잘 해내기를 바랄 뿐이었다.
만족스러운 소정과 달리 처소로 돌아가는 가은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아직도 귓가에는 스승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남아있었다. 그것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죄책감을 잘 느끼지 못하는 가은에게도 어렵고 두려운 임무였다.
“잘 해낼 수 있을까?”
의기소침해하는 가은의 머리 위로 궂은비가 추적추적 쏟아지고 있었다.
*** 망양보뢰(亡羊補牢):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