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94화 (94/209)

#94화. 逐鷄望籬(축계망리)

고수들이 빠져나간 용문파는 예상했던 대로 허술했다. 항렬이 낮은 도사들은 불시에 들이닥친 기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다만 여덟 장로가 지키는 혜윤당 안채만이 난공불락(難攻不落)이었다.

“이서문 이놈!”

험악한 얼굴로 서문을 맞이한 네 명의 원로는 기용, 기삼, 기출, 기봉이었다. 그들은 평생을 갈고 닦은 비기 소요진을 만들어 이서문을 사방으로 조여왔다. 두 명은 검, 두 명은 기다란 채찍을 휘두르니 좀처럼 자세를 바로잡을 여유가 없었다. 특히 서문의 무공은 근접전에 유리했으므로 채찍이 만들어내는 방어벽을 뚫기가 쉽지 않았다.

“역시 용문파의 무공은 심오하군요.”

서문은 진심으로 상대의 실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묵안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문파의 무학(武學)이 무엇인지 금세 수긍이 갔다. 그러나 감상이 그러할 뿐, 목적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태일오수(太一悟修)”

부채를 품속에 넣은 서문은 양손을 모아 태일장을 출수했다. 그는 오직 정 남쪽에 서 있는 기용을 노렸으나 뜨거운 기운이 순식간에 몰아닥치자 네 명 모두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휘익!

기용이 소매를 휘둘러 안면의 열기를 걷어내자 잘생긴 적의 얼굴이 코앞에 떡 하니 나타났다. 그 음흉한 미소를 보고 있자니 역정이 버럭 났다.

“너, 너…….”

서문은 너무 놀라, 말까지 더듬는 노인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생사를 걸고 싸우는 격전 중에 인정을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퍽!

서문의 부채가 상대의 단전 아래를 정확히 강타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으나 급소가 파열되었으니 보나 마나 절명이었다. 기용은 그대로 쓰러져 다시는 일어날 줄을 몰랐다.

“사제!”

“사형!”

남은 세 사람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무작위로 병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휘몰아치는 채찍과 검기 사이에서 서문은 나비가 된 마냥 요리조리 몸을 피했다.

“쯧쯧, 소요진의 멋은 고요함인데 저리 흥분하였으니 다 글렀구나.”

감정이 가득 담긴 초식은 허점투성이였다. 채찍의 방어와 검기의 공격이 균형을 이뤄야 했지만, 온통 공격 일변이니 세 사람의 급소가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아쉽다.”

서문은 입맛을 쩝쩝 다시더니, 왼쪽에 있는 기봉을 향해 팔을 쭉 펼쳤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한 자루의 뾰족한 판관필이었다. 빠르고 정확도가 높았기에 주로 암습을 할 때 사용하는 무기였다.

“서쪽.”

다음 공격 방향이 확실해지자 모두의 시선이 일시에 한쪽으로 쏠렸다. 또다시 형제를 잃을까 저어한 다른 두 명이 기봉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진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서문의 노림수였다. 그는 뻗은 팔을 다시 당겨 모으더니 준비 동작도 없이 바로 장력을 출수했다.

“태일천하!”

태일장 중에서도 반경이 가장 넓은 공격이었다. 그들이 상대의 손바닥을 확인했을 때는 이미 휘몰아치는 장력의 범주 안에 들어온 뒤였다. 뒤늦게 병기를 휘둘러 몸을 보호하려 했으나 어림도 없었다.

“좋은 대결이었습니다.”

지난 사십여 년간 용문산을 지키던 기장로들의 시체 위에서 서문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들의 오랜 위명처럼 쉽지 않은 상대였다. 비록 이기기는 했으나 그의 몸에도 병장기에 찍히고 베인 상처가 수십이었다. 그러나 혜윤당에는 여전히 장로 넷이 남았고, 용조현이 있었다.

“과연 살아나갈 수 있을까?”

깊이 베인 왼쪽 팔뚝을 천으로 묶으며 서문은 쓴웃음을 지었다. 가능성을 타진하며 살아온 인생이 아니었거늘, 새삼 목숨을 걱정하는 얼뜨기처럼 굴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불혹(不惑)을 바라보는 나이건만, 어쩐지 점점 더 미혹(迷惑)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저 지키기 위해 싸울 뿐!”

죽은 이의 복수를 위해, 살아남은 이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동료가 목숨을 내놓았다. 오늘도 그런 날 중에 하루일 뿐, 특별할 것은 없었다. 다시금 서문의 깊은 눈에 살기가 들어찼다.

연기가 가득한 사이로 사형제들의 복수를 다짐하며 뛰어오는 네 명의 노인이 보였다. 저들까지가 딱 그의 몫이었다. 서문은 품속에 넣어둔 부채를 꺼내 자세를 잡았다.

“이서문!”

그때,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그의 이름 석 자를 쩌렁쩌렁하게 불렀다. 친절한 듯, 온화한 듯, 그러나 상대를 향한 조소를 가득 담은 불쾌한 목소리.

“설마……, 장은?”

“이서문, 오랜만이구나.”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서문은 극도의 절망감을 느꼈다. 아니, 그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이는 장은이 아니라 그의 품에 제웅처럼 늘어져 있는 현진이었다.

“아아…….”

서문의 두 눈이 당장이라도 피를 쏟을 것처럼 새빨개졌다. 사람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고 했던가? 무려 이십여 년 만에 마주했건만, 여전히 상대는 비열하고 졸렬했다.

“사매의 목숨을 구하고 싶거든 순순히 잡히는 게 좋을 거다. 뭐, 이만하면 네 이름값은 톡톡히 하지 않았는가?”

혜윤당 마당을 훑어보는 장은의 눈에는 조롱이 가득 담겼다. 자신감에 차오른 어깨를 보니, 이 모든 상황이 그의 설계였음이 분명했다. 서문이 고군분투하는 동안 그는 머리 꼭대기 위에서 편안히 내려다보고 있던 것이었다.

“다 네놈이 꾸민 짓인가?”

“네가 개입한 걸 알았을 때, 이런 상황을 충분히 예상했지. 너는 옛날부터 무모하고 고집이 셌으니까. 모두를 구하겠다 설쳐댈 게 뻔할 테니 머리를 쓸 필요도 없었다.”

서문은 어리석은 자신을 탓했다. 음모의 배후가 장은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겨우 이 정도 얕은수로 형제들을 지키려 했다니.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바위에 머리를 처박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적우는 어디 있느냐? 그 아이는 살아있는가?”

“오오, 여전히 너희들은 우애가 깊구나. 소백화도 자결은 할지언정 대사형의 짐이 되고 싶지는 않다더니. 정말 눈물이 다 날 지경이네.”

장은이 호들갑을 떨며 소매를 들더니, 눈물을 닦아내는 시늉을 했다. 그 옆으로 건장한 두 명의 수하가 누군가를 질질 끌고 앞으로 나왔다.

“아아…….”

피투성이가 된 적우의 몰골을 보는 순간, 서문은 절망감에 눈을 감아 버렸다. 이제 그에게는 어떤 대안도 없었다. 백여 명의 교도와 사랑하는 아우 둘의 처참한 죽음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이제 좀 주제 파악이 되었나? 그럼 순순히 오라를 받으렴.”

이제 다 끝났다 싶은 마음에 장은은 등을 돌렸다. 현진이 자기 손에 떨어진 이상 서문을 옭아매는 일은 식은 죽 먹기와 다름없었다. 모처럼 계획대로 일이 성사되자 자만하게 된 것도 사실이었다.

푹!

“억!”

서문을 묶기 위해 뛰쳐 가던 제자 둘의 몸이 단번에 반 토막이 났다. 완전히 제압했다 생각한 적우가 갑자기 행덕을 휘두르며 칼춤을 추자 황석파의 제자들은 어쩔 줄 모르고 뒤로 물러났다.

“형님! 가십시오!”

서문을 향한 적우의 처절한 외침이었다. 곧이어 연막이 터지고 거친 울부짖음이 마당 안을 가득 메웠다. 부상당한 아우가 벌어줄 수 있는 시간은 고작 일각도 되지 않았다. 미안함도 죄책감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서문은 뿌연 연기를 방패 삼아 부리나케 몸을 날렸다. 앞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찌르고 베면서 무작정 달려 나갔다. 연기에 휩싸인 세상은 온통 뿌옇게만 보였다.

구월산에도 겨울의 끝이 왔지만, 추위는 여전했다. 신혼부부가 살림을 차리기에 적합하지 않은 환경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었다.

“우리도 언젠가는 아이를 낳을 텐데 따뜻한 곳으로 가는 게 좋지 않겠니?”

“맞아요. 어차피 사숙님도 구월산에 계시는 날이 많지 않으니 여기를 고집할 필요는 없지요.”

사랑하는 주운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운선이 다정하게 대답했다. 혼례만 치르지 않았지, 두 사람의 마음은 이미 부부와 같았다. 남은 일은 세상과 단절된 조용한 곳에 터를 잡아 평화로운 삶을 사는 것뿐이었다.

“운선아, 혹 강가장은 어떠니? 네가 살던 곳이라 익숙하고 여기보다는 지내기가 편하지 않겠니? 너만 괜찮다면 나는 상관없단다.”

“하지만.”

주운의 배려는 고마웠으나 막상 그곳에 돌아가려 하니 썩 내키지는 않았다. 스승님과 사형의 시신 앞에서 행복하게 지낼 자신이 없었다.

“아니요. 우리 연반으로 가죠. 그곳은 워낙 시골이라 사람도 적고 강호 사람들도 거의 오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래. 그러자꾸나.”

운선의 의중을 바로 눈치챈 주운은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혹여 자신이 그의 역린을 건드린 것은 아닐까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사실 주운의 불안함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때때로 사랑하는 정인이 먼 곳을 보며 쓸쓸한 낯빛을 할 때면 더럭 겁이 났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영영 헤어질 것만 같았다.

“연반으로 가려면 계정을 지나야 합니다. 그곳은 워낙 번화하여 혹여 누가 알아볼 수도 있습니다. 단단히 주의해야겠어요.”

두 사람이 구월산에서 내려온 것은 그로부터 사흘 뒤였다. 행장은 꾸릴 것도 없이 간편했으나 얼굴을 가리는 데에는 최선을 다했다. 되도록 작고 조용한 객잔을 찾았지만, 그조차도 쉽지 않았다. 계정은 큰 고을답게 번잡하고 시끄러웠다. 객잔마다 사람이 가득했으며 커다란 병기를 과시하는 강호인들도 시시때때로 만날 수 있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두 사람은 점점 더 얼굴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한 사람만 돌아다니는 게 낫겠습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제가 필요한 것들을 사 올게요.”

“알겠다. 조심하렴.”

운선은 골목 끝에 있는 허름한 객잔에 주운을 남겨 두고 장터로 나섰다. 우선 포목점부터 찾아야 했다. 반년 넘게 산에서 보냈기에 옷도 신발도 계절에 전혀 맞지 않았다. 안 그래도 얼굴을 가려야 하는데 두꺼운 천으로 두르고 있으려니 사람들 눈에 더 띄는 것 같았다.

“우리 주운이 좋아하는 약과도 사 가야겠다.”

처음에는 어색했으나 거리를 돌아다닐수록 마음이 붕 뜨고 흥분되었다. 주운과 호젓하게 사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이런 나들이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기억을 더듬어 골목길을 돌아드니 한 무리의 강호인들이 모여있는 양이 보였다. 운선은 혹여 안면이 익은 이라도 만날까 봐 고개를 푹 숙이고 지나쳤다.

“이제 신교 놈들은 끝인 거지?”

“교주 검귀는 행방이 묘연하고 적우와 소백화가 잡혔으니 말해 뭐하겠는가? 조만간 용문파 현문에 효수한다고 하더군.”

운선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서고 말았다. 지금 무엇을 들은 것인가? 손발에 땀이 차올라 금세 축축해졌다.

“이서문은 도망갔다지?”

“신교 놈들에게 무슨 의리가 있겠나? 제 목숨 하나 건지겠다고 아우들을 버린 게지.”

두 사내는 입에 담지 못할 욕을 뱉으며 운선의 곁을 지나쳤다. 낮부터 거나하게 술을 걸쳤는지 입에서는 썩은 내가 진동했다.

“이보시오.”

“뭐요?”

운선은 앞선 사내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웠다. 자신의 실력에 꽤 자신이 있던 그는 웬 초라한 행색의 젊은이가 건방지게 말을 걸자 비위가 팍 상했다. 여차하면 선공을 할 생각으로 험상궂게 노려보았다.

“다시 말해 보시오.”

“뭘 말이오?”

“마교가 어쩌고 이서문이 어쩌고 하지 않았소? 다시 처음부터 말해보시오.”

사내는 기가 막혀 콧방귀를 크게 뀌었다. 아무리 시골 촌뜨기라 몰랐다 하더라도 장유유서가 있거늘, 새파랗게 어린놈이 한참 어른에게 반(半) 하대를 하니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버르장머리를 고쳐놔야겠다는 생각으로 상대의 멱살을 잡아챘다.

“앗!”

그러나 멱살이 잡힌 쪽은 도리어 사내였다. 야리야리한 청년의 손이 목을 바짝 움켜쥐자 금세 가슴이 답답해졌다. 곧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허허, 오해가 있나 본데 나랑 얘기합시다.”

처음에는 팔짱을 끼고 히죽거리던 그의 일행은 그제야 허둥지둥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죽기 살기로 운선의 손을 내리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친우의 목숨이 단박에 끊어질 터였다.

“이보시오, 일단 놓고 얘기합시다.”

“그럼 방금 한 얘기를 다시 해보시오. 처음부터 끝까지!”

운선의 손이 조금 느슨해지는 것을 확인한 사내는 잔뜩 겁을 먹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보름 전, 태을신교가 용문파를 기습하지 않았습니까? 들은 바로는 적우와 소백화가 잡혔고, 이서문이 도망쳤다고 합니다. 황석파의 장문인이 그들을 죽여 용문파 현문 위에 효수한다 공언했다지요. 우리도 그저 들은 것이니 그만.”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운선은 잡고 있던 사내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두 사내가 허겁지겁 도망치는데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지난 반년간, 배은망덕한 이놈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던 것인가? 꽉 쥔 주먹 사이로 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 축계망리(逐鷄望籬):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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