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瓮中之鳖(옹중지별)
현문 앞에 모여앉은 어린 도사들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해가 지도록 막내가 돌아오지 않으니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이제 곧 저녁 훈련이 있을 텐데 사부님께 들키면 큰 사달이 날 터였다.
“서용 이 녀석, 돌아오기만 해봐라.”
“대사형, 단지 게으름을 피운다기에는 너무 늦지 않습니까? 혹 무슨 일이라도.”
“하긴, 서용이 좀 멍청하긴 해도 부지런한 아이가 아닙니까?”
어쩐지 이야기를 나눌수록 심란해졌다. 결국, 도사들은 더 큰 문제가 생기기 전에 직접 찾으러 가보기로 중지를 모았다. 다 저녁에 고개 하나를 넘을 생각을 하니 짜증이 솟구쳤지만 그래도 꾸중을 듣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어? 저쪽에.”
막 내리막길에 들어섰을 때였다. 일행 중 한 명이 손가락을 들어 언덕 아래를 가리켰다. 어둑어둑하여 형체만 간신히 보였으나 물지게를 지고 있는 양을 보아 서용이 맞는 것 같았다.
“이 녀석! 가만두지 않을 테다!”
대사형이 소매를 걷어 올리더니 당장이라도 엉덩이를 걷어찰 것처럼 발을 동동 굴렀다.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감히 서열이 꼴찌인 막내가 사형들을 엿 먹였으니 아주 혼쭐을 내줄 작정이었다.
“어? 그런데 좀 이상한데요?”
“뭐라고?”
상대가 가까이 올수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인제 보니 몸집도 행동도, 서용과는 사뭇 달랐다. 보통은 무게 때문에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한 채 낑낑거리며 고개를 올라야 정상이건만, 낯선 사내는 축지법이라도 쓰듯 벌써 고개를 다 넘어왔다. 물이 가득 든 물지게를 지고도 나풀나풀 걷는 모양이 언뜻 보아도 내력이 심오한 고수였다.
“이거 큰일 났구나.”
도사들은 재빨리 공격 자세를 취했다. 때가 때이니만큼, 상대는 아군이 아님이 분명했다. 비록 막을 수는 없어도 시간은 끌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들의 생사 이전에 문파의 존망이 걸린 일이었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드디어 검은 인영이 한 장 거리까지 다가왔다. 대사형은 용문파로 올라가는 외길 앞을 버티고 서서 호기롭게 일갈했다. 사문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두려움을 앞서는 순간이었다. 사내는 어린 도사들을 쭉 훑어보더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굳이 알 필요 없고!”
안타깝게도 의지는 실력을 이기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이 낯선 사내를 일각도 붙잡아 둘 실력이 없었다. 고수는 내리꽂히는 칼날을 여유롭게 피하더니 어느새 방어선을 뚫고 지나갔다. 어린 도사들 그 누구의 칼날도 상대의 옷자락조차 스치지 못했다.
“그럼 실례!”
사내는 오른손에 든 부채를 쫙 펼쳐 들었다. 그의 얼굴은 알지 못해도 특유의 부채를 모르는 이는 오대산검 제자 중에 아무도 없었다. 맏사형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움과 두려움이 순식간에 번져 나갔다.
“이서문…….”
그의 나직한 외침을 신호로 이번에는 또 다른 거대한 그림자가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딱 벌어진 어깨, 부리부리한 눈, 그리고 반으로 뚝 잘린 커다란 도(刀). 강호인이라면 누구도 평생 만나고 싶지 않다는 악귀, 적우였다.
“사형, 무엇을 머뭇거리는 겁니까?”
적우는 근육으로 터질 것 같은 팔을 들더니 단번에 도사 넷의 풍부혈을 연달아 찍어 눌렀다. 마음 같아서는 눈앞에 거슬리는 것들은 죄다 쓸어버리고 싶었으나 사형의 명 때문에 손속에 인정을 둔 참이었다.
“예상대로 용문파의 정예 인원이 다 빠진 것 같구나. 굳이 어린 도사들까지 죽일 필요는 없으니 용조현과 여덟 장로만 처리하자꾸나.”
“그럽시다.”
적우의 눈은 마치 짐승의 그것처럼 살기가 등등했다. 숙부의 죽음 이후 그는 웃음을 잃어버렸다. 오직 오대산검을, 경국인을 죽여버리는 것만이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다만 이번만큼은 최대한 절제할 생각이었다. 적은 인원으로 단시간에 용문파를 박살 내야 했다. 적어도 오늘은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날이었다.
“현진이 도착하기 전에 용조현을 잡는다.”
계정에는 오대산검과 동맹을 이루는 중소 문파의 수가 상당했다. 혹시나 용이봉에 불이 오르면 그들이 몰려올지도 몰랐다. 하여, 현진은 용문파를 고립시키기 위해 지원군이 올 만한 길목을 막는 중이었다. 늦어지면 그쪽도 위험할 수 있으니 서둘러 일을 끝내야 했다.
서문이 오른손에 든 부채를 접어 수신호를 보내자, 수십의 흑의인이 용문파 담장을 뛰어넘었다. 그들은 미리 훈련한 대로 적우를 따라 오른쪽 고갯길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한 무리가 지나가자마자 이번에는 왼손을 들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또 다른 수십의 흑의인이 담장을 넘어 서문의 앞에 늘어섰다.
“간다.”
달포 전, 그는 오대산검이 정예 토벌대를 선발하여 태봉으로 진격한다는 첩보를 들었다. 그의 작전은 단순했다. 이른바, 성동격서. 갖은 함정이 설치된 본진에 오대산검을 끌어들인 후, 정작 우리는 비어있는 용문파를 친다. 과거 고대산파를 멸문하게 만든 것과 유사한 방식이었다. 비록 식상한 전략이긴 했으나 작금의 상황에서는 가장 승률이 높았다.
“차라리 이곳에서 적을 막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처음 서문이 계획을 털어놓았을 때, 적우도 진건도 쉬이 수긍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태봉은 방어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장소였다. 태을신교의 본진이 태봉에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오대산검이 함부로 진격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뿐인가? 아무리 고수들이라고 해도 수적으로는 그쪽이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이곳에서 지키면 될 일이지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예전이라면 그 말이 맞지.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지난 삼 년간, 태봉은 대피소와 다름없었다. 운평에서 구한 려국인 삼 백, 그리고 피란민이 또한 삼 백이었다. 아무리 요새처럼 견고하여 방어에 적합하다 해도 수백의 민간인을 지키기에는 위험 요소가 많았다. 게다가 교주 성곤과 마진건이 완쾌되지 않은 상황에서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알 수 없었다. 성곤 역시 그 부분을 간과하지 않았다.
“용문파를 치려는 계획이 좀 당겨지긴 했지만, 어차피 한 번은 부딪쳐야 할 일. 이참에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 생각하자꾸나.”
성곤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려국의 궁궐 아래에는 중신들만 아는 지하 공간이 있었다. 무공을 익히지 못한 이들은 모두 그곳으로 피신시킨 후, 지상에는 불을 놓아 혼란을 준다. 또한, 연기에 독을 섞는다면 손쉽게 승기를 잡을 수 있을 터였다. 고수들을 태봉에 묶어두는 동안, 서문을 비롯한 셋은 용문파를 공격하여 오대산검을 혼란에 빠뜨린다. 멸문까지는 아니어도 허리를 꺾어놓는다면 한동안 힘을 쓸 수 없을 것이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서문이 계획한 대로 잘 흘러갔다. 예상대로 용문파는 빈집과 마찬가지였다. 문파의 고수들이 대거 빠져나간 그곳에는 용조현과 장로 여덟을 제외하고는 모두 항렬이 낮은 제자들뿐이었다.
“태일천하(太一天下)”
서문이 손바닥에 내력을 모아 출수하자 그의 주변으로 달려들었던 도사 일곱이 우르르 무너졌다. 왼손의 부채도 바쁘게 움직였는데 동작 한 번에 어김없이 수명의 요혈을 찔러대니 막을 방법이 없었다.
적우 쪽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쾌도를 휘두를 때마다 대나무가 쪼개지듯 길목이 훤히 뚫렸다. 다른 점이라면 되도록 목숨은 살리려 하는 그의 사형과 달리 가차 없이 베고 자른다는 것이었다. 절제하겠다던 애초의 약속은 이미 깨어진 지 오래였다. 반으로 잘린 행덕은 이전보다 훨씬 매정하고 잔인했다.
“신교다! 태을신교가 나타났다!”
뒤늦게 용이봉 꼭대기에 봉화가 올랐고, 곧이어 묵직한 신종이 위급함을 알리는 울음을 길게 뱉어냈다. 마침 석반을 준비하던 십수 명의 시동들은 마귀같이 달려드는 흑의인들을 마주했다. 공포로 이성을 잃은 그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에 바빴다. 동료를 밟고, 뛰어넘으며 오직 목숨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아수라장 속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던 장명등 몇 개가 바닥에 떨어졌다. 늦겨울의 건조한 바람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불씨를 실어 날랐다. 삽시간에 불이 번져 어두운 마당 안을 붉게 물들였다. 번들거리는 불 사이로 수백의 무사들이 뒤엉켜 지옥도가 펼쳐졌다.
“용조현을 찾아라!”
“네!”
서문의 명에 적우의 움직임이 한층 빨라졌다. 정면에서 달려드는 도사 둘의 머리를 겨냥하여 행덕을 휘두르는 한편, 뒤편에서 기회를 노리는 다른 한 명의 명치를 향해 오른발을 뻗었다. 기겁한 도사들이 뒤로 성큼 물러나자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재빨리 왼발을 굴러 공중에 몸을 띄운 다음, 허리를 반으로 접어 한 무리의 도사들 머리 위를 뛰어넘었다.
그 짧은 순간에 적우는 이미 혜윤당 대청에 도달했다. 바로 왼팔을 쭉 뻗으니 양쪽으로 열리는 거대한 박달나무 문이 쩍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용조현!”
벼락같은 호통에 나무문 위에 버티고 있던 기왓장이 와르르 무너졌다. 매캐한 흙먼지 사이로 언뜻언뜻 건장한 사내의 어깨가 드러났다. 사내는 의심할 여지 없이 용가 형제의 막내 정왕 용조현이었다.
쉬익!
기다란 화극(畫戟)이 불시에 적우의 안면을 향해 찔러 들어왔다. 어찌나 잘 벼렸는지 시퍼런 창날에 적우의 이목구비가 선명하게 비쳐 보였다. 아무 감정이 없는 살인귀의 얼굴이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발을 들이느냐?”
“경국의 쥐새끼들은 남의 나라를 통째로 짓밟아 놓은 주제에, 양심이 없구나.”
적우는 덩치와 다르게 빠른 몸놀림으로 조현의 눈앞까지 미끄러지듯 달렸다. 행덕은 반 토막이 났는데도 본래의 크기가 워낙 거대했기에 웬만한 병기의 길이와 다르지 않았다. 하여, 주인의 긴 팔과 더해지니 상대의 턱 밑까지 일순간에 도달했다.
“태일성주(太一星主)”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적우는 방심하지 않았다. 왼손에 내력을 모아 태일장을 출수하니 행덕을 겨우 피해 우측으로 몸을 돌린 조현의 단전을 정확히 강타했다.
퍽!
미처 피할 새가 없던 조현은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하여 단전에 힘을 쑥 빼버렸다. 동시에 등 뒤로 기맥을 뒤트니 오히려 반탄지공이 되어 장력을 반감시켰다.
“퉷!”
조현은 울컥 올라온 어월을 참지 못하고 한 움큼 선혈을 뱉었다. 비록 삼 할도 안 되는 공력을 받은 셈이지만 맨몸으로 받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적우의 실력이 자신보다 한 차원 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깟 실력으로 피비린내를 풍기고 다녔던 것이냐? 가소롭구나.”
그러나 조현은 부러 큰소리로 상대를 조롱했다. 이 정도로 포기하고 무너진다면 용가 형제가 아니었다. 설사 동귀어진할지언정 사문의 위신을 땅에 떨어뜨리고 죽을 수는 없었다.
“소요낙접(逍遙落蝶)”
적우와 한 장 이상 거리를 벌려 놓고는 화극에 팔 할 이상의 공력을 모았다. 용문파의 내공 비기 소요공(逍遙功)이었다. 부드러움은 강함을 이기고, 다정한 온풍은 매서운 폭풍를 녹인다고 했던가? 화극이 소요공을 품자 마치 하늘하늘한 총채처럼 좌우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무슨 요망한 술법인가?”
적우는 사방팔방으로 뻗쳐 들어오는 화극을 피해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러나 귀신같이 따라오며 요혈을 찔러오는 통에 어느새 대청 구석까지 몰리게 되었다. 화극을 막아내는 데 급급해 공격할 여유가 없자, 폭우처럼 초식을 쏟아붓던 적우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현은 은근히 자신감이 붙었다. 무리가 되더라도 더 몰아붙여 무조건 승기를 잡아야 했다. 몸을 사리며 시간을 지체하다가 이서문까지 달라붙으면 더 볼 것도 없이 필패였다.
“소요음보(逍遙吟步)”
내력을 넣는 순간, 화극이 핑그르르 돌았다. 들고 있는 이의 손목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건만, 그것은 마치 팽이처럼 점점 속도를 더했다. 적우는 자신도 모르게 회전하는 창끝에 시선을 뺏기고 말았다. 점점 정신이 몽롱해지고 머리가 아파졌다.
“지금이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조현이 왼손에 힘을 주었다. 바쁘게 회전하던 화극이 방향을 바꾸더니 적우의 팔다리에 깊은 자상을 만들었다. 어찌나 빠른지 통증이 느껴지기도 전에 그의 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개수작!”
적우는 현란한 움직임을 그만 쫓기로 마음먹었다. 하여,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보이지 않으니 현혹될 이유가 없었다. 오직 소리에 의존하여 행덕을 휘두르자 놀랍게도 화극이 찾아가는 급소마다 행덕이 미리 앞질러 가 모조리 막아 내었다.
“이런!”
이렇게 되니 당황한 쪽은 도리어 용조현이었다. 모든 공격이 막히자 자신도 모르게 상대와의 거리를 좁혀 들어갔다. 길고 무거운 화극의 특성상 원거리를 유지하는 게 유리한데도 마치 자석에 끌려가듯 제어할 수 없었다.
“옳지!”
상대가 사정거리에 들어오는 순간, 적우는 감고 있던 눈을 버럭 떴다. 겁에 질린 용조현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미 승부는 결정되었다. 그대로 행덕이 단전에 박히면 조현은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절명할 터였다.
“잘 가라.”
적우의 큰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희열이라기보다 분노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복수의 대상은 너 하나가 아닐 테지만 그중에 네가 있을 테니,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그러나,
“인제 그만두지요.”
“뭐?”
고개를 돌릴 새도 없었다. 이미 날카롭기 그지없는 다섯 개의 손톱이 적우의 목덜미를 파고들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