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一場春夢(일장춘몽)
태봉의 국경은 전쟁의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견고한 성곽은 한쪽이 무너져 내렸으며 성문은 차라리 없는 것이 나을 정도로 처참했다. 성안은 더 가관이었다. 오랜 가뭄 때문인지 연신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무언가 타는 냄새가 진동하여 저절로 코를 막게 되었다.
“어째서 이곳은 여전히 이 지경입니까?”
제자의 물음에 용가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아직도 아버지를 따라 태봉에 입성했던 그 날의 기억이 생생했다. 무역과 경제의 중심지, 화려한 복색과 우아하고 멋스러운 건축. 아무리 경국의 영토가 몇 곱절이 넓어도 감히 우러러볼 수밖에 없던 려국이었다.
“그러게 말이다. 한바탕 봄날의 꿈과 같구나.”
려국이 멸망한 지도 벌써 이십여 년이 흘렀다. 그동안 경국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려국을 점령했다. 왕실이 있던 이곳 태봉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큰 고을에는 경국의 심사관이 파견되었고, 수많은 세족이 이주하였다. 으리으리한 관저의 관리들과 시장의 점포를 가진 거상들은 모두 경국인이었다.
나라를 빼앗긴 려국인들은 각자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했다. 시류에 빠르게 편승한 소수는 나름의 수완으로 부귀를 누리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최하층민이 되어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나라를 잃은 이들에게는 온갖 굴욕과 불평등이 주어졌다. 천서국의 노예로 가는 일도 그중에 하나였다.
“려국인들은 저항했고, 그 결과 죽음이었다. 그래도 기어이 복종하지 못한 이들은 도망쳐 사라졌지. 태봉은 도망친 이들이 숨어들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였다. 그곳에 태을신교가 있었으니까.”
“그럼…….”
“그래, 태봉만이 경국의 땅이 될 수 없었던 이유다.”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은률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그깟 핏줄 따위에 목숨을 거는 일이 얼마나 병신같은 짓인지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여, 태을신교에 대한 분노는 도저히 사그라지지 않았다.
‘헛된 희망을 주며 사기나 치는 버러지들. 이번에야말로 교주 성곤의 목을 떼서 온 천하에 효수하고 말리라. 봐라, 이것이 힘의 논리에 굴복하지 않은 대가다.’
비월검을 쥔 그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이제 지척에 검귀가 숨 쉬고 있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이 고을 하나가 다 마교의 본진과 같습니다. 어느 방향에서 적이 튀어나올지 모르니 부디 조심하십시오.”
드디어 마을 안쪽에 진입하자 용가현이 단단히 주의를 시켰다. 안 그래도 오대산검 제자들 모두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태을신교가 왜 마교겠는가? 어떤 비겁한 수를 써 함정에 빠뜨릴지 누가 알겠는가? 워낙에 조심하다 보니 고작 장터 골목을 지나는데도 두 식경이 족히 걸렸다.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움직일수록 피로가 곱절로 쌓이는 기분이었다.
“이러다가는 금세 날이 어두워지겠습니다. 차라리 제가 나서 곳곳을 둘러보겠습니다.”
성질이 급한 은률이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섰다. 반나절 전부터 허리가 뻐근했던 고유생은 이때다 싶어 말을 보탰다.
“그럽시다. 용문주. 풍림이 이래 봬도 검과 보법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물이 아니겠소? 먼저 정찰을 한 연후에 움직이면 더 안전할 게 아니오? 정 미덥지 않으면 선발대로 서너 명을 차출하는 것도 방법이고.”
“아, 그래도 그건…….”
가현은 선뜻 결정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사실 그는 아까부터 불길한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수 장 밖에서부터 은은히 나던 향냄새가 장터를 벗어날수록 점점 짙어지자 어느덧 확신이 들었다. 분명히 이 근처에 매복이 있다.
“용문주님, 그럼 허락하신 거로 알고…….”
“잠깐! 기다리시오.”
쉬익!
용가현의 우유부단한 태도에 짜증이 난 은률이 기어코 무리를 이탈하려는 순간이었다. 바람을 날카롭게 가르는 세전(細箭) 하나가 용문파 제자 한 명의 목덜미를 꿰뚫고 지나갔다. 어찌나 정확한 조준이었는지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누구냐?”
가장 빠르게 반응한 것은 선운검파였다. 일곱의 제자가 동그란 원을 만들며 무리의 사방을 엄호했다. 기습을 막기에는 최선이었다.
쉬익, 쉬익, 쉬익!
아니나 다를까, 곧이어 수십 개의 화살이 희뿌연 연기 사이로 쏟아졌다. 개수도 많은 데다 시야가 막혀 있으니 방어하기 쉽지 않았다. 다행히 테두리에서 고군분투하는 선운검파 덕분에 다른 고수들 역시 공격 태세를 빠르게 갖추었다. 몇몇은 화살에 맞기도 하였으나 그 이상 죽은 사람은 없었다.
“흥! 강구 새끼들이 따로 없구나!”
시위를 재는 틈을 엿보던 은률이 무리의 밖으로 호기롭게 뛰쳐나갔다. 연기가 자욱했으나 날아오는 방향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화살이 다 떨어지기를 기다려도 되었건만, 그의 성질머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경공을 사용해 몸을 날리니, 단번에 수 장을 뛰어넘었다. 목표한 언덕 위까지 올라오는 데는 그 어떤 장애물도 없었다. 은률은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과연 위치를 바꾸니 연기 속에서도 적의 움직임이 훤히 보였다.
“감히!”
궁수의 수를 세어보던 그는 퍽 자존심이 상했다. 고작 열 명을 데리고 오대산검의 고수들을 상대하려 하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모양이었다. 망설일 것도 없이 곧장 뛰어가 일 장을 날렸다. 뒤늦게 눈치챈 궁수들은 서둘러 공격 대상을 바꿨으나 소용이 없었다. 고작 한 합도 버티지 못하고 교도 열 명이 처참하게 찢겨나갔다.
“역시 풍림의 실력은 명불허전이오.”
용가현은 부러 야단스럽게 상대를 치켜세웠다. 그의 독단적인 행동이 거슬렸지만 그래도 이쯤에서 마무리되었으니 다행이다 싶었다. 사망자 한 명을 제외하고는 치명상을 입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곳을 지키는 꼴을 보니, 우리가 바르게 찾아왔나 봅니다.”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그들의 앞에는 오직 곧은 한길만이 펼쳐져 있었으므로 이대로 진입하면 태을신교 본진에 도착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궁수를 배치했으나 그 수가 적고 방비도 허술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습을 눈치채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대로 쭉 밀고 들어가는 게 훨씬 효율적일지도.’
괜히 머리를 쓴답시고 머뭇거리다가 되레 방어할 시간을 벌어주거나 역전을 당할 수도 있었다. 기습은 그야말로 기습. 가현은 대강 전열을 가다듬은 후에 곧바로 마을 진입을 강행했다. 들어갈수록 연기는 옅어졌으나 냄새는 더 짙어졌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속이 매스꺼웠다.
“저기!”
앞서가던 선운검파의 기정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니 희뿌연 안개 사이로 으리으리한 전각이 드러났다. 예상대로 태을신교의 본진은 옛 려국의 궁궐이었다. 반쯤 무너진 벽과 군데군데 파손된 건축물들은 망한 나라의 한을 잔뜩 머금고 을씨년스럽게 서 있었다.
“그런데 왜 아무도 지키는 사람이 없을까요?”
기정이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흡사 폐가와 같은 곳에 인기척조차 없으니 문득 함정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러나 용가현의 생각은 달랐다. 아무리 망국일지언정, 궁궐터를 그리 함부로 쓸 리가 없었다. 심지어 려국 재건을 기조로 삼고 있는 태을신교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일단 들어가 봅시다. 각 문파의 방어진을 구축한다면 기습에 대비할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시금 은률의 인영이 무리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는 아까부터 용가현이 설쳐대는 꼴이 마뜩잖았다. 한 문파의 장문이라는 자가 통솔력은커녕 배짱도 없는 것 같아 한심하게만 보였다. 이럴 바에는 혼자 움직이는 편이 더 낫겠다 싶었다.
“제가 정찰을 해보겠습니다.”
“정대협!”
가현이 뒤늦게 손을 뻗어 만류했으나 이미 은률의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황망한 표정으로 고유생을 돌아보자, 그 역시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릴 뿐이었다. 장은이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저 망나니를 제어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성곤! 내 누구보다 먼저 너를 찾아내 그 거만한 목을 비틀어 버릴 테다.’
은률은 발을 구르는 동시에 몸을 날려 거대한 담장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대충 보아도 궁 안의 지리가 퍽 복잡하였다. 규모가 크지 않은 대신 샛길이 많아 잘못 움직였다가는 길을 잃기에 십상이었다. 하여, 성질 급한 은률도 섣불리 땅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한참 동안 주위를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저기다!”
유달리 희뿌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전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무슨 꿍꿍이인 줄은 모르겠으나 이 정도 연기를 피우려면 반드시 누군가가 지키고 있어야 할 터, 그놈을 사로잡아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은률은 무려 스무 걸음 만에 세 개의 전각을 뛰어넘었다. 그리고 지붕에 발이 막 닿기도 전에 전각 안으로 미끄러지듯 몸을 넣었다.
“어?”
그러나 그곳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림이 펼쳐져 있었다. 불을 피우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고, 거대한 풀무를 연신 눌러대는 요사한 모양의 수레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밀폐된 공간에 가득 찬 연기는 순식간에 침입자를 집어삼켰다. 그렇게 이를 부득부득 갈았건만, 한순간의 방심으로 그의 계획은 다 엉망이 되었다. 아찔한 연기 속에서 의식을 잃어가면서도 은률은 찰진 욕설을 잊지 않았다.
“빌어먹을!”
눈꽃을 가지에서 막 떨쳐내고 곧 다가올 봄을 준비하는 용문산은 절로 감탄이 나오는 절경이었다. 아직 얼굴이 앳된 도사 한 명이 물지게를 지고 고개를 넘나드는 모습조차 그림의 한 장면 같았다.
“왜 하필 나만 괴롭히는지 모르겠구나.”
지게가 휘어질 정도로 물동이를 양쪽에 매고 나니 서용은 새삼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용문파에 들어온 지도 벌써 삼 년이 넘어가는데 여전히 잡일이나 하고 있으니 여간 서운하지 않았다. 언제쯤 문파의 절기를 배울 수 있을지 그저 요원하기만 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돈도 없고 연줄도 없으니 그저 밑바닥부터 시작할 수밖에.”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는 그의 어깨 위로 연분홍빛 꽃잎이 하늘하늘 떨어졌다. 아직 꽃이 필 계절이 아니건만, 아무리 보아도 앵화가 틀림없었다. 서용은 뭐에 홀린 것처럼 그 꽃잎의 출처를 따라 무심코 나무 위를 올려다보았다.
“도사님, 죄송한데 물 한 바가지만 얻어 마실 수 있겠습니까?”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사내가 앵화나무 가지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어린 도사는 기겁을 먹고 뒤로 자빠졌다. 물지게가 함께 나뒹구는 바람에 애써 길었던 물이 바닥에 전부 쏟아졌다.
“어이쿠, 저런. 조심하셔야지요.”
한참 만에 정신을 가다듬은 서용은 다시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손으로 꺾으면 툭 부러질 정도로 얇디얇은 가지건만, 사내는 세상 편한 자세로 누워 부채질까지 하고 있었다.
“역시 용문산의 풍경은 정갈하고 단정하군요. 아니 그렇습니까?”
그는 비록 무공을 익히지 못했으나 눈치가 빠르고 영민했다. 하여 단번에 상대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선재께서는 어인 일로 본파를 방문하셨습니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존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아, 그리 정중히 나오시면 참으로 곤란합니다.”
사내는 진심으로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곧 나무에서 몸을 일으키니, 사뿐히 내려앉는 모습이 마치 한 마리 나비와 같았다.
“도사님, 이 모든 것이 도사님의 성덕입니다.”
“네?”
서용은 상대가 한 말의 의중을 파악하기도 전에 그 자리에 그대로 혼절하였다. 차라리 무공을 전혀 모르는 편이 그에게는 천운이었다. 사내는 천천히 부채를 흔들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 한잠 푹 주무시고 나면 이 또한 한바탕 꿈일 것입니다.”
부채가 앞뒤로 살랑거릴 때마다 부채에 그려진 물줄기와 산맥이 마치 살아있는 듯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