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有用無愧(유용무괴)
운선이 구월산에 온 지도 벌써 석 달이 지났다. 그 사이 나무들은 노랗고 붉은 옷을 하나둘 벗어던지고 앙상하게 마른 몸을 드러냈다. 이곳은 마을과는 비교도 안 되게 추웠으나 고요하고 적막한 공기가 잡념을 씻어내 주었다.
운선은 닭이 울기도 전에 일어나 맑은 공기를 깊숙이 들이마셨다. 원래도 부지런한 운선이었지만, 구월산에 온 뒤로는 조금도 게으름을 부릴 수 없었다.
“유용무괴! 학문은 넓어야 할 필요는 없으나 쓸모가 있어야 하고, 벼슬은 영달할 필요는 없으나 요컨대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무(武) 또한 그러하다. 스스로 다스리고 절제할 줄 아는 자가 진정한 무인이다.”
이른 새벽에는 명상하며 단전에 쌓인 울혈을 풀어냈다. 몸에 쌓인 희로애락은 결국 울혈이 되어 기의 흐름을 방해한다. 기경팔맥에 자연스럽게 내력이 흘러야 결코 주화입마 하는 경우가 없다. 이무영의 가르침을 속으로 되뇌고 나면 어쩐지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조반을 마친 이후에는 수월심검을 익혔다. 마흔여덟 개의 초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스무 번씩 반복했다. 단 한 번이라도 허투루 시연하면 곧바로 불호령이 떨어졌다.
“사부님, 어째서 운선이에게만 이리 가혹하십니까?”
주운이 수차례 말려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수월심검을 전수해주기로 한 그 순간부터 무영의 목표는 단 한 가지였다.
‘이 아이는 다르다. 우리 셋 누구의 뒤를 따라서도 안 된다.’
그것은 창현에 대한 원망이기도 했고, 자신이 포기한 길에 대한 미련이기도 했다. 사형 성곤처럼 아집만 남은 삶도, 율천처럼 후회로 점철된 삶도 아닌, 자신의 선택에 책임지는 삶을 살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걸맞은 실력이 필요했다.
오늘도 해가 뜬 시간 동안은 수련에만 몰두했다. 드디어 검을 내려놓고 앉으니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날씨가 제법 추운데도 수백 번의 휘검을 이길 수는 없었다.
“좀 쉬면서 하렴.”
주운의 걱정 어린 참견에 운선은 해맑게 웃어주었다. 고되고 힘이 들었지만 어쩐지 배울수록 몸은 더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그는 사실 지금처럼 무공 수련에 집중해 본 적이 없었다.
황석산 초옥에서의 삼 년 남짓은 공부보다는 치료가 목적이었다. 또한, 마세풍은 매사 대강에 몹시 게을렀으므로 꼼꼼하게 이치를 설명해 준 적이 없었다. 운선이나 장은 같은 영특한 제자가 아니라면 영명권은 영영 땅속에 묻혔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주운, 저는 사숙의 가르침이 그저 감사합니다. 게다가 사형을 생각해서라도 언감히 배울 수는 없습니다.”
운선의 시선이 왼손을 향했다. 수천 번 나무를 베고, 바위를 내리쳤는데도 검은 여전히 푸른 빛을 반사했다. 가느다란 검날에는 일필휘지로 수월이라 쓰여 있었다. 꿈에서도 잊지 못하는 그의 사형 종연의 보검이었다.
주운을 업고 거의 기다시피 하여 구월산에 도착했을 때, 무영은 마치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사흘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운선에게 말을 건넸다.
“수월심검을 제대로 배워볼 테냐?”
굳이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에 손에 들린 수월검을 보는 순간, 운선은 이 모든 만남이 숙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가르침이 시작되었다. 가르치는 이도, 배우는 이도, 당장 전쟁이라도 날 것처럼 비장하게 검을 휘둘렀다.
“검은 같은 초식을 쓰더라도 누가 주인이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위력을 낸다.”
스승의 구호에 맞춰 주운이 수중월영의 초식을 시연했다. 가볍고 재빠른 몸놀림을 따라 검신이 육방으로 휘어지며 상대를 찔러 들어갔다. 잔물결에 흔들리는 달의 그림자와 같았다.
“이번엔 네가 해보아라.”
운선의 수중월영은 휘검(揮劍)의 소리부터 달랐다. 검신의 굵기는 같았음에도 어쩐지 더 굵고 무겁게 느껴졌다. 휘어지는 각도와 속도는 현저히 줄었으나 공격은 깊고 방어는 완벽했다.
“수월심, 물에 비친 달이 흔들리지 않을 정도의 평온한 심상이 투영되었구나.”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무영의 마음은 감동으로 벅차올랐다. 남은 평생에 수월과 월심이 함께 춤을 추는 광경을 보지 못할 줄 알았건만, 이렇게 눈앞에서 보고 있으니 꿈만 같았다.
‘그래도 핏줄이라고, 제 아버지를 똑 닮았구나.’
무영은 슬며시 자리를 피해 휘적휘적 산줄기를 따라 올라갔다. 이제 스승으로서의 과업은 모두 끝이 났다. 애초에 스승이란 방법을 가르칠 뿐, 성과는 오롯이 제자의 몫이었다.
스승의 뒷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던 주운이 허리를 깊이 숙여 절을 올렸다. 언제나처럼 무영은 이렇게 구월산을 떠났다. 떠나는 이유도, 언제 온다는 기약도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구월산에서 이십여 년을 함께 했다. 서로에 대한 강한 애정과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운선아, 네가 이곳에 온 지도 내일이면 석 달이다. 수월심검은 이미 다 배웠으니 더는 너를 잡을 수가 없구나.”
그날 밤, 주운은 그동안 수백 번 망설였던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각오했지만, 막상 대답을 들으려니 그야말로 심장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
대답을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도 쉬이 결정할 수 없는 선택지였다. 하물며 그는 거대한 책임과 의무를 짊어지고 있었다.
“혹, 내 선택이 당신에게 상처가 될까요?”
이번에는 운선의 차례였다. 그 역시 고르고 골라, 수없이 숙고한 물음이었다.
“글쎄. 네가 려국을 선택한다면 내게 상처가 될까? 새삼 그러기에는 이미 아는 것이 너무 많다. 내가 경국인이라는 것, 그리고 스승님이 내 원수라는 것도.”
“주운?”
운선은 상상하지도 못한 상황에 눈이 동그래졌다. 감당하기 어려운 진실을 알고도 내색하지 않은 주운이 안쓰러우면서도 존경스러웠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이게 가장 적당한 표현일 것 같구나. 힘들었지만, 죽고 싶었던 적도 있지만, 이제는 그런 분노조차 희석되어 무슨 감정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되었어. 스승님은 나의 원수이지만 또한 하나밖에 없는 가족이더구나.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원망도 미움도, 사랑까지도 다 같은 마음이 되었다.”
“주운…….”
운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차가운 그녀의 양손을 꼭 잡아주었다.
“운선아, 나한테는 너도 마찬가지다. 하여, 네가 려국을 택한다 해도 나는 너를 도울 것이다. 기다릴 테고, 네 편에 서겠지. 그건 오직 너이기 때문이다. 나라의 이름은 아무 상관이 없다.”
“주운…….”
달빛에 비친 주운의 얼굴에는 근심이라고는 없었다. 그녀의 따뜻한 품에서 살 수 있다면 이 커다란 죄책감도 지워질 것 같았다.
“이제 월동 준비를 해야겠어요. 채소도 절여두고 생선도 말려두죠. 그리고 돌아오는 봄에는 따뜻한 마을을 찾아봐요, 우리.”
구월산의 수십 개의 봉우리가 온갖 소음을 차단하여 오직 서로의 숨소리만 들리는 완전한 세상이 되었다. 오늘따라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유난히 둥그런 달이 꼭 끌어안은 두 사람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태봉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좁고 험난했다. 굳이 성곽을 두르지 않아도 함부로 진입할 수 없는 지형적 장점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동서남북의 주요 고을을 모두 잇는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과연 한 나라의 수도로서 손색이 없었다.
세 개의 문파가 연합한 토벌대는 이제 태봉까지 골짜기 하나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태봉에 있다는 태을신교의 본진을 치는 것. 황석파의 오랜 추적 결과, 태봉에는 고작 고수 몇과 백여 명의 교도만이 머문다는 첩보가 있었다. 게다가 운평에서의 일로 교주 성곤이 크게 다쳐 행방이 묘연하니, 지금이야말로 마교를 토벌하는 데 적기가 아닐 수 없었다.
“신교 놈들을 만나기도 전에 지쳐 쓰러지겠소.”
일행의 맨 뒤를 따르던 고유생이 결국 참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타고 온 말도 모두 골짜기 밖에 묶어두고 걸어온 지 벌써 두 시진이 넘었다. 가장 연배가 높은 그로서는 체력적으로 한계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사백, 설마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가자는 건 아니겠지요?”
돌아보는 정은률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원체 사백을 고깝게 보기도 했거니와 본인 역시 꽤 지쳤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짜증이 솟구치는데 굳이 모두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고유생이 못마땅했다.
“이러지들 맙시다. 한 가족끼리 왜 이러십니까? 이참에 아예 한숨 돌리고 다시 움직입시다.”
용가현은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서며 멋쩍게 웃었다. 마교 토벌대가 꾸려진 발단에는 용문파가 있었다. 하여, 함께 나서준 황석파와 선운검파가 한없이 고마웠다.
비통한 마음을 안고 두타공파를 찾아간 날, 가현은 조양의 냉담한 반응에 크게 상처를 받았다. 분기충천하여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기를 바란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오대산검을 소집하여 신교 토벌을 논의할 줄 알았다. 마치 옆집 개가 죽은 것마냥 심드렁한 조양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는 자신이 얼마나 허튼 생각을 해왔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묵안이 죽은 이후에 용문파는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려국의 끄나풀을 장문으로 앉혀놓고 병신처럼 졸졸 따랐던 용가 형제는 강호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가현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가장 쉽고, 확실한 방법을 구했고, 그것은 바로 구용(苟容)이었다. 최대의 권력 앞에 무릎 꿇는 것. 그 끔찍한 수치심만 견디면 사문을 지킬 수 있었다. 오직 오대산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조양의 호의에 문파의 존망을 걸다니, 참으로 어리석었구나.’
실의에 빠진 그에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은 의외로 황석파의 젊은 장문 장은이었다. 사실 가현은 황석파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그나마 마세풍에 대해서는 존경심이라도 있었건만, 나잇값도 못 하는 고유생이 설치고 다니는 꼴이 고깝기만 했다. 하물며 항렬로는 한참 까마득한 장은이 장문이 되겠다고 나선 후에는 더 우스웠다. 그것이 반년 전 취임식에 자기 대신 아우 송현을 보낸 이유였다.
‘내 어리석은 판단으로 엄한 아우의 목숨만 잃었구나. 진즉에 황석파와 우호적으로 지냈다면 이런 황망한 일은 겪지 않았을 테지.’
장은의 서찰은 가현에게 동아줄과 같았다. 아무리 복수심에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지만, 단신으로 태을신교와 맞붙을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황석파라면 오대산검 중 가장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었으며, 내로라하는 고수를 보유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형제의 의리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용문주님, 제가 직접 가지 못해 죄송합니다. 대신 자리를 비우신 동안 용문파에 지원을 보내 마교 놈들이 감히 꼼수를 쓰지 않도록 살피고 있겠습니다.”
“장문주, 진정한 의리는 서로가 위기에 닥쳤을 때 비로소 깨닫게 된다더니, 그것이 꼭 맞소.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소이다.”
장은은 끝내 미안함을 표하며 고유생과 정은률을 비롯한 이십여 명의 제자들을 차출했다. 선운검파 역시 보현과 기정 및 최정예의 선자 일곱을 보내 도리를 다했다. 세 문파를 합하면 오십이 넘으니 해볼 만한 싸움이었다. 그러나 오직 두타공파만이 끝내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용문주, 이 노부를 이해해주어 고맙소. 내 본심은 마땅히 용형제의 복수를 하고 싶으나 몸이 안 따라주는 것이니 마음 상해하지 마시오.”
물을 마시고 숨을 돌리고 나니 한결 편안해진 고유생이 용가현에게 넌지시 사과를 했다. 어린 은률과 한바탕 싸운 일이 여간 창피하지 않았다.
“아닙니다. 젊은이들도 저리 지치지 않았습니까? 고선배님께서 직접 나서주신 것만으로도 각골난망입니다.”
“아니, 뭘 또 그렇게까지…….”
용가현이 허리를 깊숙이 숙여 감사를 표하자 고유생은 더욱더 머쓱해졌다. 사실 토벌대에 참가한 연유는 따로 있었다. 장은이 강운선을 놓친 일에 대해 두고두고 그를 깎아내리며 만회할 방도를 찾아오라 잔소리를 해댄 탓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이곳에 왔으니 감사 인사를 받기에는 떳떳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조맹주는 아무도 보내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보현의 고운 이마에 주름이 잔뜩 만들어졌다. 그녀는 늘 조양을 우러러보고 존경했기에 작금의 상황이 훨씬 더 실망스러웠다. 그 마음에 공감하는 용가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맹주는 이제 늙었습니다. 운평표국의 일로 한 번 거꾸러지고 나서는 한없이 몸을 사리고 있지요. 그날 보니, 크게 다쳤다는 말이 낭설이 아닌 모양입디다. 낯빛이 좋지 않고 거동이 불편해 보이더군요.”
“흥, 우리가 그동안 너무 과하게 치켜세워준 게지.”
고유생은 흐뭇한 마음에, 없던 기운도 생길 것 같았다. 장은이 하는 꼴은 영 얄미웠지만, 어찌 됐든 조양의 위세가 한풀 꺾였다니 기분이 좋았다. 황석파가 두타공파를 제치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기회에 마교 놈들까지 일망타진한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이제 곧!’
가현은 문득 고개를 들어 유난히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손발이 시릴 정도의 추운 날씨였지만 마음만은 봄처럼 설렜다. 골짜기 너머에는 그토록 원망했던 그들이 있었다.
‘이서문, 내 직접 네 놈의 간을 꺼내 잘근잘근 씹어 먹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