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90화 (90/209)

#90화. 刻舟求劍(각주구검)

가을이 한층 깊어진 날이었다. 나뭇잎이 상쾌한 가을비를 만나 너도나도 선명한 붉은 빛을 자랑했다. 누구든 감탄할 만한 날씨건만, 두타공파로 향하는 용가현의 마음은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는 아직 용송현의 시신을 확인하지 못했다. 그가 태을신교의 이서문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두타산으로 출발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늘 불안했다. 그 대상이 자신의 아우일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을 뿐.

“조맹주님께 인사 올립니다.”

“아, 용문주님.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구태의연한 인사치레는 하고 싶지 않았으나 맹주에 대한 예의는 지켜야 했다. 게다가 상대는 조양이었다. 조상원으로 인해 명문정파로서의 위상이 격하되었을 때에도 그가 있었기에 수월하게 복귀할 수 있었다.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괜찮으십니까?”

“오랜 폐관 수련으로 햇빛을 보지 못해 그런 듯합니다.”

푸석한 피부 탓인지, 조양은 작년에 만났을 때보다 십 년은 더 늙은 것 같았다. 운평에서 크게 다쳤다는 소문이 있더니만, 그저 낭설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나 지금 용가현에게 조양의 건강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혹, 소식 들으셨습니까?”

“무슨……?”

막상 이야기를 꺼내자 울컥 슬픔이 터져 나왔다. 오직 형제들이 있었기에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문파를 지켜냈다. 용송현은 비록 다혈질에 성질이 급했으나 누구보다 의롭고 용맹한 아우였다. 이제 그와 술 한잔 기울일 수 없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운평에 보낸 제자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 미처 몰랐습니다. 아아, 어찌 이런 일이…….”

용가현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조양은 강호에 큰 사달이 났음을 알았다. 그동안 폐관 수련을 거듭하며 경전의 수수께끼를 푸는 데에만 힘을 쏟느라 강호의 일에는 관심을 가질 수 없던 탓이었다.

“태을신교가 드디어 강호에 다시 나타나려는 것입니까? 만약 그 신호탄으로 우리 용문파를 욕보였다면 절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아아, 그들이 다시금 나타난다면 그야말로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용가현의 울분에 찬 호소를 들으며 조양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딘지 꺼림칙한 부분이 있었다.

‘이서문의 됨됨이로 보았을 때, 결코 독을 쓸 위인이 아니다. 또한, 점혈 이후에 기습? 더욱 이상하다. 무엇보다…….’

조양은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단전 아래를 눌러 보았다. 여전히 손톱 크기의 울혈이 딱딱하게 잡혔다.

‘성곤은 결코 교도들을 일으켜 전쟁을 준비할 리 없다.’

삼 년 전, 뒤늦게 연향으로 온 조양은 고유생을 죽이려 하는 성곤을 막아섰다. 그들은 눈빛만 보고도 지금, 이 순간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때라는 것을 알았다. 오직 각자의 나라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공격을 시작했다. 여러 합을 부딪치지도 않았다. 서로의 장단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고작 십여 번의 합을 맞춘 후에 바로 장력을 출수했다. 그리고 그 일 장이 삼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두문불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되고 말았다.

“조맹주, 이제 나서주셔야겠습니다. 만약 거절하신다면 용문파 단독으로라도 그놈들을 쓸어버리러 갈 것입니다.”

“저 역시 이번 일을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다만, 그들의 속셈을 잘 따져보아야 지난번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습니다.”

“…….”

당장이라도 칼을 뽑을 것 같았던 용가현은, 과거 일을 거론하자마자 입을 꾹 닫아버렸다. 조상원의 일은 평생 용문파의 수치요, 업보였다. 굳이 조양이 저 말을 꺼내는 것은 이 일에서 발을 빼기 위함일 터, 서운하고 억울했다.

“선운검파가 이서문을 직접 대면했다 하였지요? 우선 소문주를 만나 자세한 정황을 알아보겠습니다. 또한, 현재 태을신교가 어떤 계획인지 살펴야 하니 시간이 필요합니다.”

“적어도 몇 달 내에 해결되지 않으면 그들이 선수를 칠 텐데요? 이미 우리 송현을 죽였습니다. 곧 용문파 본진으로 밀고 들어올지 누가 압니까?”

조양은 그저 자신을 진정시키려고만 들 뿐, 도와줄 생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억울하니 목소리가 커졌고, 말이 빨라졌다. 그는 부러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하여 분위기를 몰아붙였다. 가능한 한 상대를 자극하여 결심을 굳히게 하고 싶었다.

“그 마음을 어찌 제가 모르겠습니까? 제가 다 방법이 있으니 수일만 수오당에 머물면서 계획을 세워 봅시다. 그 사이 선운검파에도 연통을 넣겠습니다.”

그러나 조양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와 돈독한 사이였음에도 더는 설득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내내 친절했으나 지극히 단호했다. 어찌 보면 신중한 듯했지만, 한편으로는 남의 일처럼 무관심했다.

‘강호의 의리란, 참으로 부질없구나.’

가현은 얼굴 가득 서운한 빛을 띠고 물러났다. 성질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용문산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우의 죽음을 접했을 때보다 조양에게 거절당한 이 순간이 더 원통하고 화가 났다.

씩씩거리는 가현의 뒷모습을 보며 조양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오대산검의 문주 중에서도 그는 가장 사리가 밝고 점잖은 편이었다. 그런데도 이리 흥분해 있으니 다른 문파의 반응은 안 봐도 뻔했다. 그러나 적어도 맹주인 자신은 최대한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이서문의 점혈 수법은 독특하여 소소정이 오해할 수가 없다. 또한, 그가 직접 나타났으니 틀림없이 개입하긴 했겠지. 그러나 독과 기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앞뒤가 맞지 않아. 아, 설마?’

조양은 그제야 막막했던 시야가 확 트이는 기분이었다. 점혈과 독, 그리고 기습이 모두 한 사람일 리는 없었다. 독과 기습이 또 다른 이의 소행이라면 이서문의 이상한 태도도 이해가 갔다.

‘목격자야 충분히 조작할 수 있다. 용문파 제자를 사주했거나, 이미 포섭된 이를 도사로 위장시켜도 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막히는 지점이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소소정의 태도였다. 누구보다 심계가 깊은 이가 이런 얕은수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이 일의 배후가 바로 황석파구나. 그리고 소소정도 한패다.’

조양은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한 결론에 도달했다. 이 모든 일을 계획한 게 장은이라면, 쓸데없이 화려하게 취임식을 연 것도 이해가 됐다.

‘흥, 건방진 녀석. 감히 오대산검을 주도하여 내 머리 위로 올라서려는구나. 그럼 이제 어찌한다?’

한편, 용가현은 시동이 안내한 숙소에 들어온 후에도 좀처럼 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흔쾌히 나서주리라 예상하지는 않았으나 저리 차분하게 반응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역시 조맹주도 늙은 게지. 고대산파는 그렇다 치고 황석파의 장문도 바뀌었거늘, 그들의 세대가 이미 끝났음이야.’

매월 신양선, 현로 조양, 팔마 마세풍, 그리고 묵안 조상원이 이끌던 오대산검은 벌써 전설처럼 아득한 과거였다. 유달리 늙어 보이던 조양의 초라한 몰골은 그의 생각을 더 확고하게 해주었다.

‘그렇다면 용문파는 이제 어떤 길로 가야 하는가? 감히 두타공파를 배신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과거의 영광에 얽매어 시대의 흐름을 놓칠 수는 없는 노릇.’

빈속이었는데도 속이 답답하여 괜스레 가슴을 주먹으로 두들겨 보았다. 얼른 이 일을 해결하지 못하면 잠도 편히 못 잘 것 같았다.

똑똑똑.

그때, 바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웬 소년이 서찰을 들고 나타났다. 시동의 옷차림이 아닌 것을 보니, 외부에서 온 연통임이 분명했다. 가현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서둘러 서찰을 열었다.

일각이 지났을까? 수십 번이나 서찰을 읽은 가현이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내용대로라면 더는 이곳에서 죽치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서둘러 수하들을 불러 행장을 꾸렸다. 아까 받은 서찰과 자신이 쓴 서찰을 방 안에 덩그러니 남겨두고는 부리나케 현문 밖을 나섰다.

아무도 말릴 새가 없었다. 오직 서찰에 적힌,

"舟已行矣而劍不行(주이행의이검불행) 求劍若此(구검약차) 不亦惑乎(불역흑호)?"

한 문장만이 그의 결심을 대변해 줄 뿐이었다.

계정은 운평과 달리 조용하고 한적했다. 마을이 더 작기도 했거니와 수년 전, 주변에 있던 수 개의 표국이 몰살당했던 일 이후에 상업이 크게 쇠퇴했기 때문이었다.

백형진이 계정 초입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해가 진 후였다. 평소대로라면 바로 객잔을 찾았겠지만, 오늘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진작 왔어야 했던 것을, 괜한 감정놀음 때문에 늦어진 터였다.

죄책감과 초조함을 가득 안고 형진은 마을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의 행색이라면 사람이 많은 곳은 절대로 피했을 것이었다. 되도록 외진 장소를 찾다 보니 종국에는 깊은 숲속까지도 헤매게 되었다.

‘하아, 설마 그새 거처를 옮긴 것인가? 아니면 거짓을 고했나?’

허나, 그럴 일은 없었다. 흑접영의 부단주는 보기보다 훨씬 충성심이 강했다. 웬만한 고문에는 끄떡도 없었다. 손가락, 발가락 두 개씩, 총 여덟 개의 부위가 떨어져 나가는데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조양은 결국 분노와 조급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최악의 고문을 시도했다. 언젠가 운선을 잡아두고 협박할 때 말했던 그것이었다. 몸에서 살점이 반쯤 뜯겨나간 사흘째 날 아침, 부단장은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단주의 거처를 말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한마디를 끝으로 숨이 멎었다. 지켜보기만 했던 형진에게도 끔찍한 기억이었다.

‘반신불수의 몸으로 움직여봤자 얼마 못 갔을 것이다. 내일 일찍 주변 마을까지 탐문 해보아야겠다.’

한밤중이라 차마 숙소를 구할 수 없었던 형진은 아무렇게나 숲 바닥에 누워 잠을 청했다. 하얀 도포 자락에 흙이 잔뜩 묻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원체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그였지만 언젠가부터 이런 것들이 다 소용없게만 느껴졌다.

‘부질없다.’

그는 운선을 바라보는 주운의 눈빛에서 이미 자신의 자리가 없음을 깨달았다. 하긴,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부모에게도, 스승에게도 버림받았던 자신이 여인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방법이 잘못되었다. 사람 사이의 인연, 연정, 신뢰 따위를 추구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이 있을까?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단 하나. 모두가 우러러보고 존경해 마지않는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었다. 그 목적만 이루고 나면, 나머지 빈 곳은 자연스럽게 채워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운 형진은, 아침 일찍 다시 마을로 내려갔다. 다들 부지런한지 이른 시각인데도 장터에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래도 요기는 해야 하는지라, 가장 근방에 있는 객잔으로 들어가 음식을 시켰다. 그의 옷차림이 영 지저분한 탓에 점소이가 대놓고 싫은 내색을 했다. 형진은 슬쩍 자존심이 상해 은자 몇 냥을 미리 건네주었다.

“제일 좋은 옷과 방을 준비해 주시오.”

“예, 공자님.”

역시 객잔 주인은 셈이 빨랐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많은 요리를 내와서는 연신 허리를 굽신거렸다. 어쩐지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형진은 무심히 밖을 내다보았다.

가을 장터의 풍경은 번잡했지만 평화로웠다. 수많은 노점에서는 온갖 먹거리들이 넘쳤고 장 구경을 나온 마을 사람들 얼굴에는 근심이 없었다.

“영고일취(榮枯一炊)하거늘, 뭐가 그리 애가 닳아 마음을 뺏겼는가?”

찻잔을 술잔 삼아 들고 있으니 다시금 우울한 감정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형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식은 차를 단번에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에잇, 저 거지가 또 왔네.”

“아휴, 재수 없어.”

평화로웠던 장터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마침 찻잔을 채우러 온 점소이에게 물으니 인상을 잔뜩 쓰며 대답했다.

“벌써 반년째 저리 나타나 추태를 부리고 있습죠. 눈도 한쪽이 없고 허리 아래로는 몸을 쓸 수 없는지라 처음엔 다들 불쌍히 여겼답니다. 우리 객주님도 음식과 옷을 내주었지요. 그런데 저 거지 놈이 상당히 거만하더란 말입니다. 주제도 모르고…….”

점소이의 끝날 줄 모르는 불평은 형진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오직 그의 눈은 단 한 사람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찾았다!”

계정 장터 바닥을 뒹굴며 구걸을 하는 저 거지는, 한때 강호를 공포에 떨게 했던 흑접영의 단주, 흑접쌍살 우영이었다.

*** 舟已行矣而劍不行(주이행의이검불행) 求劍若此(구검약차) 不亦惑乎(불역흑호)?

: 배는 이미 나아갔지만 칼은 그대로인데, 칼을 찾는 것이 이와 같다면 실로 어리석지 않은가?

<‘여씨춘추’ 中 ‘찰금’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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