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89화 (89/209)

#89화. 任重道遠(임중도원)

윤설은 고개 너머로 운선의 얼굴이 보이자 참았던 눈물을 왈칵 터뜨렸다. 그를 기다리던 하루가 꼭 일 년 같았다. 우선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은 그의 안전이었다. 조금 지친 기색 외에는 건강해 보이자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등에 업힌 주운이 눈에 들어왔다. 대강 보아도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얼른 이리로!”

만약을 대비하고 있던 설이 덕분에 주운을 곧바로 치료할 수 있었다. 외진 곳에 버려진 초가는 겨우 비만 피할 정도의 폐가였으나 오히려 몸을 숨기기에는 더 용이했다. 고유생이 당장 동굴로 돌아와 찾지 않는다면 아직은 여유가 있을 터였다.

“그나마 접골을 하여 최악의 상황은 면했습니다. 그때 가르쳐두길 천만다행이지 뭐예요?”

설이의 농을 듣고 나서야 운선의 다리가 풀어졌다. 관절 마디마디가 끊어질 것 같은 통증에 정신이 아득했다. 그 양을 가만히 보던 현진이 재빨리 무너지는 운선의 몸을 부축했다.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적이었다.

“기경팔맥이 모두 다쳤습니다. 그래도 심맥은 구했으니 생명에 지장은 없을 거예요.”

아침이 되어서야 대강의 치료가 마무리되었다. 설이 역시 짧은 시간에 온 힘을 다한 탓에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운선은 고맙다는 말 대신 가만히 그녀의 마른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동안 마음 고생이 심했는지 헤어졌을 때보다 퍽 야위어 보였다.

“오라버니, 급한 불은 껐지만, 아직 안심하기에는 일러요. 언니는 경맥이 손상된 채로 너무 오래 방치되었기 때문에 내력이 역류하고 있어요. 이대로 두었다가는 주화입마에 빠질지도 모르지요.”

“그러면 어찌해야 할까?”

운선의 표정을 보니 주운을 위해서라면 불길 속도 마다하지 않을 것 같았다. 누가 바늘로 가슴을 콕콕 쑤시는 기분이었다.

“언니에게 내력을 주입하여 기의 흐름을 바꿔야겠지요. 그렇다면 역시 한 분밖에 떠오르지 않네요.”

“그럼 역시 검선…….”

중얼거리는 현진의 말을 듣자마자 설이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사실 치료할 능력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 그녀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오직 그녀의 사부, 검선 이무영만이 주운을 위해 희생할 수 있을 테니까.

운선은 한결 숨소리가 편해진 주운을 내려다보았다. 붓기는 많이 가라앉았으나 온 얼굴이 피멍으로 얼룩덜룩했다. 그녀가 겪은 고통은 오직 자신 때문이었다. 애초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제가 구월산으로 가겠습니다.”

윤설은 그가 말하기도 전에 대답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최선이었지만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색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담뿍 담은 눈으로 운선의 옷자락만 쥐고 있을 뿐이었다.

“결심이 섰느냐?”

현진은 다정하게 운선의 손을 잡았다. 그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지지해주고 싶었다.

“아직은 아닙니다. 차차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

더는 묻지도, 대답하지도 않았지만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운선이 진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어쩌면 그것이 가장 옳은 선택이라는 것도.

“오라버니, 상처가 깊어 회복까지 꽤 걸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꼭 언니의 곁에서 오래오래 있어 주세요.”

현진과 운선이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서, 설이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운선이 이대로 구월산으로 떠나면 영영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떼를 쓰고 바짓가랑이를 붙들고서라도 보내기 싫었다. 그렇지만 잡지 않았다. 양보해야 하는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주운이었으므로. 운선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평생을 노력해도 그녀의 자리는 탐할 수 없다는 것을.

두 사람과의 이별은 담백하고 간소했다. 예상외로 설이는 내내 웃는 낯이었다. 이왕 떠나는 길에 운선의 마음이라도 편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사저,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설아, 내가 없더라도 밥은 꼭꼭 챙겨 먹어야 한다.”

“에그, 제가 무슨 어린애인가요? 혼인해도 벌써 했을 나이랍니다. 그러니 제 걱정은 말고 언니나 잘 챙겨주세요.”

운선은 차마 애틋한 마음을 다 전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미안함과 아쉬움, 그리고 죄책감 때문이었다. 현진은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그녀의 깊은 애정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비로소 운선이 뒤를 돌아 발걸음을 옮기자 윤설은 고개를 푹 떨궜다. 그녀의 자그마한 발등 위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너만은 제발 행복했으면 좋겠구나.”

눈에 흙먼지가 들어갔는지, 현진조차도 소맷자락을 들어 연신 눈가를 찍어내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정은률의 얼굴에는 통쾌함이 가득했다. 안 그래도 언젠가 용송현을 손 봐주리라 다짐했는데, 이리 기회가 빨리 올 줄 몰랐다. 또한, 이 일로 마교를 뿌리 뽑을 수 있다니, 그야말로 일거양득의 작전이었다.

“이서문이 끼어들다니, 불길하구나.”

그러나 칭찬을 받을 줄 알았던 기대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전후 상황을 듣고 난 장은의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두 줄이나 생겼다.

“오히려 더 확실하지 않습니까? 점혈 수법이 독특하여 소장문도 대번에 그의 정체를 눈치채겠지요. 우리가 꾸민 일이라고 과연 누가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목청을 높여 불만을 토로하는 은률을 보며, 장은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되레 이서문이 끼어든 바람에 의심만 사고 말았구나. 우리는 그저 용송현을 이용하여 명분만 만들면 되는 것이었다. 소장문에게 태을신교의 소행이라는 증거를 보여주면 그뿐, 믿든 믿지 않든 상관이 없었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그녀는 대의를 따를 테니 말이다. 허나, 이서문이 끼어들었으니 결국 오대산검의 행보를 그들에게 알린 꼴이 아니냐? 더구나 네가 대놓고 그에게 누명을 씌우는 바람에 대항할 명분을 주었구나.”

“하지만…….”

은률은 대차게 따지고 싶었으나 말문이 턱 막혔다. 사형은 언제나 걱정이 너무 과했다.

“됐으니 그만 나가 보아라.”

귀찮다는 듯, 얼굴도 보지 않고 손을 내젓는 장은이었다. 그 어렵고 위험한 일을 완수했건만, 핀잔만 잔뜩 들은 은률은 서운한 마음만 안고 처소를 떠났다.

“일은 잘되었건만…….”

생각해 보면 일은 순조로웠다. 용송현의 죽음은 강호에 큰 파장을 일으킬 터였다. 게다가 소소정이 직접 목격했으니 조작의 의심도 피할 수 있었다. 뿐인가? 용문파를 견제하는 데에 이보다 탁월한 묘책이 있을까?

사실 그는 언제나 용가 형제가 껄끄러웠다. 묵안 조상원 때문에 명성에 흠이 가긴 했으나 그래도 용문파였다. 그 역사와 무학의 심오함은 감히 무시할 사람이 없었다. 문제는 용가 형제의 태도였다. 용가현은 장문직에 오르자마자, 조상원의 정체를 까발린 일에 앞장선 조양과 형제의 연을 맺었다. 말이 형제지, 그것은 두타공파가 일체의 살림과 대외활동을 간섭한다는 뜻과 같았다. 규모가 작고 제자들의 수가 적은 두타공파 입장에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다름없었다.

하여, 그는 용송현의 죽음으로 두 가지 인식을 심어주고 싶었다. 하나, 조맹주의 아래에 있어도 결코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 둘, 태을신교는 여전히 조상원의 죽음에 대해 복수심을 품고 있다.

‘그런데 이서문이라……. 이서문이 거기에 왜 나타났을까?’

장은은 무의식적으로 오른손을 들어 턱을 문질렀다. 뭔가 어려운 문제를 풀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습관이었다. 어쩐지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기분이었다.

‘내 취임식을 방해할 생각이라면 이제 나타날 리 없다. 아마도 오대산검의 일에 끼어들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태을신교에게 누명을 씌우기로 마음먹은 건 그들이 당분간 강호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강운선의 말 때문이었다. 가만, 강운선?’

그때 그의 머릿속을 ‘탁’ 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이서문은 강운선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닐까? 그 이유라면 갑작스러운 그의 출현이 어색하지 않았다.

‘강운선은 태을신교의 상징적인 존재다. 검신 강율천도, 검귀 성곤도, 심지어 세상일에 무관심한 검선 이무영까지도 그 녀석 하나 지키겠다고 난리였으니까.’

은률의 말에 따르면 강운선은 굳이 객잔에 들러 고인경을 만났다고 했다. 그 이후에 고인경이 백형진과 밤새 술을 마셨다. 낮에 본 그는 백형진에게 몹시 실망한 눈치였는데, 갑자기 친한 척 담소를 나눌 리 없었다.

‘아마도 백형진만 아는 무언가를 캐내 강운선에게 알려줄 작정이었겠지. 그게 뭘까?’

장은은 백형진과 강운선의 접점을 찾아보기로 했다. 두 사람은 무려 삼 년을 넘게 동문수학했으니 서로 쌓인 애증이 대단할 것이었다. 그리고,

“아!”

드디어 장은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안개가 가득 꼈던 머릿속이 일시에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이 모든 수수께끼의 핵심은 그들의 싸움에 불현듯 나타나 방해하던 여인, 검선의 제자였다. 그리고 이 사달에 원흉은 누가 뭐래도 고유생이었다.

장은이 그길로 고유생을 찾아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여태 그를 독방 늙은이 취급했으나 오늘만큼은 최대한 비위를 맞춰줄 생각이었다. 의도가 어쨌든, 일만 잘 풀리면 그의 공을 치하해 주어야 마땅했다.

“사숙, 이른 시각에 죄송합니다. 아주 중요한 일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거두절미하고 여쭤도 되겠습니까?”

고유생은 아침 일찍 갑작스럽게 찾아온 장은의 행동이 불쾌했으나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운선에게 경전의 수수께끼를 들은 지금이야말로 세상 흥분되고 행복하기 때문이었다.

“뭐, 그러든지.”

심드렁하게 대답하면서도 사뭇 긴장되었다. 장은의 됨됨이를 잘 알기에 지나치게 예의 바른 그의 태도가 꺼림칙했기 때문이었다.

“혹 주낭자를 찾아 강운선이 되돌아오지 않았습니까?”

“뭐, 뭐라? 갑자기 뭔……. 주낭자가 도대체 누구냐?”

장은은 화들짝 놀라는 고유생을 매의 눈으로 노려보았다. 미묘한 반응만으로도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다. 게다가 고유생은 원체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기도 했다.

“사숙이 죽이려 했던 검선의 제자 말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강운선의 약점이기도 하지요.”

“아, 아니……. 나는…….”

당황하여 말까지 더듬는 사숙을 보며, 장은이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역시 자신의 예측은 틀린 적이 없었다.

“아, 됐습니다. 이럴 시간이 없으니 강운선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이미 주낭자를 이용하여 그자를 잡아두지 않았습니까?”

고유생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시치미를 떼지 못한 게 패인이었다. 저 어린놈에게 매번 속을 다 들키니 여간 창피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지체하지 않고 동굴 앞까지 이동했다. 고유생의 말대로라면 오늘로 꼬박 사흘째였다. 물도 빛도 없는 곳에서 이틀을 보냈으면 지금쯤 기력이 다 쇠했을 터, 게다가 크게 다친 주운은 이미 죽었을지도 몰랐다.

‘만약 여인이 죽었다면 강운선도 죽여야 한다. 정말, 이 늙은이는 나를 돕지는 못할망정 방해만 되는구나.’

자신을 한심하게 보는 사질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유생은 뚱한 표정으로 구덩이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은 아침인데도 짙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강운선! 야!”

고유생이 수차례 불렀으나 여전히 어둠 속은 적막하기만 했다. 혹시 혼절했나 싶어 불빛도 비춰보았으나 어디다 몸을 숨겼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내려가십시오.”

“뭐?”

“제가 여기서 끈을 내릴 테니 내려가시란 말입니다.”

돌아보는 장은의 얼굴에는 어느덧 웃음기가 싹 걷혔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당장 발로 차버릴 기세였다.

“아……, 알았다. 내 직접 확인해 보마.”

감정이 몹시 상했지만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심술궂은 표정으로 변할 때면, 세상 독하고 매정한 흉한이 되는 장은이었다. 가끔은 그의 사형 마세풍보다도 두렵다 느낄 정도였다.

횃불을 들고 내려간 동굴 안은 한겨울처럼 음습했다. 괜스레 몸을 떨며 바닥에 발을 디뎠을 때, 고유생은 일이 크게 틀어졌음을 깨달았다.

“젠장, 망했다.”

구덩이 안에는 강운선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달랑 쥐새끼 두 마리만이 약 올리듯 고유생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있을 뿐이었다.

*** 임중도원(任重道遠):

맡겨진 일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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