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心中有心(심중유심)
마세풍의 비밀 지도에는 통로가 무려 세 개였다. 그중에 하나는 장문의 처소와 밖으로 직접 통하는 길, 하나는 장문의 처소와 동굴을 잇는 길, 그리고 남은 한곳이 이 비밀 연무장과 밖을 연결하는 통로였다.
현진이 운선을 찾은 것은 천운이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황석산으로 잠입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제일 후자가 최선이었다. 다만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니 망설여지기도 하였으나 그걸 고려할 만큼 현진은 이성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무작정 좁은 통로로 몸을 욱여넣은 다음에서야 너무 섣부른 판단을 한 게 아닌가 조금 후회한 정도였다.
“아아, 사저…….”
운선의 시선은 자연스레 현진이 나타난 곳을 향했다. 역설적이게도 그곳은 그들이 처음 갇혔던 구덩이 바로 옆이었다. 운선은 그 쥐 한 쌍이 이 연무장으로 빠져나갔다고 생각했으나, 사실 다른 구멍을 통해 아예 밖으로 탈출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딱 맞았다.
“운선아…….”
현진은 끔찍한 몰골을 한 채 울고 있는 운선을 마주하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어째서 이 아이의 운명은 단 한 번도 쉴 틈을 주지 않는가? 늘 자신의 팔자를 한탄했건만, 그에게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어찌 된 일이냐?”
운선은 한참 만에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누구보다 의지하는 사저를 만나자, 혼자 견뎠던 이틀간의 설움이 복받쳐 올라왔다. 장은과의 일, 그리고 주운과 고유생의 일까지 대강 전달하고 나서야 차츰 흥분이 가라앉았다.
“주운이 위급하구나.”
현진이 맥을 짚어보니 당장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미약했다. 그나마 운선이 경맥의 막힌 혈을 뚫고 끊임없이 내력을 주입하였기에 지금까지 살아있던 것이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설이가 있다. 어떻게든 거기까지만 가면 살 수 있을 거야.”
“설이라면 가능하겠지요? 그럴 겁니다.”
언제 고유생이 마음이 바뀌어 찾아올지 모르니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야 했다. 다행히 현진이 챙겨준 환을 먹고 잠시 쉬고 나자, 쇠진한 기력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운선은 의식이 없는 주운을 등에 업었다. 좁은 통로에 주운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사저의 뒤를 따라나섰다.
험한 길을 가는 내내, 운선은 또 다른 공포와 싸워야 했다. 점점 차가워지는 주운의 몸. 그것은 일종의 기시감이었다. 등에 업힌 사람만 바뀌었을 뿐, 장소도 상황도 똑 닮아 있었다.
‘이번에는 꼭 살린다.’
반면 현진은 전혀 다른 이유로 마음이 불편했다. 주운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 가득한 그의 눈을 보는 순간, 이제 더는 모른 체하면 안 되겠다는 책임감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솟구쳤다. 적어도 운선은 자신의 삶처럼 후회로 점철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운선아, 도와주지 않아도 되겠느냐?”
“괜찮습니다. 힘들지 않습니다.”
아직은 힘들지 않았다. 이틀 동안 잠도 거의 못 잤고, 먹은 거라고는 고작 신 열매 몇 개가 전부였지만 견딜 만했다. 운선에게 주운은 그만큼 대단한 존재였다.
“주낭자는 깊은 내상을 입었다. 만약 설이가 치료하지 못한다면 어쩌겠느냐?”
“그럴 리 없습니다. 설이는…….”
현진의 의중은 충분히 알았으나 조금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최악의 상황을 미리 걱정하고 싶지 않았다.
“심맥이 다쳤을 경우 치료에 한계가 있다. 그런 때에는 내공이 심후하면서도 의술이 뛰어난 의원을 찾아야 하지. 그러나 설이는 무공을 할 줄 모른다.”
“…….”
운선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만약 심맥이 다쳤다면? 그다음은? 가정만 했을 뿐인데 손발이 차가워졌다.
“그러나 만약 그렇더라도 단 한 명 주운을 살릴 사람이 있다.”
“네? 그게 누구인가요?”
현진의 뜻밖의 말에 막혔던 가슴이 뻥 뚫렸다. 방법이 있으면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그것을 찾아 주운을 살릴 수 있었다.
“검선 이무영. 주운의 스승 말이다. 네가 구월산까지 데려가면 만날 수 있을 거다.”
“구월산이 아니라 천서국이라도 못 갈까요. 그럼 설이를 만나 숨을 돌려놓고 그분에게 데려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흥분하여 말이 빨라진 운선과 달리, 현진은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주운을 구하는 건 가능했다. 이무영이야말로 려국 최고의 의원이었으니까. 다만,
“그다음은 어쩔 생각이냐?”
“네? 무슨.”
설이가 있는 곳까지 고개 하나가 남았을 때, 현진은 기어코 내내 품고 있던 그 말을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해야 할 말이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자유가 있었다.
“네가 이 아이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고 있다. 하여 언젠가는 계속 함께 있기를 소망하는 날이 오겠지.”
운선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는 않았으나 어렴풋이 그런 바람을 가진 적이 있던 것 같았다.
“주운은 우리와 다르다. 이 아이는 경국인이니까. 하여 려국인인 너, 아니 려국의 운명을 감당해야 하는 너에게는 버거운 상대다.”
“그건 상관없습니다. 주운 역시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물론 장애가 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현명하게 겪어내겠지요.”
주운은 언제나 그의 편이었다. 그가 려국인임을 알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답이 되리라 생각했다.
“자신의 부모를 죽인 이가 려국인이었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도 마음이 변하지 않을까?”
앞서 걷던 현진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운선을 돌아보았다. 놀란 그의 얼굴을 보니 미안함도 후회도 들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한 번 열어젖힌 상자는 결코 다시 닫을 수 없을 테니까.
“주운은 려국 때문에, 너의 아버지 창현 때문에 부모를 잃었다. 그래도 끝까지 주운을 지킬 수 있겠느냐?”
***
경국은 려국에 비해 몇 곱절이나 넓은 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호시탐탐 뺏을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려국을 노리는 나라는 비단 경국만이 아니었다. 하여, 황제 이충은 침략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 고심했고, 결국 그 방법을 찾아냈다.
국경지대는 언제나 위태로웠다. 때문에, 소속이 모호한 유이민이나 겨우 들락일 뿐 군락지 몇 개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척박한 곳에 경국의 백성 일부가 강제로 동원되었다. 창현과 그의 수족 같은 신하들이 눈치챘을 때는 이미 여러 개의 마을이 된 후였다.
“국경에 도적 떼가 출몰하여 토벌대가 필요합니다.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토벌대의 수장은 강율천이었다. 창현이 누구보다도 신뢰하는 려국의 충신. 그는 매사 신중했고 용맹한 장수였다. 명을 받들고 출정한 율천은 도적 떼의 우두머리라고 알려진 이의 머리를 단칼에 베었다.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건, 그 후의 일이었다.
“도적 떼가 아니라 군락지에 정착한 마을 사람들이라 합니다.”
율천은 더럭 겁이 났다. 자신의 목숨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죄 없는 이들을 죽인 죄책감 또한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가 처참한 마음으로 돌아왔을 때, 안 그래도 기회만 엿보던 경국은 부리나케 사신을 보냈다. 율천의 우려는 현실이 되어 눈앞에 나타났다.
“려국의 왕, 창현은 무릎을 꿇어라.”
경국의 사신이 다짜고짜 조서를 낭독하는 순간까지도 창현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아니, 혹여 그 음모를 알았다 하더라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백성을 아끼고 지키려 하는 려국의 왕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방식이었다. 백성을 희생시켜야만 얻을 수 있는 승리였기 때문이었다.
이충은 려국의 경제, 문화의 요충지 다섯 곳에 오대산검의 수장들을 파견했다. 명목은 조서를 작성하여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지만 실상 목표는 끔찍한 살육이었다. 어느 한 곳도 초토화가 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합법적인 살인에 흥분한 경국인들은 자신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했다. 보이는 대로 약탈하고 살인과 강간을 일삼았다.
창현은 그제야 자신이 덫에 걸렸음을 깨달았다. 섣불리 화친을 맺으려 한 조바심이 려국의 백성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절망에 빠진 그에게 대사성 성곤은 마지막 충언을 올렸다.
“부디 군사를 이끌고 국경을 쓸어버릴 수 있도록 윤허해 주십시오.”
“…….”
창현은 끝내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그의 뒤에는 화친이 최선이라 주장하는 강율천이 있었으며, 실제로 이 때늦은 공격이 더 큰 화를 불러오리라는 위험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과 왕실이 치욕을 감내하면, 려국의 백성은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반면 성곤은 자신의 선택에 자신이 있었다. 마지막 발악이라도 해봐야 한다고, 적어도 꿈틀거려 봐야 려국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역심으로 오해받아도 좋았다. 그런 오해는 목숨으로 갚으면 될 일이었다.
다행히 그의 또 다른 사형제인 이무영은 뜻을 같이하였다. 국경에 근접한 군락지 세 곳. 두 사람의 목표였다. 그들은 애초에 율천이 토벌한 마을도 군진(軍陣)이라 생각했다. 간악한 모사(謀士)인 이충이 응당 그곳에 미끼를 던져두었을 뿐, 백성의 탈을 쓴 훈련받은 군사들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당연히 그들의 계획은 성공했다. 군락지 세 곳에는 개미 한 마리도 살 수 없는 폐허가 되었다.
***
“그러나 안타깝게도 스승님의 추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스승과 사숙이 죽인 그들은 손에 칼 한 번 쥐어 본 적 없는 백성들이었다. 그곳에 주운의 가족도 있었다.”
현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운선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애써 부정하고 싶었다. 주운과의 인연이 악연이라는 증거는 아직 어디에도 없었다.
“주운의 스승이 바로 이무영입니다. 만약 사저의 말이 진실이라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어찌 자신이 직접 죽인 이의 자식을 데려가 키울 수 있단 말입니까?”
현진은 예상했던 질문이었는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지금부터가 자신이 이 이야기를 꺼낸 진짜 이유였다.
“그래, 맞다. 사숙님은 주운의 부모를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 했다. 어머니의 품에서 울고 있는 주운을 발견했을 때에야 자신 역시 살인마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하여, 그 길로 어린 주운과 그녀의 보검 월심을 스승님께 맡기고는 구월산으로 숨고 말았단다.”
“…….”
얼음장 같은 주운을 온몸으로 느끼며 운선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아 넘겼다. 같은 사부 아래에서 성장한 사형제들이 어째서 뿔뿔이 흩어졌는지 알게 되자 거대한 감정의 덩어리가 마음속을 헤집어 놓았다. 주운도, 자신도 이 억울함을 어디에 토로해야 할까?
“사숙은 아마 죽으려고 했던 모양이야. 다만 이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결심이 지금까지 버텨온 이유라고 했다. 스승님과 사숙들은 각자 다른 길을 택했고 그중 어떤 선택이 가장 옳은지는 그 누구도 판단할 수 없다. 하여, 운선아.”
현진은 애정이 가득한 눈으로 운선을 바라보았다. 늘 냉정하게만 대했던 사저의 행동이 어쩐지 어색하면서도 슬퍼 보였다.
“너도 곧 결정해야 할 순간이 올 게다. 지금처럼 기약 없는 려국의 독립을 위해 싸울 수도, 주운과 은거하여 가족을 지킬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결코 너를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단다.”
“사저……. 저는……, 저는…….”
운선은 목이 메어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일부러 외면해왔던 진실이 까발려지자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지금껏 아버지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의 무능함이, 무책임함이 자신에게 투영될까 두려웠다. 왕실의 핏줄이라는 죄책감만으로도 버겁고 힘든 삶이었다. 그 이상의 무게는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진심은 변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운선아, 인제 그만 감당해도 된다. 꼭 네가 아니어도 된다. 려국이 아니라 단지 너 자신을 위해 살아도 된다.”
결국, 운선은 참았던 눈물을 왈칵 터뜨렸다. 들썩이는 그의 등 때문인지 업혀있는 주운도 함께 울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