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磨斧作針(마부작침)
사내가 떠나고 난 객잔은 왠지 모르게 더 썰렁하고 음습했다. 아마도 억울하게 죽은 용송현의 영혼이 차마 저승으로 가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그 참혹한 현장을 목격한 서문은 착잡하기만 했다. 사내의 정체는 알 수 없었으나 의도만은 명확했다. 자신과 태을신교에 누명을 씌우려는 것. 그는 점혈 수법만으로 서문이 이 일에 관여했음을 눈치챘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곧 강호에 피바람이 몰아치겠구나.”
무려 삼 년간이나 잠적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였으나 그중에서도 교주 성곤을 비롯한 칠원성군의 부상이 가장 컸다. 아직도 그때의 여파가 남아있건만, 다시금 강호로 불러내려는 덫에 걸려든 셈이었다. 물론 서문이 끼어들지 않았어도 결과는 같았을 터, 다만 죄책감은 피할 수 없었다. 게다가,
‘만약 내가 용송현을 어설프게 돕지 않았다면 이리 허망하게 목숨을 잃지는 않았을 텐데.’
눈도 감지 못하고 죽은 용송현의 시신 앞에서, 서문은 고개를 푹 수그린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아까 그놈의 실력이라면 용송현이 아니라 용문파 장문 용가현이 직접 상대해도 이기기 어렵습니다. 이기지도 못할 싸움에 자존심만 상하고 죽느니, 사형 탓이라도 하면서 죽는 게 낫지 않겠어요? 그나저나 저들이 아까 말한 이가 아무래도 운선이인 것 같아요.”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현진이 서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곧 들이닥칠 예정인 선자들은 선운검파가 분명했다. 그렇다면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는 게 순서였다.
“고대산파 장문이 이곳을 뜬 지 얼마 안 된 것 같아요. 뒤쫓아가 운선의 행방을 물어보지요. 다른 무리가 몰려오기 전에 움직입시다.”
그러나 서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는 아직 오대산검과 대적하기에 무리가 있다. 가능하면 오해를 풀어야겠구나. 실패한다 해도 시도는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
현진은 사형의 말이 완전히 틀리지 않았으므로 자신의 의견을 관철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직 자신과 사형만이 그나마 내력을 회복한 축에 속했다. 사형제들을 구하기 위해 홀로 천서국과 맞섰던 마진건과, 숙부의 죽음으로 인해 힘들어하는 적우에게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어차피 될 일이 아니라 생각하지만, 시도는 해보십시오. 그사이에 저는 고문주를 뒤쫓아가 운선의 소식을 더 알아보겠습니다.”
현진이 반대하지 않으니 천만다행이었다. 꽤 고집이 센 서문이지만 유독 그의 사매만은 이긴 적이 없었다.
“고문주를 만나지 못하더라도 더는 뒤를 쫓지 말아라.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되니 굳이 위험한 일을 만들지 말란 말이다.”
“제가 사형에게 하고 싶은 말이 딱 그거랍니다.”
현진은 걱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서문에게 입술을 삐쭉 내밀어 보이고는 곧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운선이 고인경과 접선하였다면 황석파에서 뜻하지 않은 일이 터졌을 가능성이 컸다. 불길한 예감이 들자 현진의 마음은 더더욱 초조해졌다.
‘반드시 고인경을 찾아야 한다.’
객잔에 남은 서문은 독의 종류를 알아내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 저편에 실신하여 자빠져있는 점소이를 깨울까도 고민해 보았지만 그랬다가 되레 일을 그르칠까 걱정되었다. 하여, 독이 들었으리라 추정되는 음식 일부를 잘라내어 수통 속에 넣어두었다.
‘이 정도로 희귀한 독이라면 필시 구하기 어려웠을 터. 독의 종류만 알아도 그 흑의인의 배후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십여 장 밖에서부터 미세한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선운검파의 선자들이 들이닥친 모양이었다. 서문은 아까 숨었던 곳과 같은 장소로 들어가 숨을 죽였다.
한편, 현진은 객잔을 나오자마자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고작 한 식경 정도 따라 올라갔을 때, 고인경의 일행을 마주쳤다. 다행히 일전에 그를 본 적이 있었기에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원래 그들은 용문파가 객잔에 도착하기도 전에 길을 나섰더랬다. 그런데 영준이 가는 내내 뭉그적거리며 눈치를 보는 게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마을을 채 나서기도 전에 부모님의 유품을 이불 위에 두고 왔다며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어쩐지 미심쩍었으나, 마음이 약한 인경은 결국 그 고집을 꺾지 못하고 객잔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째서 그리 덤벙대는 것이냐?”
“죄송합니다. 문주님. 워낙에 저에게는 소중한 물건이라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거듭 사죄하는 영준의 얼굴은 잘 익은 능금처럼 새빨갰다. 그의 장문에게는 물건을 핑계 삼았으나 진짜 이유는 가은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오늘 밤까지만 객잔에서 기다려달라던 그녀의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혹시나 마음이 바뀌어 고대산에 동행하지 않을까 하는 바람도 조금 있었다.
‘용문파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일이 쉬웠을 텐데.’
이른 저녁, 골목 어귀로 들어오는 용가현의 모습을 본 인경은 다짜고짜 행장부터 꾸렸다. 일단 쫓아 나오기는 했으나 영준은 내내 마음이 초조하였다. 그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은 장문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가은을 생각하면 어떻게든 돌아갈 구실을 만들어야 했다. 일단 거짓말을 하고 보았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고작 여인 때문에 장문을 속였다고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골목 밖에서 기다릴 테니 물건을 찾아 나오너라.”
“넵! 어? 그런데 저 여인은 꼭 어디서 본 듯합니다.”
그때,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인적이 뜸한 곳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도 놀랐거니와, 낯이 익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
“누굴 말하는…….”
무심히 고개를 돌리던 인경은 여인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그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무참하게 표사들을 베던 그녀를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소백화…….”
“네? 설마…….”
그제야 영준도 그녀의 정체를 기억해 냈다. 여인이 드디어 몸을 움직여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강운선에 이어 현진까지 나타나다니, 강호의 평화를 깨고 또 한차례 피바람이 불지도 모를 일이었다.
“고문주, 제가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상대는 그들과 대척점에 서 있는 오대산검의 장문이었으나, 현진은 지인을 만난 듯 반가워했다. 인경의 떨떠름한 표정도 개의치 않았다. 만약 운선이 위험에 처했다면, 머뭇거리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누군지는 알지만, 이야기를 나눌 생각은 없습니다.”
인경은 매몰차게 몸을 돌렸다. 운선에게는 악감정이 없었으나 태을신교는 달랐다. 그들은 아버지를, 백부를, 태사부를, 그리고 고대산파를 무너뜨렸다. 그 사실을 잊는다면 자신은 짐승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럼 딱 하나만 묻겠습니다. 운선이를 보았습니까?”
“…….”
현진의 물음에는 짙은 근심이 담겨 있었다. 절대로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물기 가득한 여인의 목소리를 무시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의 심성이 너무 착한 탓이었다.
“제발 부탁합니다.”
“주운 낭자를 구하러 황석산에 돌아갔습니다. 제가 아는 건 딱 거기까지입니다.”
기실 운선의 상황이 걱정되는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현진이 너무 간절하게 부탁하는 바람에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단지 거기까지였다. 인경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다시는 운평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고 싶지 않았다.
“문주님…….”
영준은 이제 더 우길 수 없었다. 가은과의 인연은 아쉽지만, 그 안타까움이 장문을 버려둘 만큼은 아니었다. 마음이 다쳤을 그의 친우를 위로하기 위해 서둘러 뒤를 따랐다.
“고맙습니다.”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현진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주운이 한 글자씩 짚으며 읽자, 과연 무공 비급이 맞는 듯했다. 월심을 들어 한 초식을 시연해보니, 과거 부능파가 보여주었던 비월검법의 일부 초식과 똑 닮아 있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이 대단한 무공을 보다니 재미있구나.”
워낙에 무학에 조예가 깊은 주운은 잠시나마 통증도 잊었다. 비월검은 능력만 된다면 당장이라도 배우고 싶을 만큼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 몸으로는 불가능하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주운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무공을 익히기는커녕 당장 이 외진 공간에서 빠져나가는 일도 요원했다. 게다가 자신 때문에 운선도 죽게 생겼으니 죄책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주운,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는 곧 이곳을 나갈 겁니다. 무공 비급이 여기 적혀있다는 걸 몰랐던 것처럼, 눈앞에 출구를 두고 못 찾는 건지도 모르잖아요. 게다가 이쪽으로 들어왔다면 반드시 나가는 법도 있을 테지요.”
“그래. 네 말이 옳다.”
주운은 끝까지 자신을 위로하려는 운선의 배려에 가슴이 뭉클했다. 그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자신으로서는 그리 나쁘지 않은 죽음이었다. 당장 숨이 끊어져도 사랑하는 이와 함께라면 그리 억울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황석파의 무공은 진실로 대단하구나.”
못내 아쉬워하는 주운을 바라보며, 운선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제가 틈틈이 외워두겠습니다. 여기를 나가거든 같이 연구해 봐요.”
“반드시 이겨낼 테니, 우리 꼭 같이 나가자.”
그러나 해가 저물어가면서 주운의 상태는 급격히 나빠졌다. 까무러치고 깨기를 수차례, 이제는 물만 마셔도 구역질을 했다. 운선은 아는 지식을 총동원하여 주운의 혈 자리에 침을 놓았으나 잠깐 정신이 맑아졌을 뿐, 호전되지 않았다.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
주운이 무려 여섯 번째 혼절했을 때, 운선은 입고 있던 홑저고리까지 벗어 그녀를 덮어주었다. 그리고 미친 사람처럼 아무 곳이나 흙을 파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박힌 돌에 손톱이 들리고, 피부가 찢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이곳을 나가겠다는 일념만이 가득했다.
가을이 성큼 다가왔는지 밤공기가 제법 쌀쌀했다. 그러나 쉬지 않고 땅을 파는 운선의 몸에는 굵은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나마 기력을 잃지 않는 이유는 미세하게 들려오는 연인의 숨소리 덕분이었다.
“하아…….”
얼마나 깊이, 오래 팠을까? 그러나 결국 탈출구는 없었다. 이제 땀방울은 등이 아니라 그의 눈에서 쏟아졌다. 후회와 억울함, 그리고 오만했던 자신에 대한 분노가 눈물에 섞여 쉴 새 없이 흘렀다.
“……?”
그때였다. 적막한 가운데 들리던 주운의 숨소리에 뭔가 다른 호흡이 느껴졌다. 처음엔 정신이 들어 숨이 가빠졌나 했으나 자세히 들으니 호흡이 하나가 아니었다.
“누구냐?”
운선은 재빨리 월심을 집어 들었다. 이곳에 올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고유생밖에 없을 터. 혹여 아니더라도 결코 아군은 아닐 것이었다.
“운선아.”
“어?”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 탈진해서 환청을 들었을까?
“운선아, 혹시 거기 있니?”
“아……, 아…….”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는 순간, 하마터면 운선은 비명을 지를 뻔하였다. 그것은 살 수 있다는 기쁨, 그리고 주운을 구할 수 있다는 안도의 외침이었다.
“사저, 사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다름 아닌 현진이었다. 동굴에 갇힌 지, 꼬박 이틀이 지난 새벽이었다.
*** 마부작침(磨斧作針):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