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85화 (85/209)

#85화. 測水深昧人心(측수심매인심)

도 마찬가지였다. 경전의 행방을 알기 위해 서둘러 객잔으로 온 것은 맞지만 그 실체를 바로 만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한 탓이었다.

“설마……?”

그때 어떤 생각이 소정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고인경과 강운선의 관계, 용가현의 피습 그리고 해심밀경소. 찬찬히 고개를 돌려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서 있는 가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이서문을 향하는 순간, 비로소 비었던 그림 조각이 맞춰졌다.

“참으로 소름 끼치는 연기력이군요. 하마터면 감쪽같이 속을 뻔하였습니다.”

“뭐?”

소정의 태세 전환에 서문은 어이가 없어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다 알았다는 듯 의기양양한 꼴을 보니 짜증부터 솟구쳤다.

“안 그래도 강운선이 왜 갑자기 나타나 설치는가 의아했습니다. 이 미끼 하나 덜렁 던져두면 우리 오대산검이 피 튀기는 전쟁이라도 할 줄 알았나 봅니다. 그것이 용형제에게는 먹혔을지 몰라도 저는 어림없지요.”

서문을 노려보는 눈길은 곧바로 가은에게로 향했다. 이미 모든 정황을 파악한 이상 이 요망한 계집을 그대로 놔둘 수는 없다는 취지였다.

“누구의 사주를 받았느냐?”

“네?”

소정의 가시 돋친 말투에 가은은 더럭 겁이 났다. 화살이 방향을 바꿔 돌아오자 한없이 친절했던 영인과 사매들이 그녀에게서 한 발자국씩 물러섰다. 기껏해야 의심 정도로 끝날 줄 알았거늘 졸지에 마교의 끄나풀로 오해받으니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아닙니다. 문주님, 저는 그저 떨어져 있는 것을 주웠을 뿐인데 어찌 저를 오해하십니까?”

“흥! 너는 고인경이 이 객잔에 묵고 있다 어쩐다, 거짓을 지껄여 나를 이곳까지 오도록 했다. 아주 기가 막힌 때에 이 종이 쪼가리를 눈앞에 흔드는데 이게 다 우연이란 말이냐?”

가은은 숨이 턱턱 막혀왔다. 그러고 보니 응당 있어야 할 인경과 영준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오늘 밤까지는 반드시 이곳에 머물겠다고 했는데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까? 도대체 어쩌다 이런 지경에 처했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기가 막혔다.

“어쩐지 촌부의 여식이라기에는 과한 면이 있었다. 작정하고 본파에 잠입한 게로구나. 너는 태을신교의 첩자냐? 저 이서문이 뭘 계획한 것이냐?”

듣고 있던 이서문은 말 같지도 않은 심문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뜬금없이 어린 제자 하나를 몰아붙여 태을신교의 음모로 몰아가는 건 무슨 경우인가?

“소소정, 당신은 정말 구제 불능이군. 우리가 고작 어린애를 앞세워 눈속임하리라 생각했는가? 그 정도 얕은수에 당할 내가 아니니 엄한 데 애쓰지 말아라.”

서문까지 끼어들어 가은을 거론하자 점점 수습할 수 없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가은은 이러다가 진정 자신이 첩자로 몰려 내쳐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것만큼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분명 이곳에서 고인경이 강운선을 만났다 했습니다. 두 사람이 뭔가 주고받았다면 이 책이 거래 조건이 되지 않았을까요? 고인경은 적어도 오늘 밤까지는 묵을 작정이라 했습니다. 마침 용대협이 도착했고 두 사람이 시비가 붙었을 때 저 마두가 수작을 부린 게 아니겠습니까? 저는 오히려 그들에게 이용당한 것이니 부디 의심을 거두어 주세요.”

눈물을 뚝뚝 떨구는 가은의 모습은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처음에는 경계했던 문파의 제자들도 점점 그녀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그러나 소정의 엄한 표정은 풀어질 줄 몰랐다.

“흥! 고작 어린애인 너에게 고대산파의 장문이 좌지우지되었을 리가 없지. 너의 임무는 본파를 이곳까지 유인하는 것, 또한 적절한 때에 이 종이 쪼가리를 눈앞에 흔들어 오대산검을 이간질하려는 것일 터!”

서문을 겨누고 있던 천천검이 서서히 방향을 바꿔 가은의 목덜미를 노렸다. 눈 한 번 떴다 감을 시간이면 그녀의 목은 몸뚱이에서 떨어져 나갈지도 몰랐다.

“하하하.”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이서문이 갑자기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일순간 분위기가 달라지자 모두 황망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소문주, 당신이야말로 당장 업을 바꿔도 좋을 만큼 연기력이 출중하군요. 아아, 내가 졌습니다. 그럼 태을신교가 저지른 일로 합시다. 당신 말마따나 두 문파를 유인하여 차례로 도륙하려 했다. 오직 나 혼자서 말입니다.”

“이……, 이…….”

아차다 싶은 마음에 소정은 서문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으나 이미 늦고 말았다. 그는 상대가 그러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이죽거렸다.

“용송현은 우리 태을신교의 건곤사자 묵안을 죽인 원흉이지요. 또한, 당신은 내 사매 현진을 더러운 수법으로 해하려 하지 않았습니까? 저에게는 이보다 더한 동기는 없지요. 오대산검이야 해심밀경소에 혈안이 되었으니 표지 하나 달랑 던져두어도 칼춤을 출 게 아닙니까? 그게 주요하여 우리 용대협이 유명을 달리했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지요. 자 이제 계획대로 선자님들의 목을 떼어 가도 되겠습니까? 오직 저 혼자서 말입니다.”

“닥쳐라!”

소소정은 더는 참지 못하고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아까와 같은 초식이었으나 더 매섭고 인정이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상대를 죽이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 위대한 이서문을 이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

서문은 한쪽 입술을 삐쭉 올리더니 몸을 왼쪽으로 비틀어 검풍을 피했다. 천천검이 허공을 찌르는 사이 그의 부채는 이미 소정의 풍부혈을 향해 내리꽂혔다.

“아차!”

애초에 빈틈이 너무 많은 공격이었다. 흥분한 나머지 방어 자세를 전혀 갖추지 못하였으니 미처 피할 수도 없었다. 소정은 어쩔 수 없이 남은 공력을 끌어올려 뒤통수를 보호했다. 그나마 치명상을 막는 최선이었다.

퍽!

“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소정의 몸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다행히 기절하지는 않았으나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뒷골이 당기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문주님!”

선자들은 모두 그들의 장문을 둘러싸고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선뜻 다가가지 못한 가은만 멀뚱히 서 있는 꼴이 되었다. 그녀는 이 모든 사달이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아 몸이 덜덜 떨렸다. 난생처음 느껴본 공포였다.

“슬슬 재미가 없어졌으니 이만 퇴장하겠습니다.”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서문은 벌써 자취를 감춘 다음이었다. 그곳에 있던 사람 대부분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마교도의 만행이 괘씸했지만, 한편으로는 죽음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문주님, 괜찮으십니까?”

영인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소정은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머리가 지끈거렸으나 큰 부상은 아닌 듯싶었다.

“가은아.”

“네?”

그녀는 몸을 일으키자마자 저쪽에서 몸 둘 바 모르고 있는 가은을 불렀다. 영인을 비롯한 제자들은 아까의 상황을 지켜보았기에 차마 어떤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안타깝지만 혹여 당장 파문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마땅한 처사라 생각했다.

“가은아, 진정 그를 만난 적이 있더냐?”

“절대 아닙니다. 절대! 문주님을 다치게 한 저 돼먹지 못한 놈을 어찌 알겠습니까? 저는, 저는…….”

가은은 바닥에 풀썩 엎어졌다. 끝내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는 모습이 퍽 애처로웠다.

“안다. 네가 첩자가 아니라는 것쯤은.”

“네?”

응당 불호령이 떨어질 줄 알았건만, 장문이 건넨 뜻밖의 말에 제자들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 방금까지도 눈을 부라리며 몰아붙이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었다. 오히려 세상 자애로운 눈으로 제자가 다치지는 않았는지 살피는 것이었다.

“나설 때를 가려야 한다는 말이 이 뜻이었다. 앞으로는 명심해라.”

“네? 아, 네.”

몇 마디 위로의 말을 더 건넨 소정은 명을 내려 객잔 안의 상황을 정리했다. 상처를 입은 용문파의 도사들을 침상에 눕히고 약을 먹이는 한편, 용송현의 시신도 잘 덮어두었다.

‘가은을 움직인 사람은 필경 장은일 것이다. 본파의 입문을 조건으로 거래한 것이겠지. 마교와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구실을 만들 모양인데, 그렇다고 용송현까지 죽여야 했을까? 단지 태을신교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함으로 보기에는 꺼림칙한 부분이 있다.’

그녀는 가은이 나서는 순간에 이미 장은의 음모를 눈치챘다. 그들이 몰래 접선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언제쯤 그 본색을 드러내나 주시하고 있던 차였다. 어차피 태을신교를 몰아내는 데에는 장은과 뜻이 같았다. 그의 덫이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가은을 첩자처럼 몰아 협조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용가현 살인의 이면에는 어쩐지 더 큰 내막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아 영 찝찝했다. 게다가 또 다른 수수께끼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였다.

‘가은이 고인경에 대해 말한 부분은 진실일 테지. 그렇다면 그는 운선과 만나 무슨 대화를 나눈 것일까?’

유난히 후텁지근했던 늦여름 새벽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객잔을 빠져나온 서문은 무엇이 못마땅한지 계속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신을, 태을신교를 옭아매기 위한 덫이라는 사실은 진작에 눈치챘으나 소소정이라면 저리 뻔한 수에 놀아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 더러운 음모의 설계자와 그녀가 한패이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그 아이…….’

차마 내색하지는 못했으나 자꾸 눈길이 가는 소녀의 모습이 내내 아른거렸다. 어쩐지 낯설지 않은 느낌이, 꼭 만나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 제가 그냥 가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검은 소나무숲 사이로 야리야리한 여인의 인영이 쑥 나타났다. 혹여 사형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싶어 먼저 가지 못하고 다시 돌아온 현진이었다.

“어차피 의심을 피할 수 없는데 뭣 하러 애를 써 마음만 상하십니까?”

“허허, 그러게 말이다.”

서문은 사매의 질책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온갖 약은 척은 다 하면서 매번 쓸데없는 오지랖을 떨어 일을 그르치는 자신이 퍽 우스웠다.

“그래, 고문주는 만났느냐?”

“예, 다행히 객잔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곧 만났습니다. 운선은 역시 예상대로 황석파에 있는 것 같아요.”

대강의 상황을 들은 서문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저래 심란한 밤이었다.

“운선이 있는 곳을 알았으니 더는 시간 낭비 말고 구하러 가자꾸나.”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서문이 중얼거렸다. 벌써 인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동이 트기 전에 움직이면 좋았을 걸, 괜한 고집을 부린 것이 영 후회가 되었다.

“아닙니다. 오대산검이 태을신교와 전면전을 벌일 생각인 걸 확인했으니 이곳에 남은 성과가 있었습니다.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이제 사형은 사부님께 사실을 알리러 가십시오. 운선은 저 혼자 구하러 가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현진의 말이 백번 옳았다. 두 사람 다 황석산에 올라 위험을 자초할 이유는 없었다. 한쪽은 형제를 구하고 한쪽은 스승에게 위험을 알리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었다. 게다가 경공에 있어서는 사형제 중 그녀가 가장 뛰어났다. 성곤이 미리 알려준 황석파의 비밀 통로를 가장 빠삭하게 아는 이도 현진이었다. 다만,

“그곳에는 고수가 많다. 혹여 마주치면 위험하지 않겠느냐?”

유달리 현진을 아끼는 서문은 그녀를 혼자 보내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천서국의 고수들에게 입은 내상이 아직 다 낫지 않은 점도 걱정스러웠다.

“제가 그리 안 미더우십니까? 안타깝게도 몸을 감추고 도망치는 건 사형보다 훨씬 대단하니 걱정하지 마세요.”

재차 서문을 안심시킨 현진은 서둘러 황석산으로 몸을 돌렸다. 더 지체했다가는 운선의 목숨이 위험할지 몰랐다.

“아, 그리고 사형.”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 직전, 현진이 불현듯 서문을 불러세웠다. 꽤 망설였으나 기어코 말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 아이 말입니다. 소소정의 곁에 있던.”

“……?”

서문은 순간 가슴이 섬뜩하였다. 어쩐지 계속 마음에 걸리던 무언가가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가은입니다. 마사형의 아이. 네, 운평 산자락에 사는 노부부에게 맡겼던 그 은이가 맞습니다. 제가 병석에 누워있는 동안 집을 나온 듯합니다. 그간의 사정은 알 수 없으나 결국 제 핏줄을 찾아간 모양이군요.”

“아…….”

서문은 나직이 탄식을 뱉어냈다. 자신도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 가슴 속을 헤집어 놓아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제 그 아이의 운명은 우리의 손을 떠났습니다. 부디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기를 바랄 수밖에요.”

잠시 슬픈 표정으로 서 있던 현진은 곧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 마음을 아는지 밤 산새의 구슬픈 울음이 고요한 숲속에 울려 퍼졌다.

*** 측수심매인심(測水深昧人心):

물속 깊이는 알아도 사람의 마음속은 모른다는 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