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84화 (84/209)

#84화. 竊鈇之疑(절부지의)

“도대체 이게 무슨…….”

보현은 떨리는 손을 내밀어 눈앞에 마주한 사내의 몸을 살짝 흔들어 보았다. 빳빳하게 굳은 몸,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 한눈에 보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용문파의 부장문 용송현이었다.

소정은 서둘러 그의 목덜미의 맥을 짚었다. 예상대로 맥이 조금도 잡히지 않았다. 주변에 싸움의 흔적이 없고 피도 시체 아래 고인 게 전부였다. 상처 역시 가슴에 있는 구멍 하나인 것으로 보아 아마도 혈이 찍힌 다음 숨이 끊어진 것 같았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당했으리라. 얼마나 억울했는지 그는 눈도 감지 못한 채였다.

기괴한 장면은 용송현 뿐만이 아니었다. 더 기가 막힌 쪽은 그 뒤쪽이었다. 서른 명가량의 도사들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는데 어느 한 명도 의식이 없었다. 시커먼 낯빛으로 보아 중독된 것이 분명했다.

“중독된 틈을 타 용송현을 죽였다?”

혼란스러워하는 제자들 사이에서 소소정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필경 상대는 무공이 뛰어난 자였다. 용송현을 제압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입증된 사실이었다. 그런데 왜 다른 이들은 살려 두었을까? 여기에서 생각이 꽉 막혀 버리자 머리가 살살 아파 왔다.

“우선 혈을 풀어주어라.”

보현의 지시로 제자들은 재빨리 도사들의 혈을 눌렀다. 미지의 적에게 대응하려면 정보가 생명이었다. 이들 중 누구라도 증언해주면 일이 쉽게 풀릴 터였다. 눈앞에서 스승의 죽음을 보았으니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어?”

“어? 문주님, 혈도가 풀리지 않습니다.”

“뭐라?”

몇몇 수하와 주변을 살피고 있을 때, 소정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봉착했다. 그녀는 서둘러 영인의 곁으로 돌아가 도사 한 명의 가슴을 빠르게 세 번 찍었다.

“이럴 수가…….”

수차례 시도했으나 마찬가지였다. 되레 혈을 누를수록 고통이 심해지는지 도사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점혈에 있어서만큼은 자신 있었기에 소정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기를 거꾸로 운용하는 무공이라면 설명이 된다. 그 가설이 맞는다면 범인은…….’

제자들의 연이은 물음에도 소소정은 묵묵부답이었다. 애써 대열을 지키던 진도 어느새 무너져 버렸다. 당황한 선자들은 안절부절못하며 주변만 둘러볼 뿐이었다. 언제 적에게 포위당할지 모르는 상황이라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 그렇다고 이대로 용문파의 제자들을 버려두고 나가자니 퍽 비겁해 보였다. 그야말로 진퇴양난(進退兩難)이었다.

퍽!

“우욱!”

그때, 돌멩이 하나가 날아오더니 소정의 앞에 앉은 이의 신주혈에 정확히 꽂혔다. 그와 동시에 혈이 풀린 도사는 등을 잔뜩 수그린 채 구역질을 시작했다. 중독된 채 오랫동안 몸이 경직되어 있던 터라, 위가 뒤집힌 탓이었다.

퍽! 퍽! 퍽!

놀라기도 잠시, 다시 연이어 십수 개의 돌멩이가 날아왔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도사들의 혈도를 뚫어주기 위함이었다.

“우욱!”

객잔 안은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다시 독이 발작한 도사들은 당장이라도 까무러칠 듯 고통스러워했다. 그러나 선운검파 중 누구도 선뜻 나서 돕지 못했다. 그들도 당장 기습을 당할까 무섭기는 마찬가지였다.

“…….”

소소정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는 이미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다만 먼저 아는 체하고 싶지 않았다. 온갖 감정들이 치받쳐 올라와 가슴 속을 헤집어 놓았다. 지금 느끼는 이 모멸감이 분노인지 부끄러움인지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소문주,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맑고 청량한 목소리와 함께 위층에서 웬 서생 하나가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한껏 여유롭게 움직이는 그는 마치 마실 나온 사람처럼 명랑해 보였다.

“이서문……!”

소정의 꽉 다문 입술 사이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역시 이런 기괴한 점혈 수법을 가진 이는 세상에 오직 그가 유일했다. 또한, 무공으로는 강호에서 감히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용송현을 죽일 수 있는 살수로도 부족함이 없었다.

“불속지객이 나타나 심기가 상하셨을까요? 그렇다면 미리 용서를 구하겠습니다. 허나, 이번에는 결례를 무릅쓰고 해명해야 할 듯하여 문주님을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그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나자,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렸다. 이서문이 누구인가? 항렬이 높은 선자들은 수년 전 만났던 그를 똑똑히 기억했다. 매월 신양선을 제압하고 살인귀 적우를 수족처럼 다루던 태을신교의 마두. 그가 나타났으니 이곳에서 쉬이 살아나가기란 다 틀린 일 같았다.

“용형제를 살해하고도 어찌 그리 뻔뻔한 겁니까?”

부들부들 떠는 소정과 달리, 서문은 연신 빙글빙글 웃으며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그의 부채 속 산수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넘실거렸다.

“믿을지 모르겠으나 내가 죽인 게 아닙니다.”

“허!”

소정은 코웃음을 치며 재빨리 천천검을 뽑아 들었다. 애초에 저 백여우와 말을 섞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인제 보니 퍽 비겁하군요. 마교의 도적에게도 티끌만 한 양심은 있으리라 생각한 내가 한심할 뿐입니다.”

“허허, 참. 믿지 않으니 어찌한다?”

서문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양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진심으로 억울해하는 모습이었다.

“용문파 형제들을 보호해라.”

소정의 명이 떨어지자 그제야 선자들은 대열을 갖추기 시작했다. 도사들을 감싸고 다시금 진을 만드니, 그 사이를 뚫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장로급의 항렬인 보현과 기정만이 장문의 뒤에 서서 엄호했다. 언제라도 적이 공격하면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함이었다.

“소문주, 비록 연이 끊어졌으나 서로 대화를 나눌 정도의 친분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리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박대하시니 썩 불쾌하군요.”

“허튼소리 그만하고 공격하시오.”

도무지 상대와 말이 통하지 않자 서문은 슬슬 감정이 상했다. 기실 그가 지나치지 않고 이곳에 남아 선운검파를 기다린 이유는 지난 인연도 한몫하였다. 비록 두타산의 무림대회에서 실망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진건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진대, 이야기도 들어보지 않고 죄를 덮어씌우니 부아가 치밀어 오를 수밖에.

“꼭 이렇게 서로 낯을 붉혀야겠습니까?”

쉬익!

서문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이었다. 소정의 천천검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왔다. 무려 수 장의 거리를 한달음에 지나쳐 그의 인중 바로 앞까지 도달한 것이었다.

“흥!”

검을 미처 피할 여유가 없었던 서문은 고개만 오른쪽으로 돌렸다. 날카로운 검신이 스치고 지나가자 금세 그의 하얀 뺨에 붉은 핏방울이 맺혔다. 하마터면 코가 숭덩 잘려 나갈 뻔한 매서운 초식이었다.

“그날로부터 이십여 년이 다 되었으나 이제야 본모습을 알게 되는군.”

측수심매인심(測水深昧人心)이라는 말이 하나 틀리지 않았다. 현진에게 고독이 묻은 암기를 날렸던 일이 결코 실수가 아니었음을 이제야 확신했다. 그가 알던 소녀 시절의 소정은 철저하게 가면을 쓴 모습이었다.

“낙화유수(落花流水)”

천천검의 얇은 검신이 마치 회오리처럼 소정의 팔을 휘감았다. 다음 순간 몸을 비틀며 팔을 뻗자, 검은 다시 반대 방향으로 돌아 나가며 수십 개의 요혈을 공격했다. 미끄러지듯 파고드는 보법에 맞춰 자유자재로 검광을 발산하는 모습이 흡사 떨어지는 꽃잎 같았다.

그러나 서문은 찔러오는 검 끝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부채를 왼손으로 바꿔 들더니 오른손을 앞으로 쭉 펼쳤다. 맨손이 분명했는데 곧이어 하얀 연기가 손가락 사이로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화지(火指)”

검과 손바닥이 부딪치는 순간, 작은 불꽃이 튀어 올랐다. 날카로운 검과 연한 손바닥이 마주쳤으니 피가 솟구쳐야 정상이건만, 둔탁한 격음만이 수차례 울렸다.

“이런!”

소정은 모든 공격이 상대의 손바닥에 막히자 몹시 초조해졌다. 대체로 그의 약점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못 본 사이에 한 단계 높은 경지에 올라선 모양이었다. 무기력감이 분노를 지배하는 순간이었다.

“소문주, 더 싸울 생각입니까?”

반면 서문은 싸울수록 후회가 막급이었다. 어차피 진지하게 임할 의도가 없었으니 적당히 져주면 될 일이었다. 매 초식 악랄하게 자신의 약한 혈만 노리는 소정에게 화가 나 쓸데없는 공력을 낭비한 셈이었다. 한 명은 모르겠으나 이대로 서너 명을 더 상대한다면 위기에 몰릴 터였다.

휙!

서문은 어쩔 수 없이 철편을 꺼내 들었다. 눈에 살기가 번뜩이는 소정의 초식을 유려하게 피하더니 재빨리 등을 타고 넘어갔다. 위치를 놓친 상대가 당황하는 순간, 살포시 손목에 찍어 눌렀다. 거리를 벌리기 위한 임기응변이었다.

“아!”

소정은 손목이 저릿하여 차마 다음 공격을 이어가지 못하고 뒤로 한 장 남짓 물러섰다. 다행히 가벼운 상처만 남겼을 뿐,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믿거나 말거나, 마음대로 하십시오. 점혈은 내가 맞지만 용대협을 살해한 이는 다른 사람입니다. 이들이 중독되었기에 독이 퍼지는 걸 막으려 혈을 눌렀을 뿐, 절대로 죽이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서문은 또다시 달려들까 싶어 서둘러 말을 뱉었다. 믿어주든 아니든 그것은 상대의 몫이지만 이대로 추잡한 누명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자신이 뒤집어쓸 수밖에 없는 정황이었기에 이 모든 것이 태을신교를 겨냥한 음모라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거……, 거짓입니다.”

그때, 언제 나타났는지 도사 하나가 소정의 뒤에 숨어서 소리를 질렀다. 겁에 질린 얼굴로 연신 몸을 떨며 더듬더듬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용사백을 살해하고 사형제들을 중독시킨 범인은 저 마두가 분명합니다. 소문주 제발 속지 마십시오.”

억울함 때문인지, 공포 때문인지 그의 눈에는 굵은 눈물이 가득 맺혔다. 비록 적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으나 자신이 목격한 사실에 대한 강한 확신을 보였다.

“하아, 저자가 과연 용문파의 제자가 맞기는 한 겁니까? 저는 불과 반 시진 전에 객잔에 도착했는데 어찌 음식에 독을 타고 용대협을 죽일 수 있었겠습니까? 오히려 독이 퍼질까 저어하여 혈을 막아두지 않았습니까?”

“이 더러운 마귀야! 네놈의 하얀 옷자락과 저 음란한 부채를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도사는 이판사판이라고 생각했는지 눈을 질끈 감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이대로 몇 마디 더 주고받으면 억울해서 아예 뒤로 넘어갈 것 같았다.

“문주님, 진정하시고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저를 높이 평가하시니 영광이긴 합니다만, 제가 어찌 상처 하나 없이 용대협을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심지어 그의 대도(大刀)는 저의 부채와 상극입니다. 진정 부채를 보았다면 결코 제 손에 이리 멀쩡하게 존재하지 못할 테지요.”

소정이 듣기에도 설득력이 있었다. 물론 이서문이 실력으로 우위에 있기는 하지만 용송현이 그리 쉽게 당할 인물이 아니었다. 아까는 흥분하여 앞뒤 가리지 않고 덤볐으나 찬찬히 생각해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또한, 그럴 이유도 없습니다. 태을신교와 용문파의 관계를 안다면 설명하지 않아도 아실 테지요. 용대협과는 개인적 원한도 없으니 제가 노망이 나지 않고서야 이런 짓을 벌이겠습니까?”

“아…, 저기…….”

그때였다. 여태 영인의 뒤에 숨어 있던 가은이 쭈뼛쭈뼛 앞으로 나왔다. 조금 긴장한 것 같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두려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등장한 터라 모두 어안이 벙벙하였다. 소정조차도 차마 나서지 말라 말리지 못할 정도였다.

“제가 여기 막 도착하여 주운 물건이 있어서요. 도사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허투루 넘길 물건은 아닌 듯싶어…….”

자신에게 몰린 시선을 한껏 즐기며 가은은 소정의 바로 앞까지 나아갔다. 적당한 표정을 연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최대한 순진하고 해맑은 태도여야 의심을 받지 않을 테니까.

“아아, 이것은…….”

가은의 손에 들린 물건은 단면이 거칠게 찢긴 책의 표지였다. 그 표지에 적힌 제목을 보자마자 모두의 낯 색이 확연하게 달라졌다. 특히 서문의 얼굴은 그야말로 성난 야수가 따로 없었다. 오직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라고 쓰인 표지를 들고 있는 가은만이 난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었다.

*** 절부지의(竊鈇之疑):

의심을 가지고 보면 무슨 일이든지 의심스럽게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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