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83화 (83/209)

#83화. 翻弄(번롱)

선운검파가 황석산을 떠난 때는 이른 아침이었다. 여름이 다 지나가지 않았기에 한낮은 걷기 힘든 탓도 있었고, 두타공파와 용문파가 새벽녘에 먼저 출발하는 바람에 더 머물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백대협이 사라졌으니 두타공파는 그렇다 쳐도, 어째서 용문파까지 일찍 가버린 걸까요?”

황석산을 다 내려오고 나서야 사매 보현이 소정에게 은밀히 물었다.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고 떠나버린 그들에게 감정이 상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고대산파와의 일이 마음에 걸린 듯하구나. 자신이 의심하여 오대산검의 결의가 깨졌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용송현은 우락부락하게 생긴 것과 다르게 퍽 섬세한 성격이었다. 흥분을 잘하는 탓에 성급하게 판단하는 면이 있었으나 의롭고 정이 많았다. 고인경이 옷자락을 끊고 가버린 이유가 온전히 자신 때문이라며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문주님, 오대산검에서 고대산파가 빠진다 해서 뭐 그리 타격이 있겠습니까? 그곳은 이제 백 살을 바라보는 원로와 스물 안팎의 제자 몇이 남아 명맥만 유지하는 상황 아닙니까? 막말로, 전투가 벌어져도 전력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요.”

그러나 예상과 달리, 장문은 엄한 표정으로 그녀를 크게 꾸중하였다.

“어찌 그리 식견이 짧은 게냐? 고대산파는 오대산검의 상징과도 같다. 우리 선운검파의 사조님의 뿌리가 고대산이거늘, 뿌리 없는 나무가 어찌 뻗어 나갈 수 있단 말이냐? 오대산검의 뿌리가 바로 고대산파이니라.”

“아아,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보현의 사죄에도 소정의 굳은 얼굴은 풀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상대에 대한 못마땅함이 아니었다.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질책이었다. 고인경을 마주하는 내내 그녀는 고근동에 대한 죄책감을 지울 수 없었다. 새파랗게 어린 후배였건만, 대놓고 꾸짖지 못했던 이유 또한 같았다.

‘그때 모른 체했던 건, 오직 본파를 살리기 위함이었다. 허나 작금에 와서는 우리 또한 사정이 다르지 않으니 그 마음을 이제야 알겠구나.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지난 몇 년간, 재정의 악화로 인해 선운검파의 위명은 날로 떨어졌다. 장문 소금정이 죽은 후에서야 그녀가 숨겨둔 부채를 알게 된 소정은 허리를 졸라매며 문파의 살림을 줄여나갔다. 그리고 그 결과 고작 백여 명의 제자만이 남은 것이었다. 규모로 따지면 일개 소규모 문파에도 미치지 못했다.

하여, 그녀에게는 강운선의 등장이 누구보다도 반가웠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경전의 비밀.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최강의 무공 비급이라는 소문은 그저 표면적 이유에 불과했다. 선운검파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경전이 꼭 필요했다.

‘용가 형제는 묵안(조상원의 별호)에게 속아 그 경전이 무엇인지 모를 테지. 그들은 그저 순수하게 태을신교를 타도하고자 하는 목적이 전부일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간단했다. 용송현의 마음속에 있는 분노의 불씨를 댕겨 강운선을 잡는다. 그 과정에서 자신은 한발 물러서 있다가 경전만 갈취할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떠난 용문파의 무리를 따라잡아야 했다.

“곧 날이 저물 듯합니다. 늦더라도 하루는 해금 객잔에서 머무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음 마을까지 멀기도 하거니와 식량도 확보하고 여독도 풀어야 합니다.”

어느새 저녁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영인의 제안은 누가 보아도 퍽 합리적이었으나 마음이 급한 소소정은 못마땅하기만 했다.

“아직 해가 있으니 그다음 객잔에서 쉬어도 된다.”

평온한 얼굴이었으나 그녀의 말투에는 짜증이 잔뜩 배어 나왔다. 이쯤에서 눈치를 채고 물러나면 좋으련만, 영인은 동기들의 불만을 모른 체할 수 없었다.

“허나, 사부님. 이다음 객잔은 두 시진이나 더 가야 나오는 데다 그나마도 낡고 규모가 작아 지내기에 불편합니다. 차라리 제대로 쉬고 일찍 출발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영인의 말이 맞습니다. 앞으로 노숙을 얼마나 해야 할지 모르는데 하루라도 편히 쉬지요.”

보다 못한 보현까지 나서 편을 들자 소정은 역시 더는 고집을 부리기 어려웠다. 떨떠름하게 허락을 하고 돌아서서는 쓴웃음을 삼켰다.

‘아무리 철이 없기로서니, 사부의 마음조차 읽지 못하는구나. 여비도 넉넉하지 않은데 하산하고 하루도 못 되어 객잔을 잡다니. 선운검파의 앞날이 캄캄하다.’

해금 객잔으로 들어가는 대로는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화려했다. 볼거리에 눈이 팔린 제자들을 뒤따르며 소정은 착잡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선운검파의 장문으로서 이 난관을 어찌 헤쳐 나아갈지 난감하기만 했다.

“문주님.”

그때 소곤거리는 앳된 목소리가 소정의 귀를 간지럽혔다. 은밀하게 다가와 말을 거는 이는 다름 아닌 가은이었다.

“어째서 사매들과 구경하지 않고 이리 왔느냐?”

“저는 저런 것에 관심 없어요. 다만, 말씀드릴 일이 있어 부러 문주님 곁으로 온 것입니다.”

소정은 어쩐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으나 또한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평소 같았다면 까마득한 항렬의 제자가 감히 다가오는 걸 막았겠지만 이번에는 예외를 두기로 했다.

“해금 객잔에 마교의 소마두와 똑같은 외모의 사내가 머물렀다 합니다.”

“뭐? 어째서 그곳에?”

심드렁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소정의 눈이 순식간에 휘둥그레졌다. 이게 사실이라면 그녀에게는 다시없는 기회였다.

“이틀 전 새벽, 고대산파의 문주와 두타공파의 백대협이 밤새 술을 마셨다지요? 뭐 두 사람이 동석한 일이야 그럴 수도 있다 치지요. 그런데 백대협이 고주망태가 되어 쓰러진 후, 의문의 남자가 고문주와 사담을 나눈 정황이 있다지 뭡니까? 운평에는 전혀 연고가 없는 고문주인데 그리 친밀하게 대화를 나눌 상대가 누가 있을까요? 하여 그이의 인상착의를 물어봤더니 일전에 본 강 뭐시기와 똑같더란 말입니다.”

뒤이어 가은이 전하는 남자의 외모는 그야말로 운선과 일치했다. 영 허언은 아닌 듯싶어 믿음이 갔다.

‘만약 사실이라면 고인경을 따라잡아 운선의 행방을 캐낼 수 있지 않을까? 이유가 어찌 됐든 둘 관계가 심상치 않은 것은 분명하니…….’

소정은 드디어 경전에 한 발 다가섰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다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너는 어찌 안 것이냐?”

“음 그것은…….”

가은은 누가 들을까 두려운 듯,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다른 제자들은 장터 구경에 정신이 없었다. 확인을 마친 뒤에야, 소정의 귀에 대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제 가치가 무엇이냐 묻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재주가 있지요. 고문주에게 신세를 질 때, 그의 사제와 친밀한 관계를 쌓아두었는데 이처럼 요긴하게 쓰일 줄 몰랐답니다.”

문득 그녀가 황석산에 올라오게 된 경위가 떠올랐다. 장은의 도움이 있기 전에, 고인경의 선의가 있었음을 이미 실토하였으므로 금세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그럼 고문주는 어디로 갔느냐?”

“아직 해금 객잔에 있다 하니, 가면 바로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소정의 밝아진 낯빛을 확인한 가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녀는 하산하는 내내 소정의 눈치를 살폈다. 장은을 앞세워 선운검파에 입문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 이후부터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대놓고 자신을 의심하는 기색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미 가득 찬 의심을 덜어낼 수는 없다. 허면, 나의 쓰임새를 더욱 부각할 수밖에.’

그때 기막힌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내색은 안 했지만, 정파의 사람들은 대부분 고인경이 못 미더운 눈치였다. 전후 사정을 전혀 모르는 자신이 봐도 강운선과 고인경의 사이가 심상치 않았다. 그렇다면 그를 이용해 소소정이 가장 바라는 것을 취할 수 있지 않을까?

그다음부터는 다소 노력이 필요했다. 사형제들이 잠들기를 기다린 가은은 남몰래 산에서 내려왔다. 은밀하게 영준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그가 떠나기 전 일러준 말이 기억났다.

“저희는 며칠 해금 객잔에 머물 예정입니다. 혹여 마음이 변하시거든 그리로 찾아오십시오.”

비록 인경의 눈에는 들지 못했으나 다른 사내의 마음은 확실히 훔친 셈이었다. 그 후에는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그녀는 영준을 통해 원하는 정보를 다 얻어냈다.

“아주 대단하구나.”

소정의 흡족한 미소에 가은은 뛸 듯이 기뻤다. 마치 그녀의 칭찬을 듣는 것이 처음 목표였던 것처럼, 성취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런데 말이다.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단다.”

“네?”

가은은 의중을 알아채지 못하고 멍하니 소정을 올려다보았다.

“네가 똑똑한 걸 충분히 알았으니, 적당히 숨기면서 지내란 말이다.”

아리송한 몇 마디 말만 던져둔 채, 소정은 무리의 맨 앞으로 나아갔다. 더는 대화를 나눌 가치가 없다는 무언의 무시였다. 멀어지는 소정의 매정한 뒷모습을 보며, 가은은 목구멍으로 뜨끈한 감정이 솟아오름을 느꼈다.

해금 객잔이 있는 골목길에 접어들었을 때는 해시(亥時)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서두른다고 쉬지도 않고 걸어왔건만, 이미, 해는 한참 전에 사라진 뒤였다. 달빛도 구름에 가려 바로 발밑을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캄캄한 밤이었다.

“사부님, 이상합니다. 해금 객잔처럼 규모가 상당한 곳이 이리 어두울 수 있습니까?”

영인의 귀엣말에 소정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녀 역시 같은 의심을 하는 중이었다. 해금 객잔이 어디인가? 운평에서 음식 맛으로 정평이 나 있는 최고의 객잔이었다. 경국뿐 아니라 타국에서도 유명한 이곳이, 이처럼 한산하고 조용할 리가 없었다.

“다들 진(陳)을 만들어라.”

소정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작았으나 모든 제자의 귀에 날카롭게 꽂혔다. 그녀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그들의 중앙에서 조용히 천천검을 꺼내 들었다.

‘과연 명문정파로구나.’

가은은 사형제들의 모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작 스무 명 남짓이었으나 누구 하나 빠져나가기 어려운 검진이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은아, 보현 사숙님 뒤에 꼭 붙어 있으렴.”

그 와중에도 영인은 살뜰하게 막내를 챙겼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막상 싸움이라도 일어난다면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었다. 무공을 전혀 하지 못하는 가은이 휘말릴까 사뭇 걱정스러웠다.

“언니, 걱정하지 마세요.”

가은은 처음 받아본 친절에 콧날이 시큰해졌다. 이제야 자신이 선운검파의 일원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끼이익.

소정이 문을 열자 영인을 위시한 선자들은 발소리를 한껏 줄인 채로 뒤를 따랐다. 어디서 무슨 흉기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온몸이 긴장 상태였다.

“계십니까?”

객잔 안에는 빛이 없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누가 일부러 의도한 듯, 창문조차 꽉 닫혀있었다. 필경 기습을 위한 준비 단계였다.

“조심해라.”

소정이 오른손을 들어 가볍게 손짓하자, 제자들 모두 검 자루를 손에 쥐었다. 기습에 대비한 훈련을 머릿속에 복기하며 어둠 속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

그러나 일각이 지나고, 또 일각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잔뜩 긴장했던 근육은 풀어지고 팔과 다리가 서서히 저렸다.

“불을 켜라.”

이대로 주야장천 경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소 위험했지만 불을 밝혀 상황을 확인하는 편이 더 나을 듯싶었다. 영인이 불을 켜는 동안, 보현과 두 명의 장로급은 전방을 방어했다. 불시에 공격이 들어오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함이었다.

휘익

그 사이, 서너 개의 초에 불이 붙었다. 작은 양초였으나 당장 앞을 식별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악!”

불을 켜자마자 보현이 자지러지듯 놀라 소리를 질렀다. 자신이 칼로 겨누고 있던 바로 앞에 누군가를 그제야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게 뭐야?”

소소정은 기가 막힌 상황에 당황하여 자신도 모르게 콧바람을 흥하고 내쉬었다. 영인이 들고 있는 초를 뺏어 주변을 휙 둘러보자 그제야 어떤 상황인지 파악이 되었다.

“강운선…….”

그들 앞에 펼쳐진 장면은 소름 끼치도록 기괴했다. 수십의 도사들이 꼭두각시 인형처럼 굳어진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바로 오늘 아침 일찍 먼저 하산한 용문파의 제자들이었다.

*** 번롱(翻弄):

이리저리 마음대로 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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