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82화 (82/209)

#82화. 四知(사지)

운선이 마주한 공간은 그야말로 무릉도원이었다. 사방이 막힌 점에서는 이전 구덩이와 다를 바 없었으나 그 크기는 수십 배에 달했다. 천창이 넓게 뚫려 찬란한 달빛이 낮처럼 사방을 밝히고 있었다. 빛과 물을 잘 먹은 싱싱한 기화요초들이 가득했으며 자그마한 개울에는 깨끗하고 맑은 물이 졸졸 노래를 불렀다.

“살았다.”

일단 먹을 물과 빛이 있다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사지를 마음껏 움직이는 게 가능하니, 급한 대로 주운의 부러진 뼈를 맞춰볼 수도 있을 듯했다.

“주운, 주운?”

달빛 아래에 눕히고 보니 주운의 상처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자상과 골절은 그렇다 치고 쇄골 근처에 보이는 시퍼런 멍은 치명적인 내상의 흔적이었다.

‘내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 설이에게 가려면 업고 뛰어야 하니 접골만이라도 해야겠다.’

운선은 조심스럽게 주운의 몸을 살펴보았다. 왼쪽 팔과 다리뼈는 완전히 부러져 이대로 두면 목숨을 구하더라도 병신이 될 가능성이 컸다. 한시라도 빨리 조치를 해야 위기를 넘길 터였다.

운선은 주운의 품속을 뒤져 가느다란 바늘을 하나 꺼내 들었다.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녀가 즐겨 쓰는 암기였다. 무기로는 사용할 줄 몰랐으나 침으로는 꽤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았다.

“강호는 험한 곳이에요. 행여 다치기라도 하면 응급처치가 필요하지요. 만약을 대비해 꼭 기억하세요.”

황석산에 묻혀 지낸 삼 년 동안 운선이 배운 건 무공뿐만이 아니었다. 설이의 강요에 못 이겨 침술을 익힌 것이 이처럼 유용할지 그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운선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주운의 손, 발, 팔꿈치, 무릎 아래의 오수혈을 차례로 찔렀다. 조금이라도 통증을 완화하기 위함이었다.

“아악!”

접골하는 동안, 주운은 수차례 혼절을 반복했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이를 꽉 물고 버텨냈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자기의 죽음으로 인해 죄책감을 견디지 못할 운선을 위해서였다.

다행스럽게도 운선의 치료는 꽤 효험이 있었다. 위험한 부위는 차마 건드릴 수 없었으나 가장 통증이 심했던 부분은 어느 정도 견딜 만한 수준이 되었다. 또한, 수차례 진기를 불어넣어 준 덕분에 정신도 한층 맑아졌다.

“그런데 이곳은 어디야?”

그제야 사방을 둘러본 주운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황석파 내부에 꾸며진 그 어떤 화려한 정원보다도 아름다운 곳이었다. 워낙에 역사가 깊은 문파라지만 이런 비밀의 장소가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리 예상치 못한 공간이 나왔다는 건 틀림없이 탈출구가 있다는 뜻일 겁니다. 신 과일은 원기 회복에 좋다 하니, 먹고 기운을 차려봐요.”

운선은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내며 주운을 위로했다. 이렇다 할 희망은 보이지 않았으나 절망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주운 또한 애쓰는 운선이 안쓰러워 최대한 고통을 내색하지 않았다.

위기를 넘긴 두 사람은 어느덧 서로 손을 꼭 부여잡고 잠에 빠져들었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이의 체온 덕분인지, 운선은 참으로 오랜만에 꿀잠을 자고 일어났다. 고작 두 시진도 채 자지 못했으나 단잠을 잤기 때문인지 한결 몸이 가벼워졌다.

“어떻습니까?”

“어제보다는 훨씬 견딜 만하다.”

아직 열감이 있긴 했지만, 혈색이 많이 돌아온 모습이었다. 맥도 어제보다는 안정적이었다.

“설이가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치료만 받으면. 내상도 곧 좋아질 겁니다. 이곳을 벗어날 때까지만 버텨줘요.”

“내가 누구보다 버티고 기다리는 건 자신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주운을 바라보는 운선의 눈에는 애틋함과 미안함이 공존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매번 자신을 지켜주었다. 뿐인가? 기약 없는 기다림에도, 변명조차 하지 않았는데도, 언제나 믿고 기다려주었다.

죽고 싶은 상황에서도 오직 주운이 옆에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하여 그녀에 대한 감정은 이미 남녀 간의 애정을 넘어 삶의 목적이기도 했다. 둘 중 한 사람만이 존재하는 세상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기필코 나간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보가 필요했다. 아름답다고 해서 언제까지고 이곳에 머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시간이 촉박했다.

운선은 주운을 나무에 기대어 앉혀두고는 이 비밀의 공간을 샅샅이 탐색하기 시작했다. 이전 구덩이와 달리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보니 한번 훑어보는데도 해가 중천이었다. 그래도 허투루 할 수는 없었다. 행여 놓치는 부분이 있을까 싶어 손으로 벽을 짚어가며 세세히 살펴보고, 뒤져보았다.

“어?”

주운이 마주 보는 쪽 벽면을 만졌을 때였다. 처음에는 단순한 요철인 줄 알았으나 손끝의 감촉이 남달랐다. 운선은 벽면에 얼굴을 바짝 갖다 대고 파인 음각을 확인했다. 눈을 비비고 자세히 보니 글자인 것도 같았다.

“벽에 뭔가 새겨져 있습니다.”

“나도 좀 보자꾸나.”

아직 온전히 걷지 못하는 주운이 이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운선은 서둘러 그녀를 부축하여 벽면으로 다가갔다. 아무래도 자신보다는 강호 경험이 많았으므로 무언가 단서를 찾아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아아, 설마……?”

“혹시 뭔지 알겠습니까?”

아무리 눈을 씻고 다시 봐도 운선의 눈에는 생전 처음 보는 문자였다. 한자의 획을 흉내 낸 모양이었는데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 반면 주운은 글자를 하나씩 만져보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마침내 무언가를 알아낸 모양이었다.

“일전에 사부님이 하신 말씀이 있단다. 그 이야기와 관련이 있는 듯하구나.”

아픈 사람답지 않게 주운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녀 역시 무인(武人)이었으므로 이 대단한 기록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목소리를 미세하게 떠는 이유는 비단 내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주 먼 옛날 추운 북쪽 설산에는 심술궂은 노인이 살고 있었다. 성질이 너무 더러워서 누구 하나 친한 이가 없었는데, 검을 다루는 능력만큼은 최강이었다 한다. 얼마나 대단했는지 그의 온전한 무공을 이어받을 인재가 없었다 하더구나. 오랜 후에, 그나마 인정을 받은 세 명의 제자를 찾았는데 그는 그들에게 절기를 단 하나씩만 가르쳤단다. 그런데도 각각 최고의 고수가 되었을 정도였지.”

뜬금없는 옛날이야기에 운선은 사뭇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평소 주운이 허튼소리를 하지 않는 성격이기에 필시 합당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마음을 추스르고 곧 주의를 집중하였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설산의 노인은 세상이 더럽다며 영영 모습을 감췄단다. 막상 스승이 사라지자 세 제자는 금세 본성이 드러났지. 그들은 본래 욕심이 매우 많고 투기가 심했다. 자신의 무공이 제일이라 여기면서도 형제의 무공을 탐했다고 하더구나. 결국, 그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돌이킬 수 없이 사이가 틀어진 그들은 서로 무공을 겨루기로 했단다. 그 대결의 승자가 사문을 이어받기로 하고 말이야.”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진 주운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무래도 쉬지 않고 너무 많은 말을 한 게 무리가 된 듯했다. 운선이 가져다주는 물을 한 모금 마신 후에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애초에 승자는 정해져 있었다. 세 사람 모두 무승부. 자질도, 실력도, 심지어 무공의 마음가짐도 완전히 같았기 때문이지. 그들은 크게 실망하여 서로 헤어지기로 했다. 그래도 처음 스승과 연을 맺은 이는 첫째니까 그가 북쪽을 지키기로 하고 나머지는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났단다.”

“아니, 그런 일로 사문을 떠난단 말입니까?”

고개를 갸우뚱하는 운선을 바라보며 주운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너와 같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랬다면 우리가 이리 갇혀 생사의 기로에 서지도 않았겠지.”

“아아.”

운선은 안타까움에 고개를 푹 숙였다. 수년간, 그리 모진 고초와 배신을 겪었으면서도 그에게는 여전히 사람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고유생에게 속아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바로 그 같잖은 믿음 때문이었다. 적어도 사람이라면, 이리 모질지 않으리란 근거 없는 믿음이 지금 이 꼴을 만든 것이었다.

“사람이란 참으로 어리석은 존재군요.”

운선의 죄책감 가득한 표정을 바라보는 주운의 마음도 한층 무거워졌다. 강호에서 버티면 버틸수록 그 순수한 이상은 깨어지고 부서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신념이라도 지키려면 강호의 더러움을 배워야 했다. 지독한 모순. 주운도 그러했고, 운선도 마찬가지였다. 이 옛날이야기 속의 사형제들 또한 이 이율배반적 진리를 피해 갈 수 없었다.

“첫째는 북쪽 고대산에 남고 다른 두 사람은 각각 남쪽과 서쪽의 제일 높은 봉우리에 자리를 잡았다 한다. 남쪽은 황석산, 서쪽은 선운산이었다.”

“어? 그럼 혹시?”

주운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바로 이들이 오대산검의 선조란다.”

“그래서 고대산파를 오대산검의 역사라 했던 것이군요.”

이제야 오대산검 파문의 시작점이 왜 고대산파여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항상 근간을 흔들어야 다음 일이 쉬워지는 법이니까.

“세 사람은 평생 서로를 그리워하면서도 미워했다지. 하여 언제든 다시 겨루기를 다짐하며 은밀한 곳에서 자신의 절기를 연마했다고 한다. 강호에는 그 세 사람이 머문 어딘가에는 필생에 연구한 업적을 기록해둔 장소가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단다. 어릴 적에는 그저 낭설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 벽을 보니 확실히 알겠다.”

주운은 놀란 토끼 눈으로 서 있는 운선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래, 이건 아무래도 황석파 초대 장문의 흔적인 듯하구나. 황석파의 정수, 비월 검법의 구결이 틀림없다.”

“아아.”

운선은 차마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저 떨리는 손으로 벽만 쓰다듬을 뿐이었다.

고작 이틀 만에 다시 행장을 꾸리자 선운검파 제자들은 불만을 숨길 수 없었다. 대체로 장문의 뜻을 순순히 따르는 편인 영인도 오늘만큼은 속이 상했다.

“문주님, 자매들 모두 피곤해합니다. 또한, 몸이 낫지 않은 해윤 사숙만 타지에 남겨두고 어찌 우리끼리만 돌아간단 말입니까? 하루라도 더 묵을 순 없겠습니까?”

그러나 영인의 애절한 부탁은 단호한 질책으로 돌아왔다.

“해윤이 다쳤기에 이리 서두르는 것이다. 태을신교가 다시 강호에 나왔음이 자명한데, 어째서 게으른 소리만 지껄이는 것이냐? 장차 내 뒤를 이어야 하는 네가 이리 판단력이 흐려서 어찌한단 말이냐?”

영인은 얼굴이 벌게진 채로 고개를 들 줄 몰랐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모가지라도 숨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새로운 제자가 들어왔으니 네가 책임지고 챙겨주어라. 다만, 속내를 알 수 없는 아이니, 잘 살펴 사문에 해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하렴.”

“네. 명심하겠습니다.”

일단 대답은 하였으나 생각할수록 퍽 이상했다. 잘 챙겨주지만 지켜보라니, 혹 감시하라는 뜻인가? 고작 어린애 하나가 무슨 해를 끼칠 수 있겠는가? 아무리 심계가 깊은 스승이지만 이번엔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 저는 이제 뭘 하면 되나요?”

환한 미소로 자신을 맞이하는 가은을 보며, 영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부도 사람이니 틀릴 때가 있겠지. 이리 해맑고 순진한 아이를 의심하다니 참으로 모질고 매몰차게 느껴졌다.

“가은아, 언니가 아니라 사저라 불러야 한단다. 호칭도 예의와 다르지 않다. 친밀감 이전에 격식을 지켜야 하지.”

“그렇지만 저는 언니가 좋은걸요. 그럼 우리끼리만 있을 때라도 그리 부르게 해주세요. 네?”

영인은 자신도 모르게 단단하게 굳어 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어쩐지 이 아이에게는 한없이 다정해지고 싶었다.

“그럼, 사적인 공간에서만이다.”

“와아, 네 언니. 앞으로 제가 잘할게요.”

가은은 뛸 듯이 기뻐하며 새로 생긴 자매의 야리야리한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영인 역시 그런 그녀가 싫지 않은지, 그저 흐뭇하게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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