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81화 (81/209)

#81화. 死活(사활)

은률은 장은의 뒤를 따르면서도 은근슬쩍 옆에 있는 가은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마르고 가녀린 소녀였으나 만만히 볼 수 없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산기슭을 누비는 약초꾼의 딸로 머물기에는 아까운 인재가 틀림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손가락을 건네주던 모습은 감동이었다.

‘저 이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내 손가락은 흙바닥을 뒹굴다 썩어 뭉개졌을 테지.’

조실부모하여 황석산에서 살아온 삼십여 년간, 그를 챙겨준 이는 장은이 유일했다. 심지어 스승인 부능파마저 늘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제자를 부끄러워했다.

“모자란 놈, 나 같은 스승에게 배우는데도 어찌 그 모양이냐? 답답하구나.”

끊임없이 사형 장은과 비교당하면서도 그저 자신이 부족하여 마땅히 혼나겠거니 하며 살아왔다. 하여 이 나이가 되기까지 누군가의 관심을 받아본 적도, 애정을 느껴본 적도 없었다.

“아프진 않으십니까?”

자신의 다친 손을 안쓰럽게 쳐다보는 가은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실력이 뛰어난 상대를 만났을 때 느끼는 긴장감과는 사뭇 다른 설렘이었다.

“…….”

은률은 차마 그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곧바로 후회했으나, 벌게진 얼굴을 들키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자신보다 열 살은 어린 소녀에게 왜 이런 야릇한 감정이 드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혹, 선운검파에 입문하고 싶은 겁니까?”

드디어 세 사람은 선운검파의 처소 앞에 다다랐다. 소소정의 방문을 두드리기 전, 장은은 작정한 듯 가은을 향해 물었다. 처음부터 그녀의 의중은 파악하고 있었으나 좀 더 확실히 확인을 받아두고 싶었다.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못할 것도 없지요.”

가은은 굳이 이 좋은 기회를 걷어찰 이유가 없었다. 황석파의 장문이 직접 나서 연결해주는 일이야말로 소소정이 제시한 가치 증명에 가장 부합하는 증거였다. 두 손을 마주 모아 잡고는 세상 간절한 눈으로 장은을 바라보았다.

“만약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소녀 반드시 이 은혜를 갚겠습니다.”

“은혜라…….”

사형의 얼굴을 바라보던 은률은 불길한 예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그 눈빛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아주 먹음직한 사냥감을 눈앞에 둔 포식자의 설렘.

“일이 잘 끝난 후에 아까 그 안뜰에서 다시 봅시다. 물론 소장문이 허락해 준다면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문주님.”

어쩐지 의도가 순수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또한, 장은 정도의 능력과 지위가 있는 사람이라면 인연을 맺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다만,

‘어째서 저 시커먼 놈은 오만상을 쓰고 바라보는 거지?’

정작 손가락의 주인은 떨떠름한데 그의 사형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주다니, 세상일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지략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생각했건만, 인제 보니 우물 안 개구리일 뿐이었다. 소소정도 장은도 저 냉혈 살인마조차도 속을 들여다보기 쉽지 않았다.

‘반드시 선운검파의 제자가 되어 더 큰 하늘을 보아야겠다.’

마침내 소소정을 다시 만나는 순간, 가은의 마음속에는 또 하나의 굳건한 목표가 자리 잡았다.

“장문주께서 무슨 일이신지?”

태연하게 물었으나 소소정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저 어린애의 객기라는 생각에 귀엽다 여겼건만, 고작 몇 시진 만에 장은을 대동하고 다시 나타났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소문주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러 찾아왔습니다.”

장은은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리더니 뒤에 서 있는 가은을 앞으로 잡아당겼다. 불시에 쪼르르 끌려 나왔으나 가은의 얼굴은 그야말로 의기양양했다.

“이 소녀를 도와 우리 풍림(정은률의 별호)의 수지(手指)를 찾아주셨으니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자초지종을 듣는 내내 소소정은 밀려드는 감정을 감추기 어려워 애를 먹었다. 이 아이야말로 좀처럼 만나기 힘든 장문의 깜냥이 아닐 수 없었다. 기지와 순발력은 그렇다 치고, 오기와 배짱은 가르친다고 얻어지는 능력이 아니었다. 굳이 흠을 잡자면 골격이 매우 작다는 점이었는데 그나마도 후천적으로 보완할 수 있으리라 짐작했다.

‘무공에 자질이 없다 해도 괜찮다. 제자들을 거느리고 조율하는 데에는 힘보다는 지모가 필요하다.’

실력은 뛰어나지만 심약하고 둔한 편인 영인에게 늘 불만이었기에 가은이 더 탐이 나는지도 몰랐다. 다만 딱 한 가지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이리 욕심이 많은 아이인데 내가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저 똘망똘망한 눈 속에 얼마나 방대한 욕망이 숨어 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지금은 선운검파의 하녀라도 좋다 하지만, 종국에는 장문의 자리를 탐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해미 소금정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자신처럼.

“감히 바라옵건대, 이 소녀를 귀파의 제자로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장은은 다시 한번 깊이 허리를 숙여 청하였다. 부탁처럼 보였으나 기실 요구와 다름없었다. 두 문파의 관계를 고려했을 때, 소소정은 결코 그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선운검파는 오대산검 가운데 관할 지역이 가장 작았다. 경지에 소작을 주고 연세로 문파를 유지하는 그들은 늘 형편이 좋지 못했다. 제자를 널리 받지 못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심한 가뭄이 찾아온 삼 년 전에는 명맥을 유지하기도 어려운 지경에 처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때, 유일하게 손을 내민 이가 바로 장은이었다.

“장문주께서 필히 부탁하시니,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또한, 아이가 영민하고 기특하니 흡족한 마음으로 거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서로의 속마음은 꼭꼭 숨긴 채, 두 사람은 훈훈하게 일을 마무리 지었다. 덕분에 가은은 그리 바라던 소중한 거처를 얻게 되었다.

“그럼 가낭자, 부디 훌륭한 제자가 되십시오.”

장은은 마지막 인사를 건네면서 가볍게 한쪽 눈을 찡그렸다. 자신과의 약속 또한 잊지 말라는 당부였다.

“소녀, 두 분의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은률은 별다른 대꾸 없이 가은을 등지고 돌아섰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서부터 묘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것은 난생처음 사형에게 가져본 불만이었다.

겨우 한 줄기 빛만으로는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나마도 흐릿해졌을 때, 운선은 벌써 해가 저물었음을 깨달았다. 늦여름이었으나 동굴 안은 습하고 추웠다. 점차 체온이 떨어지는 주운에게 입은 옷을 거의 다 벗어주고 나니, 그 역시 버티기가 쉽지 않았다.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운선의 가슴 속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그것은 무리하게 끌어올린 태을신공의 내력이기도 했고, 비열한 적을 향한 분노이기도 했다.

“운, 운…선아…….”

끊어질 듯, 가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운선은 화들짝 놀랐다. 어느덧 정신이 들었는지 주운의 눈꺼풀이 힘겹게 깜박이고 있었다.

“주운, 괜찮습니까? 골절이 심해 일단 혈을 몇 군데 눌러 두었습니다. 통증은 어떤가요?”

“견딜 만하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말 한마디 내뱉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갈비뼈가 부러졌는지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턱턱 막혔다. 그러면서도 혼절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오로지 운선의 모습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영영 사라져버릴 것 같아 두려웠다.

“조금만 참아요. 반드시 길을 찾을 겁니다. 당신을 꼭 살릴 겁니다.”

“운선아…….”

퉁퉁 부은 눈두덩이 사이로 굵은 물방울이 맺혔다. 터진 실핏줄을 반사하여 마치 피눈물 같았다.

“애쓰지 말아라. 그저 내 옆에서 머리나 쓰다듬어주렴.”

고유생에게 입은 상처는 외상뿐만이 아니었다. 부러진 갈비뼈는 고유생의 필살 장풍을 맞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가 마세풍과 부능파를 이기기 위해 평생을 다 바친 진헌신장이었다.

“살 수 있습니다. 제발 포기하지 말아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운선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이러다 갑자기 숨이 멎어버릴까 봐 너무나 두려웠다.

“내 마지막을 네가 지켜준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아니요. 마지막이 아닙니다. 절대로 그리되지 않을 겁니다.”

주운은 힘겹게 손을 들어 올렸다. 쉴 새 없이 떨어지는 그의 눈물을 닦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막 닿으려는 순간 다시 까무러쳤다.

“주운…….”

운선의 마음은 점점 더 조급해졌다. 죽어가는 강율천을, 또 마세풍을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그 절망감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았다. 하물며 주운은, 그들과는 또 다른 의미로 너무나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였다.

‘동굴이지만 이만한 구덩이가 있다면 뚫고 나갈 다른 통로가 있을 것이다.’

기실 아까부터 바닥을 계속 손으로 훑고 있었다. 분명 무른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는 단, 한순간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틀린 건가?”

어느새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와 한 줄기 빛마저 앗아갔다. 물도 없이 꼬박 하루를 지내고 나니 체력도 한계에 다다랐다. 도저히 집념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운선도 망연자실하여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미약한 주운의 숨소리마저 없었더라면 그야말로 목놓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찍!”

“어?”

머리를 감싸 쥐고 있는 운선의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렸다. 짙은 회색빛의 쥐새끼 두 마리가 운선의 발밑을 빠르게 지나갔다. 꽤 형편이 좋은 모양인지 제법 크기가 크고 통통하게 살이 올라 있었다. 평소라면 질색할 존재였으나 지금은 그 어떤 것보다 반가운 이들이 아닐 수 없었다.

‘저들이 들어온 구멍 쪽은 반드시 지반이 약할 것이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피곤한 상태였으나 다시금 기운이 났다. 쥐들의 동선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아니나 다를까 한쪽 구석에 주먹 두 개가 들어갈 정도 크기의 구멍이 보였다.

퍽!

몸에 남은 기운을 짜내어 주먹에 집중했다. 고작 쥐구멍이나 파라고 배운 영명권이 아니건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유용한 기술이었다.

퍽!

다행히 몇 번의 주먹질 만에 구멍은 사람 한 명이 충분히 빠져나갈 크기로 넓어졌다. 어둡고 좁은 공간에서 쥐라도 없었다면 결코 찾기 어려운 구석이었다.

‘아직 하늘이 나를 버리지 않았구나.’

감격도 잠시, 서둘러 주운의 목덜미를 짚어 상태를 확인했다. 그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주운은 생명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더 지체하다가는 이대로 영영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옆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니, 먼저 빠져나가 살핀 후 주운을 옮겨야겠다.’

잠깐이지만 혼자 남겨두는 것이 못내 불안하였다. 그러나 미지의 공간에 먼저 밀어 넣어두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옷가지 하나를 자른 다음 길게 끈을 만들었다. 만약을 모르니 주운의 발목과 자신의 발목을 연결해 놓을 생각이었다. 이번에는 절대로 그녀를 혼자 버려두고 가지 않으리라. 운선의 얼굴에 단호한 결심이 들어섰다.

후두둑!

힘겹게 뚫어놓은 구멍에 몸을 밀어 넣었다. 성인 남성이 지나가기에는 넉넉하지 않았으나 어깨뼈를 최대한 오므리니 그럭저럭 빠져나올 수 있었다. 혹시나 반대편이 더 좁을까 싶어 손으로 머리 위를 휘휘 내저어 보았다, 다행히 공간은 충분했다. 적어도 이쪽 구덩이보다는 큰 모양이었다.

발끝이 완전히 빠져나오고 나서야 운선은 한껏 수그렸던 고개를 들었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위로 향하니 새로운 공간의 전경이 일시에 펼쳐졌다.

“앗!”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그만 입이 떡 벌어졌다. 뻥 뚫린 하늘에서 하얀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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