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刻骨(각골)
구덩이는 포악한 짐승을 잡기 위해 만든 덫처럼 좁고 깊었다. 떨어지는 순간에 내력을 사용하여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면 다리뼈가 으스러졌을지도 몰랐다. 그야말로 고약하고 치사한 방법이었다.
“고유생!”
악에 받쳐 내지르는 소리는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습한 벽에 부딪히더니, 수 갈래로 찢어져 돌아왔다. 꽤 낙천적인 성향의 운선인데도 이번만큼은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게, 왜 그리 성급하게 쫓아왔는가? 내 다 알아서 데리고 나가려 했건만.”
키득거리는 고유생의 얼굴에는 세상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이제 주도권은 온전히 자신에게 있었다. 빛도 물도 없이 사람이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는가? 이렇게 쉽게 해결될 일이었다면 진작에 주운을 노릴 것을, 아쉽기도 했다.
“글자를 알려주게. 그러면 내 자네는 꺼내주지.”
느글거리는 고유생의 말투에 운선은 소름이 돋았다. 원래도 그에 대한 신뢰가 없었으나 지금은 논할 가치조차 없었다.
“이 지경이 되었는데 또 속아 넘어가는 바보가 있겠느냐?”
“아니면 다른 방도가 있는가?”
운선은 침착하게 구덩이의 깊이를 가늠해 보았다. 어림짐작해도 성인 신장에 몇 곱절 이상 깊었다. 차라리 절벽이라면 바위 틈새나 나무뿌리라도 있을 텐데 물기가 가득한 벽을 타고 올라가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너야 그렇다 치고, 젊은 처자가 참으로 안 되었어.”
“주운은 어디 있느냐?”
“글쎄…….”
매번 자신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상대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주운은 다른 문제였다.
‘아까 들은 여인의 목소리는 주운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 근방에 있다는 뜻일 터, 구덩이를 빠져나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고유생을 잘 설득한다면 자신은 몰라도 주운은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운선은 온갖 개연율을 고민해 보았다. 글자를 제대로 알려준다 해도, 숨겨진 뜻을 풀어내지 못할 테니 거래의 조건으로 나쁘지 않았다.
“글자를 알려주겠다. 단, 주운을 살려주는 조건이다.”
“흐음…….”
고유생은 부러 고민이 많은 척, 연기했다. 얼추 겁박하다가 원하는 정보를 얻어낼 생각이었는데 막상 몸이 닳아있는 꼴을 보니 더 놀려먹고 싶었다. 까마득하게 어린놈이 매번 자신을 가르치려 드는 양도 아니꼽던 참이었다.
“네놈은 입만 열면 거짓말이니 도통 믿을 수가 없다. 단 몇 글자라도 알려줘야 협상이 되지 않겠나?”
“허!”
“반을 알려주면 그 계집이 있는 곳을 알려주고, 나머지 반을 알려주면 구덩이에서 꺼내주마.”
물론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최대한 놈을 쪼아대어 답을 얻은 후에는 영영 바깥을 볼 수 없도록 구덩이에 묻어버릴 작정이었다. 그전에 주운을 핑계 삼아 정신적으로 압박한다면, 놈의 성격상 허투루 거짓 자백을 하지는 않으리라.
‘하물며 조맹주에게도 사기를 친 놈이니 신중해야 할 터!’
갈등하는 중인지 구덩이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엎드려 안쪽을 엿보니 과연 운선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어때? 결심이 섰느냐?”
“…….”
수수께끼는 말 그대로 수수께끼였다. 모든 글자를 알려준다고 해도 못 믿겠다 하면 그만이었다. 최대한 가르쳐주기 싫은 티를 내며 버텨야 조금이라도 의심이 덜할 것 같았다.
“나 역시 당신을 믿지 못한다. 하여 두 글자를 먼저 알려주겠다. 주운의 생사를 확인하면 다시 두 글자를 말하겠다.”
저리 신중한 걸 보면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하긴 주운에 대한 정이 깊으니 그녀의 목숨으로 도박을 할 리는 없었다. 고유생은 뛸 듯이 기뻤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흥분하면 자신도 모르게 실수를 할지도 몰랐다.
“흴 소, 어찌 나”
“흐음.”
유생은 혹시나 잊을까 재빨리 손바닥에 두 글자를 적었다. 이미 알고 있던 글자와 맞춰보면 전혀 예상치 못한 조합이었다. 그렇다고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었다.
‘그때 이무영이 조양에게 보여준 글자는 여덟 개였다. 그중에 내가 본 것은 가운데 두 개. 이걸 잘 조합한다면 이 녀석이 진실을 말하는지 거짓을 말하는지 알 수 있겠지.’
삼 년 전, 이무영에게 망신을 당하고 쫓겨가면서도 몰래 지켜본 덕분에 나름 알아낸 귀중한 정보였다. 오늘 이렇게 써먹게 된다니, 역시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모르는 법이었다.
“주운은 어디 있는가?”
고유생이 대꾸가 없자 운선은 급격히 초조해졌다. 이대로 그가 약속을 어기고 모르쇠 한다고 해도 이쪽에서는 딱히 방법이 없었다. 지금은 그저 최소한의 양심을 믿는 수밖에.
“잘 들어봐라. 네 근처에 있으니.”
“뭐?”
운선은 벽에 몸을 밀착했다. 축축하게 젖은 표면 때문에 겉옷이 홀딱 젖었지만, 상관없었다. 호흡을 죽이고 정신을 집중했다.
“…하……아…….”
낮은 신음, 미약한 숨. 그가 있는 곳에서 정북 방향이었다.
‘위급한 상황이구나.’
주운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할 수만 있다면 이 단단한 벽을 단숨에 뚫어서라도 곁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다음 두 글자를 말해라.”
재촉하는 고유생의 얼굴은 싱글벙글하였다. 상황이 유리한 쪽으로 술술 풀리니 기분이 좋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부처 불, 언덕 아”
운선의 목소리는 흐느낌에 가까웠다. 급격히 의기소침해진 그는 더는 저항할 기운도 없는 사람 같았다. 이제는 따지기는커녕 화도 내지 않았다.
‘역시.’
고유생의 큰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운선은 지금 주운에 대한 걱정 때문에 꼼수를 쓸 여유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가 이번에 불러준 두 글자는 고유생이 이미 알고 있던 것과 꼭 들어맞았다.
“이제 주운을 꺼내주어라. 그럼 나머지 글자도 알려주겠다.”
우선 사람을 살려야 했다. 상처가 없는 자신은 사흘이든, 나흘이든 버틸 기운이라도 있지만 주운은 달랐다. 숨소리만 들어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고작해야 하루? 아니 당장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급박해 보였다.
“뭐, 좋다.”
약속은 약속이니 어길 생각은 없었다. 운선을 내려다보던 구멍에서 순식간에 고유생의 얼굴이 사라졌다. 일각 정도 지나자 돌아왔는데, 몸이 축 처진 누군가를 겨드랑이에 낀 모습이었다.
“주운?”
운선은 최대한 벽을 타고 올라 그녀의 얼굴을 보려 안간힘을 썼다. 이미 양손의 검지와 중지의 손톱이 반쯤 들려 피가 새어 나왔다. 그러나 아픈 줄도 몰랐다.
“약속을 지켰으니, 다음 두 글자!”
고유생에게 자비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앞에 성큼 다가온 행운을 놓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벼슬 위, 아홉 구, 이제 제발!”
운선이 결국 참지 못하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의 찢어질 듯한 목소리가 좁은 벽을 울려 다시 자신의 귀속으로 파고들었다. 수십 번의 메아리가 반복되어 마치 계면조처럼 들렸다.
“운…선……?”
고유생이 주운을 땅바닥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그제야 축 늘어졌던 주운의 머리가 서서히 들렸다. 눈에 초점이 없고 흐릿하여 당장 앞에 있는 사물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운선의 울부짖는 목소리만큼은 또렷하게 귀에 꽂혔다.
“주운, 괜찮습니까? 제발…….”
주운은 그야말로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흙바닥에 뒹굴어 더러워진 옷에는 몸의 상처에서 배어 나온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투명할 정도로 새하얗던 얼굴은 검붉은 피멍이 들었고, 총명한 눈은 퉁퉁 부은 살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여기저기 골절이 심한지, 사지를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운선은 처참한 정인의 모습에 목이 메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껏 단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던 주운이었다. 그 고운 여인이 저리 망가진 원인이 온전히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고유생!”
“살리고 싶으면 남은 두 글자를 불러라.”
고유생은 오른손을 들어 주운의 목에 길고 더러운 손톱을 갖다 대었다. 당장 말하지 않으면 인정사정없이 목덜미를 뚫을 생각이었다. 이제 딱 한 발만 내디디면 자신의 완전한 승리였다.
“말다 물, 높을 존”
마지막 글자를 말하는 순간, 고유생은 왼손으로 잡고 있던 주운의 멱살을 놓아 버렸다. 아슬아슬 구덩이 끝에 버티고 있던 몸이 그대로 굴러떨어졌다.
“주운!”
운선은 본능적으로 태을신공을 끌어올렸다. 준비 없이 사용한 내력 때문에 단전에 심히 무리가 갔으나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오직 머릿속에는 주운을 받아내야 한다는 강렬한 목표만이 가득했다.
툭!
분출한 내력이 반동력이 되어 떨어지는 무게를 반으로 줄이자, 속도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 틈에 양 벽에 발을 뻗어 지탱한 뒤, 몸으로 주운을 받아내었다. 이때만큼은 구덩이 폭이 좁은 것이 다행이었다.
“주운! 정신이 듭니까? 주운!”
“…운선아…….”
“아아, 다행입니다. 다행…….”
아직은 의식이 있다는 걸 확인하자,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운선은 와락 주운을 끌어안았다. 몸이 몹시 차가웠지만, 온기가 남아 있었다. 어쩌면 살릴 수 있다는 희망이 가슴 속에 서서히 차올랐다.
“약속을 지켰으니 이만 가봐야겠구나.”
“뭐?”
고유생은 혀를 끌끌 차며 한참 동안 두 사람의 모습을 구경했다. 곧 죽을 정인을 부여잡고 눈물이나 뚝뚝 흘리는 꼴이 한심하기만 했다. 저놈은 딱 저기까지였다. 해심밀경소를 가질 주제도 못 되는 놈. 고작 여인 하나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머저리. 도포 자락에 묻은 흙을 툭툭 털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 보았다. 이제 장은이 문제랴? 강호를, 아니 천하를 손에 넣은 기분이었다.
“약속이 다르지 않은가? 나는 분명 다 알려주었는데 어째서 주운을 이리 던져 넣었나?”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운선의 목소리가 마치 쇠붙이를 긁는 것처럼 거칠어졌다. 그는 태어나서 지금껏 이렇게 분노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진심으로 상대를 죽이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온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약속? 나는 분명 주운을 꺼내주겠다 했다. 꺼내서 네놈 앞에 던져주었으니 약속을 지킨 게 아니냐?”
“이, 이…….”
말을 잇지 못하는 운선을 내려다보는 고유생의 얼굴에 비열한 미소가 번졌다.
“일단 네가 알려준 글자가 맞는지 확인해 봐야겠다. 그때까지 목숨이 붙어있다면 살려주마. 과연 얼마나 걸릴지는 장담 못 하겠다마는.”
“고유생!”
절규하는 운선을 한껏 비웃으며, 고유생은 몸을 돌렸다. 누런 도포 자락을 힘껏 휘두르자 근방에 있던 검붉은 진흙이 구덩이 속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동굴 안은 곧 적막에 휩싸였다.
“아아, 어찌 이리 어리석단 말이냐.”
그깟 무공을 조금 익혔다고 해서 주제도 모르고 거만을 떤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제 목숨이야 스스로 감당하면 그뿐이었다. 그러나 그 무모한 객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이 죽게 생겼으니 후회가 뼛속까지 사무쳤다.
“주운…….”
혼절한 주운을 내려다보는 운선의 눈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떨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미약하게나마 맥이 잡힌다는 점이었다. 소맷자락에서 가장 깨끗한 부위를 찾아 그녀의 얼굴을 살살 닦아내었다. 퉁퉁 부은 얼굴이었지만 여전히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주운, 무슨 일이 있어도 살려내겠습니다. 기필코 이 원수를 갚겠습니다.”
처음으로, 오롯이 자신을 위한 복수를 결심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