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顚頓狼狽(전돈낭패)
진시를 알리는 타종이 황석산에 울렸다. 밤새 잠을 설친 고유생은 새벽녘에야 겨우 눈을 붙였던지라 좀처럼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부문주님, 조반을 내올까요?”
“내 알아서 할 테니, 물러나거라.”
시동의 외침이 오늘따라 짜증스럽게 들렸다. 장은에게 어제 일을 털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놈에게 들키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귀찮은 일이 생기지는 않았을 터였다. 매번 자신의 앞길을 막으니 정녕 악연이었다.
‘주운이 운선의 약점인 것을 알게 된다면, 분명 이용하려 들 것이다.’
그 기회를 뺏기느니 본인이 선수를 치는 게 훨씬 나으리라 생각했다. 관건은 운선을 과연 어디에서 찾느냐는 점이었다. 어젯밤에 주운의 뺨이 부어오를 때까지 때리며 물었으나 아무것도 얻어낸 정보가 없었다.
“독한 년!”
그 스승의 그 제자라더니, 거만하고 고집 세기는 그가 아는 강호인 중에 따라갈 자가 없었다. 그렇다면 오늘은 그 예쁜 얼굴에 상처를 내서라도 반드시 알아낼 생각이었다.
“부문주님, 조반을 내올까요?”
아까 그 시동이었다. 분명 필요 없다고 말했건만, 또 저렇게 묻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멍청한 놈인 모양이었다. 한낱 장로의 자리로 내려온 자신을 무시해서 저런 방퉁이를 배속했나 싶으니 더 열불이 났다.
“아니래도!”
고유생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쯤 되면 웬만한 시동들은 물러가고도 남았으리라. 그러나,
“부문주님, 아무리 화가 많이 나셔도 식사는 거르지 마셔야지요. 나이가 들면 밥심이라지 않습니까?”
“뭐야?”
물러서기는커녕, 시동은 또박또박 말을 되받아쳤다. 더구나 지금껏 수그리고 있던 허리를 갑자기 쭉 펴더니 엉덩이까지 실룩샐룩 흔들어대는 게 아닌가? 누가 봐도 상대를 놀리기로 작정한 사람 같았다.
“내 버릇을 톡톡히 고쳐주마.”
고유생은 콧김을 내뿜으며 성큼성큼 문으로 향했다. 정말이지 아가리를 찢어놓겠다는 마음이었다. 장지문을 양쪽으로 벌컥 열어젖히며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빽 질렀다.
“야 이놈아!”
“고선배님,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고유생은 문을 잡은 그 상태로 얼어붙었다. 상대는 시동의 복장이었으나, 얼굴은 익히 아는 그 사람이었다.
“강운선!”
정체를 확인한 순간, 그의 오른손이 쏜살같이 운선의 앞섬을 잡아챘다. 고유생의 금나수는 위력도 대단하였으나 신속함은 가히 무림 최고 수준이었다. 한 번 잡히면 웬만한 힘으로는 빠져나가기 어려웠다.
“허허.”
운선은 굳이 저항하지 않고 가슴을 쭉 내밀어 옷깃을 내어주었다. 상대가 기세등등하게 당기자 몸이 활시위처럼 둥글게 휘었다.
“흥! 너 따위가 나를 이길 성싶으냐?”
그러나 다음 순간 당황한 쪽은 고유생이었다. 분명 손이 묵직하여 상대를 완전히 낚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손에 잡힌 것은 달랑 저고리였다.
“시동의 옷이 탐나면 말씀을 하시지, 꼭 벗겨내야 하겠습니까?”
속저고리만 입은 운선이 킬킬거리며 그의 방안으로 들어섰다. 최대한 소란을 피우지 않으려는 속셈이었다. 자연스럽게 등 뒤에 있는 장지문을 닫으니, 고유생과 한 장 거리에 마주 선 상태가 되었다.
“이놈!”
운선의 조롱에 한껏 약이 오른 고유생은 오른손에 장력을 가득 모았다. 저런 쥐새끼에게는 검을 드는 것도 아까웠다. 손바닥으로 볼기를 쳐서 못된 버릇을 고쳐줄 심산이었다.
“영명곡우(穀雨)”
그러나 이번에는 운선의 공격이 한발 빨랐다. 뜨거운 열기가 안면으로 불어닥치는가 싶더니 매서운 칼날이 닿은 것처럼 피부가 따가웠다.
“영명권?”
화들짝 놀란 그는 다짜고짜 소매부터 휘저었다. 몸에 닿기 전에 밀어낸 덕에 상처를 입지는 않았으나 소매가 반 이상 뜯겨나갔다.
“고선배님! 우리 대화를 먼저 하시죠.”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고 운선이 말을 붙였다. 그는 싸우려고 이곳에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고유생을 어르고 달래 주운을 구할 생각이었다.
물론 당장이라도 숨통을 끊어 놓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다. 그러나 그랬다가는 영영 주운의 행방을 알 수 없을 터였다. 최대한 어리석은 행동은 삼가야 했다. 상대는 강호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는다는 실력자였다. 아무리 운선이 영명권을 완벽히 익혔다고 해도 제압하기 어려운 고수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섣불리 대들었다가는 자신의 목숨까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나는 쥐새끼 말은 모른다.”
일단 큰소리는 쳤으나 바로 손을 쓰지는 않았다. 영명권을 본 직후인지라 함부로 공격하기에는 부담스러웠다. 더구나 자고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내력을 끌어올렸더니 몸에 살짝 무리가 온 듯싶었다.
“그럼 어제 제가 장문주와 무슨 거래를 했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고유생은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저 여우 같은 놈이 또 무슨 이간질을 하려나 마음이 섬뜩했다. 그러나 짐짓 모른 체하며 시치미를 뗐다.
“흥, 그 잘난 마사형의 유골함을 주지 않았느냐?”
대답을 듣자마자 운선은 배를 붙잡고 웃기 시작했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허리까지 꺾으며 깔깔대는 모습이 퍽 꼴사나웠다.
“네 이놈!”
참다못한 고유생이 호통을 치자, 그제야 겨우겨우 웃음이 사그라들었다.
“하하, 정말 순진하게 그 말을 믿으신 겁니까? 세상에, 저는 그 잠깐을 봤는데도 그이의 됨됨이를 알겠던데 설마 사십여 년을 동고동락하고도 모르십니까?”
운선을 지켜보는 고유생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 장은이지만, 그래도 본파의 장문이었다. 고작 신교의 나부랭이 따위에게 손가락질받을 대상이 아니었다.
“네 명줄을 재촉하는구나.”
고유생은 크게 숨을 들이쉬며 단전에 기를 모았다. 필히 장력을 출수하여 저놈의 입을 틀어막으리라. 그의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
“뭐?”
운선이 외치는 순간, 고유생의 오른손에서 스르륵 힘이 빠져나갔다. 그토록 집착했던 그것의 이름이 왜 하필 지금 나오는가? 한참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장문주에게 해심밀경소를 주었단 말입니다.”
“저…, 정말이냐?”
어찌나 놀랐는지, 말까지 더듬거렸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장은은 자신을 살뜰하게도 속이고 간악한 음모를 계획하고 있음이었다.
“제가 어찌 거짓을 이야기하겠습니까? 그랬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지요.”
“그…, 그건…….”
과연 틀린 말이 아니었다. 불과 한 식경 전만 해도 저 쥐새끼를 어디에 가서 찾나 고민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고작 유골함으로 퉁쳤다는 말도 믿기 어려웠다. 마세풍이라면 이를 부득부득 가는 그 배은망덕한 놈이 사부의 유골함을 보고 마음이 바뀌었을 리가?
“혹, 장문주가 나에게도 보여주려니 기대하는 건 아니시지요? 그랬다면 진작에 사실을 말했겠지요.”
“…….”
해가 문지방을 넘어 들어와 고유생의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일순간에 주름이 수백 개가 늘어났다.
운선은 드디어 본론을 이야기할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더 질질 끌 시간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주운의 숨은 꼴딱꼴딱 넘어가고 있을지도 몰랐다.
“저는 선배님과도 거래하고 싶습니다. 제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잘 아시겠지요? 온전히 돌려주신다면 원하는 걸 드리겠습니다.”
“흥! 경전이 하나 더 있기라도 하느냐?”
빈정거리기는 했지만 내심 기대하는 말투였다. 역시나 예상했던 반응이다 싶어 운선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선배님은 아시죠? 경전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진짜는 오직 그 수수께끼 아닙니까?”
“흐음.”
고유생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허옇게 엉긴 수염을 왼손으로 쓸어넘겼다. 깊은 생각에 잠길 때면 습관처럼 하는 행동이었다.
“제가 그 글자를 알려드릴 테니 주운을 보내주십시오.”
“흐음.”
또다시 대답 대신 진중한 표정으로 신음을 뱉었다. 따지고 보면 딱히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이미 주운은 실컷 혼내주었으니 데리고 있어봤자 귀찮기만 했다. 게다가 운선의 말처럼 그가 필요한 건 경전이 아니라 단 몇 개의 글자였다.
“어쩌시겠습니까?”
“좋다.”
드디어 결정을 내린 고유생은 공격 자세를 완전히 풀었다. 서로 거래에 합의했으니 암묵적으로 휴전을 선택한 것과 다름없었다.
“안전한 곳에 숨겨두었으니 나를 따라와라.”
일단 마음을 먹으니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고유생은 잘려 나간 소매가 흉했는지 재빨리 위에 도포를 걸쳤다. 그리고는 쭈뼛쭈뼛 침상 뒤편의 문을 열었다.
끼이익!
빡빡한 미닫이문을 열자 안쪽 마당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사시사철 온화한 날씨의 운평답게 온갖 기화요초가 만발한 정원이었다. 바닥에는 푹신한 사초가 깔려있고, 그 사이로 졸졸졸 시냇물이 흘러 수려한 연못에 다다랐다.
“다만, 이곳의 존재는 평생 아무에게도 발설하면 안 된다.”
신신당부하는 그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아마도 이곳이 황석파의 비밀 공간인가보다 싶었다. 규모가 큰 문파에는 저마다 적의 침입을 대비해 나름의 대피소를 마련해 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운선은 이 와중에도 놀라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황석파가 경제력이나, 규모에서 오대산검 중 으뜸이라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두타공파의 소박한 수오당과 비교해 보면 그야말로 천지 차이였다. 그가 고개를 돌려가며 감탄을 금치 못하자 고유생은 내심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
“자, 이곳이다.”
휘적휘적 걸어가다가 드디어 발길을 멈춘 곳은 정원의 가장 안쪽에 있는 동굴 앞이었다. 어두컴컴한 입구를 얼핏 들여다보아도 그 내부가 얼마나 깊은지 가히 상상이 갔다.
“우선 글자를 알려다오.”
고유생은 커다란 덩치로 동굴 앞을 막아섰다. 잔뜩 심술이 난 얼굴로 손을 쭉 내미는 모습이 영락없는 멧돼지였다. 여기까지 보여주었으니 되지 않겠냐는 당당한 태도였다.
“주운의 안전을 확인하고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운선은 그리 멍청하지 않았다. 조양만큼은 아니지만, 고유생도 영악하기로는 강호에 따를 자가 없었다. 글자만 홀랑 알아가고 주운을 내어주지 않는다면 그보다 낭패가 어디 있겠는가?
“흐음……”
고유생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꽤 불쾌한 것 같았으나 그렇다고 불평을 하지는 않았다.
“데리고 나올 테니 기다려라.”
운선의 가슴이 쿵쾅거렸다. 저 앞에 주운이 있다. 손발이 차갑게 식으면서 등줄기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이윽고 고유생이 동굴 입구로 들어섰다. 건장한 체격의 그가 쏙 들어가는 것을 보니. 내부가 생각보다 넓은 모양이었다.
‘주운, 제발…….’
“아악!”
그러나 운선의 바람은 곧 산산이 부서졌다. 귀를 찢는 듯한 비명이 어둠 속을 비집고 나왔다. 고통스러운 여인의 목소리.
“주운!”
운선은 가슴이 덜컹하여 앞뒤 가릴 것 없이 동굴로 뛰어들었다. 지금만큼은 어떤 계산도 생각도 따질 여유가 없었다. 그에게는 오직 주운을 구해야겠다는 의지만이 있을 뿐이었다.
“주운!”
푹!
세 발자국이나 옮겼을까? 발밑이 순식간에 푹 꺼지더니,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손을 휘저어 벽을 짚으려 했으나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고유생!”
무기력하게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면서 부질없는 이름만 불러보았다. 그제야 운선은 자신이 완전히 속았음을 깨달았다.
*** 전돈낭패(顚頓狼狽):
엎어지고 자빠지며 갈팡질팡함.